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만은 중국에게 태평양의 보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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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만은 중국에게 태평양의 보물
  • 김인영
  • 승인 2015.11.07 1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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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역사를 살펴본다…대륙 진출 기지이자, 태평양 진출의 교두보

 

중국과 대만의 현직 최고지도자인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과 마잉주(馬英九) 대만 총통는 7일 싱가포르 샹그릴라 호텔에서 첫 정상회담을 가졌다. 분단 66년만에 이뤄지는 첫 대좌라는 점에서 중국·대만은 물론 전세계의 이목이 쏠려 있다.

말이 정상회담이지, 중국측 입장에서 보면, 중앙정부 수반과 지방정부 지도자가 만나는 셈이다. 하지만 대만측에선 내전 당사자였던 두 세력의 최고통치자가 만나는 격이므로, 자존심을 꺾을수는 없는 입장이다.

그래서 두 정상회담에서 서로의 존칭을 ‘선생’이라고 부르기로 했다. 식사비를 비롯해 행사비용도 각자 분담하는 더치페이 방식을 채택하기로 했다고 한다. 서로의 자존심을 인정하자는 것이다.

정상회담에 앞서 대만이라는 조그만 섬은 어떤 역사 과정에서 중국 땅이 되었는지를 살펴보면 재미있는 사실을 발견할수 있다. 아울러 중국이 태평양으로 진출하려면 지정학적으로 대단히 중요한 지역이기도 하다.

 

대만이 중국영토가 된 것은 350년전

대만이 중국 영토가 된 역사는 매우 짧다. 우리나라로 치면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 끝난뒤 조선 후기의 일이다. 조선조 현종(1659~1674)과 숙종(16745~1720) 재위기간에 대만섬은 중국땅이 된다. 350년의 역사에 불과하다. 이중 50년은 일본 식민통치를 겪었으므로, 중국인이 통치한 기간은 그나마 300년으로 줄어든다.

 

중국 역대왕조는 전통적으로 내륙 국가였다. 3세기 중엽 위·촉·오의 삼국시대 때 심형(沈瑩)이 저술한 『임해수토지(臨海水土志)』에서는 대만을 이주(夷州), 즉 ‘오랑캐의 땅’으로 기록했는데, 그 곳이 대만섬을 지칭했는지에 대해선 이론이 있다. 7세기 초 수나라 때부터 한족이 대만에 대한 정찰을 시도하면서 ‘유구(流求)’라는 명칭으로 기록했는데, 지금 일본 땅이 된 오키나와와 혼동한 듯하다. 당시 대만과 오키나와를 구별하지 못한 듯 하다. 명나라 시대에 해상무역이 활발해지면서 대만에 정착하는 한족이 늘어났지만, 행정 관할은 두지 않았다.

16세기까지 대만에는 말레이-인도네시아계 원주민들이 살고 있었다. 이 원주민의 후손은 지금 타이완 높은 지대에 살고 있는 고산족이다.

1590년 포르투갈인이 동방무역을 위해 대만 해안을 방문해 ‘아름다운 섬’이라는 뜻으로 포르모사(Formosa)라고 이름지었다.

1624년 네덜란드의 동인도회사가 타이완 남부의 젤란디아(Zeelandia) 요새와 타이난 지역에 ‘안핑(安平)’이라는 소규모 거주지를 건설했다. 이어 1626년 스페인이 지룽(基隆)에 요새를 건설해 산살바도르(San Salvador)로 불렀다. 1629년 스페인이 현재의 단수이(淡水) 지역을 카스틸로(Castillo)라고 부르고 이 지역에서 식민정부를 수립하기 위한 준비를 했다.

1642년 스페인은 식민지었던 필리핀에서 내란이 발생하자 대만 북부에 대해 신경을 쓸 여력이 약해졌고, 이 틈을 타서 네덜란드가 스페인이 점령하고 있던 대만 북부 지역까지 점령한 후, 젤란디아 요새를 식민수도로 정했다. 네덜란드는 이때부터 동인도회사를 통해 대만을 관할하고, 총통을 임명하고 중국인 및 토착인에 대한 세금을 걷었다.

 

정성공은 대륙을 되찾기 위해 대만을 점령

이 무렵 해협 건너 대륙에선 만주족의 청나라가 서고, 명나라와 전쟁이 벌어졌다. 만주 청군이 남하하면서 명나라가 퇴각하자, 푸젠성(福建省)과 광둥성(廣東省) 해안지역 주민들이 대거 대만으로 이주했다. 푸젠성에서 만주족에 저항하며 명나라의 재건을 도모하던 정성공(鄭成功)이 1662년 대만을 침공해 네덜란드 세력을 축출하고 안핑을 새로운 도읍으로 정해 ‘항청복명(抗淸復明)’의 기지로 삼았다.

