남아도는 석유 저장할 곳? "냄비밖에 안남았다"
상태바
남아도는 석유 저장할 곳? "냄비밖에 안남았다"
  • 김지은 기자
  • 승인 2020.04.23 15:4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WTI 쿠싱 저장시설 5월 첫째주면 가득 찰 듯
유조선도 모두 찬 상황...열차·소금동굴까지 저장시설로 개조 
사우디, 원유 5000만배럴 싣고 미국 향해..'원유 폭탄' 지적도
저장할 곳 없는 美 "당장 배 돌려라" 경고
극심한 수요파괴에 꽉 찬 저장시설의 위험성 입증된 셈
미국 오클라호마 쿠싱의 원유 저장시설. 사진=연합뉴스
미국 오클라호마 쿠싱의 원유 저장시설. 사진=연합뉴스

[오피니언뉴스=김지은 기자] "코로나19 쇼크를 능가하는 유가 쇼크"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최근의 상황에 대해 이렇게 표현했다. 사상 유례가 없는 마이너스 유가를 불러 일으킨 것은 '저장시설의 부족'이다.

블룸버그통신은 석유가 비탄력적 속성을 띠고 있다고 지적했다. 가격이 싸다고 수요가 갑자기 늘어나지 않고, 하루 아침에 생산을 중단할 수 있는 것이 아닌 만큼 공급 역시 가격에 탄력적으로 반응하기기 힘들다는 것이다. 원유 공급과 수요에서 완충장치 역할을 하는 것이 저장시설인데, 극단적인 수요 감소에 전세계 저장시설이 꽉꽉 들어차면서 '유가 쇼크'가 도래한 것이다. 

'이제 석유를 보관할 곳은 냄비밖에 남지 않았다'는 석유업계의 농담이 마냥 가볍게 들리지 않는 상황이다.  

왜 WTI 가격이 유독 변동성이 컸나

지난 20일(현지시각) 5월 인도분 미국 서부텍사스산중질유(WTI) 가격은 장 중 한 때 마이너스 40.32달러까지 떨어졌다. 선물 만기로 인한 특수적인 상황임을 고려해도 유례가 없는 일이었다. WTI 가격 폭락이 유독 심했던 이유 역시 저장시설에서 해답을 찾아볼 수 있다. 

서부 텍사스산 중질유로 해석되는 WTI(West Texas Intermediate)는 내륙 깊숙한 곳에서 뽑아낸다. 내륙에서 뽑아내기 때문에 육지 저장시설을 이용한다. WTI의 인도지점은 오클라호마주 쿠싱이다. 석유 거래의 허브라고도 불리는 이 곳은 약 7600만배럴의 저장 능력을 갖추고 있다.

골드만삭스 애널리스트에 따르면, 쿠싱의 저장 시설은 17일 기준 77%까지 가득찬 것으로 보고됐다. 남은 저장용량 역시 모두 예약이 완료된 상태다. 전문가들은 5월 첫째주에는 가득 찰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북해산 원유라고도 불리는 브렌트유는 북해 브렌트 유전에서 생산된다. 해상에서 생산되기 때문에 유조선에 저장이 가능하다. 골드만삭스 애널리스트는 "브렌트유의 경우 유조선이 쉽게 접근할 수 있기 때문에 육지로 둘러싸인 원유보다는 나은 상황"이라고 언급했다.

실제로 육지 저장시설은 해상 저장시설보다 비용도 많이 들고 더 복잡하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설명이다. 

WTI의 가격 변동이 브렌트유보다 더 큰 것도 이같은 '저장공간의 제약'에서 발생한 셈이다. 특히 최근과 같이 저장시설의 여유가 없는 상황에서는 저장시설 여력의 유무가 국제유가를 더욱 쉽게 좌지우지할 수 있음을 의미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최근 두 달간 브렌트유와 WTI의 가격 비교 그래프. 두 달 전인 2월23일을 기준점으로 현 시점까지의 브렌트유와 WTI의 가격 하락률을 나타낸다. 위(파란색)는 브렌트유, 아래(빨간색)는 WTI.
최근 두 달간 브렌트유와 WTI의 가격 비교 그래프. 두 달 전인 2월23일을 기준점으로 현 시점까지의 브렌트유(위의 파란색 선)와 WTI(아래의 빨간색 선)의 가격 하락 추이.

"석유 저장할 곳, 냄비밖에 없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을 비롯한 주요 외신들은 이제는 육지나 해상 할 것 없이 모든 저장시설이 거의 들어찼다고 언급하고 있다.

석유저장업체인 탱크타이거 최고경영자인 어니 바사미언은 "이제 석유를 보관할 곳은 냄비밖에 없다"고 말했다. 그의 말대로 송유관과 유조선, 열차는 물론 심지어 동굴까지 모두 석유로 꽉꽉 채워지고 있는 상황이다. 스웨덴과 스칸디나비아 반도에 위치한 지하 소금동굴들은 이미 예약이 꽉 찬 것으로 알려졌다. 

휴스턴 인근의 지하 소금동굴에서 액화천연가스 저장시설을 보유하고 있는 데이브 마쉐즈는 최근 보유 시설을 원유 및 가솔린 저장 시설로 변경하기로 결정했다.