이때부터 대만은 중국인의 지배 영역에 들어간 것이다. 대륙은 청나라가 장악하고, 타이완엔 명나라 회복을 꿈꾸는 세력이 정권을 세워 양안 대치 정국이 형성된 것이다.

대치 상황은 오래가지 못했다. 정성공은 군대를 훈련시키고 해안에 성벽을 건설하는 등 청에 대항했다. 아들 정경은 청나라에서 ‘삼번의 난’이 일어난 틈을 이용해서 대륙으로 진격해 푸젠성 일대를 점령하기도 했지만 패하여 대만으로 다시 퇴각했다. 정경이 중국 대륙 진출에 실패하고 실의에 빠져 사망하자 왕위 쟁탈전이 벌어져 급격히 쇠퇴했다. 1683년 6월 청나라가 대만으로 진격하자 3대 임금 정극상이 청이 요구한 변발을 받아들이고 항복했다. 이로써 타이완을 지배한 鄭씨 왕조는 3대, 22년으로 끝났다. 다음해인 1684년 청은 타이완을 푸젠성에 예속시키고 타이난에 대만부(府)를 설치했다.

청나라는 프랑스와 청불전쟁이 일어나자 1885년 대만을 하나의 성(省)으로 격상시키고 순무(巡撫)를 파견했다.

 

 

일본은 대륙 진출기지로 대만을 활용했다

그러나 성으로 격상한지 10년후인 1995년 청일전쟁에서 청나라가 패하면서 대만은 1895년 시모노세키조약으로 일본의 식민지로 떨어졌다. 대만 주민들은 대만 순무이던 탕징쑹(唐景崧)을 총통으로 추대하고 대만민주국을 선포해 독립운동을 펼쳤지만, 실패했다.

대만은 50년간 일본의 통치를 받았다. 일본의 대만 통치는 조선에서 한 방식과 비슷했다. 초기엔 일본 본토에 대한 식량 공급기자와 일본 공상품으 소비기지화를 추구했고, 토지조사를 실시했다. 독립운동이 가열되면서 철저한 경찰 통제를 가했다. 말기엔 일본어 교육을 의무화했고, 황국신민화 정책을 실시했으며, 일본식 이름 사용과 신사참배를 강요했다.

1945년 8월 일본이 패망하면서 대만의 통치권은 연합국에 양도됐고, 국민당 정부는 국부군을 대만에 파견해 정권 인수작업을 벌였다. 그해 10월 25일 대만은 중국에 반환됐다.

 

1949년 5월 장제스의 중국 국민당은 공산군의 공격이 거세지자 대만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30만명의 국부군을 대만에 진주시켰다. 국민당은 광둥 등지에서의 공산군에게 패배하고, 그해 12월 7일 대만으로 ‘중화민국’ 정부를 이전했다.

이듬해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미국이 제7함대에 명령을 내려 대만 방어 임무를 수행하도록 하자, 중공군은 대만 상륙을 포기했다. 1958년 8월 23일 중국군이 푸젠성 영역이지만 대만 정부의 관할인 진먼다오(金門島) 지역에 대규모 포격을 실시했지만, 미 해군이 막아섬으로써 더 이상 확전으로 가지 않았다.

 

지정학적으로 대단히 중요한 섬

대만이 중국 영토가 되기 앞서 포르투갈, 스페인, 네덜란드가 동아시아로 진출하는 기지로 대만을 요새화했다. 이어 명나라 말기에 정성공이 명나라를 회복하기 위해 점령한 영토다. 300년후 장제스의 국민당 정부는 대륙 회복을 꿈꾸며 대만 해협을 건너와 작은 정부를 세웠다. 일본도 조선을 식민화하기 앞서 대만을 지배했고, 나중에 대륙진출 기지로 활용했다.

지금 미국은 태평양 전략에서 대만을 대단히 중요한 지역으로 판단한다. 장제스가 대만으로 건너와 안착한 것도 미군이 해협을 지켜줬기 때문이다. 남중국해 분쟁에서 미국이 개입하는 것도 대만을 근거지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중국의 입장에서 보면 대만은 일개 성에 불과하다. 그것도 푸젠성의 한 부(府)에 불과하던 것을 성으로 격상시킨지 얼마 되지 않았다.

하지만 대만은 한때 중국 대륙을 호령하다가 패망했지만, 대륙 회복이라는 큰 꿈을 포기하지 않은 세력이 건너와 세운 정부다. 대만 정부의 지방조직은 형식적으로 두 개의 성 조직으로 구성돼 있다. 하나는 대만성이고, 다른 하나는 죽국 연안의 진먼다오(金門島)등 몇 개 섬으로 구성된 푸젠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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