저장시설 관련 업체들의 경우 콘탱고(원월물과 근월물의 차)가 발생할수록 이익이 나는 구조다. 현재 가격보다 몇 달 후의 석유값이 더 비싸야 석유를 저장시설에 보관하려는 수요가 많아지기 때문이다. 최근 원유시장은 코로나19라는 특수한 상황으로 인해 근월물 가격이 폭락하고 원월물일수록 가격이 높아지는, 즉, 콘탱고가 아주 극심한 상황이다.

이에 기존의 보유 시설을 원유 저장시설로 개조하는 이들도 많은 것으로 알려졌다. 

RVB탱크 스토리지솔루션의 크라이언 반빅은 "우리는 지금 가장 기묘한 저장시설에서 일을 하고 있다"며 "이곳들은 운영상 여러가지 제약이 있어 정말 힘든 곳"이라고 설명했다. 

코로나19가 본격화된 지난 두 달간 전세계의 수억 배럴 규모의 원유가 저장소로 들어간 것으로 확인됐다. 미 에너지정보청(EIA)에 따르면, 지난주 미국의 원유 재고는 2000만배럴 가까이 증가했다. 육지 저장시설은 말할 것도 없고, 유조선도 이제는 여유가 없다. 유조선에 실린 채 바다위를 떠도는 재고분도 1억6000만배럴로 추정된다. 

블룸버그통신은 전 세계 수요의 4분의 1에 달하는 석유가 유조선에 실려 롱비치에서 샌프란시스코만에 이르는 해안가를 따라 산재해있다고 보도했다.

WSJ에 따르면, 16개 유조선 소유업체를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200만배럴의 원유를 저장할 수 있는 815개 초대형 원유 수송선중 100여개가 4월 10일부터 21일까지 12일간 예약이 완료된 것으로 알려졌다. 하루 평균 운임 역시 15만달러로, 지난해 4월 평균 운임(약 1만달러)에 비해 크게 치솟았다. 

싱가포르의 한 유조선 중개업자는 "석유를 운반해달라는 주문보다, 보관해달라는 전화가 더 많이 걸려오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며 "남아도는 기름을 막기 위해서는 생산 중단 등의 조치를 취할 수 밖에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고 말했다. 

남아도는 원유, 상대국 위협하는 강력한 무기

상황이 이렇다보니, 석유를 실은 유조선이 상대국가를 위협하는 강력한 무기가 되는 실정에 이르렀다. 

미국 헤지펀드 헤이먼캐피털매니지먼트 설립자인 킬 바스는 22일 트위터를 통해 "사우디가 5000만배럴에 이르는 '원유 폭탄'을 미국에 보내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주장과 함께 탱커트랙커스닷컴의 그래픽을 제시했는데, 걸프지역에서 유조선 20척이 미국으로 향하고 있는 모습이 점으로 표시돼있다. 이들은 5월말 도착 예정이다. 

이는 미국에서 주문한 물량이지만, 사우디가 서둘러 선적했다는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 사우디의 월간 수출량의 7배에 해당하는 규모가 한 번에 배달되고 있는 것이다.

블룸버그통신에 따르면 현재 전략비축시설 가운데 비어있는 용량은 7850만배럴 정도에 불과하다. 저장시설이 이미 대부분 차있어 미국에서도 이 물량을 받을 수 없는 실정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미국으로의 원유 수송을 중단시킬 수 있는지 검토중"이라고 밝혔으며, 테드 크루즈 미 상원의원은 트위터를 통해 "당장 배를 돌리라!!"라고 경고했다. 

아랍권 언론사인 알자지라는 "사우디 측 역시 미국이 원유 수입을 중단할 경우 다른 곳으로 원유를 수송할 수 있을지 여부를 조사중"이라고 보도했다.

유럽의 한 무역회사 관계자는 "유럽 저장시설 역시 충분치 않지만 사우디가 정말 싼 가격을 제시한다면 구매자들이 받아들일 것"이라며 "아직 여유가 있거나 일정 기간 유조선에 보관하려는 사람이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아시아의 석유업계 관계자 역시 "미국행 수출이 막힌다면 상당량이 아시아 지역에 유입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중요한 점은 미국과 사우디 모두 저장시설 부족에 직면해있고, 상당한 규모의 석유가 처치 곤란한 상황에 놓여있음이 분명해졌다는 것이다. 

알자지라는 "이는 사우디인들에게는 생산을 중단하는 것이 훨씬 더 많은 비용이 들 것임을 입증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블룸버그통신도 "미국 정부가 사우디 원유의 반입을 금지한다 하더라도 미국 석유시장의 붕괴를 막지는 못할 것"이라며 "엄청난 수요 파괴와 빠르게 채워지고 있는 저장시설을 감안할 때 미국의 석유산업과 유가를 살리지는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IDB은행의 그레고리 리오는 "수학은 간단하다"며 "하루 생산량이 9000만배럴이고, 수요는 7500만배럴인 수급 불균형 상황이 개선되지 않는다면 일부 에너지 회사의 운명은 기름값과 같은 방향일 것"이라고 설명했다. 

미국 헤지펀드 매니저 킬 바스의 트위터 캡쳐 화면.
미국 헤지펀드 매니저 킬 바스의 트위터 캡쳐 화면.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0 / 40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