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동열의 콘텐츠연대기] ④ 최초의 포르노영화 ‘신부를 위한 취침시간’(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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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동열의 콘텐츠연대기] ④ 최초의 포르노영화 ‘신부를 위한 취침시간’(上)
  • 문동열 레드브로스대표
  • 승인 2020.03.11 16:16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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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동열 레드브로스대표.
문동열 레드브로스대표.

[문동열 레드브로스대표] 포르노그래피, 성적인 목적만을 가지고 제작되는 다양한 문화 형태 중 하나다. 그 근원이 인간 본성의 하나인 성욕과 맞닿아있는 관계로 구석기 시대의 벽화나 조각상 등에서도 그 흔적은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과거의 포르노(라기보다는 성적 묘사)들은 주로 다산 기원이나 종교 활동의 일부로 간주되었다. 폼페이나 고대 로마 유적지에서 발견되는 노골적인 성행위를 묘사한 벽화나 조각상들은 당시 사람들에게는 외설이라는 느낌보다는 그저 평범한 일상을 묘사한 예술작품과도 같은 의미였다. 

교회가 세상을 지배했던 중세 시대에도 종교적 윤리관으로 인해 포르노의 억압이 심했을 것 같지만 생각보다 포르노가 윤리적인 비난의 대상이 되지는 않았다. 대부분의 성적인 묘사는 그림이나 조각상 같은 고급 예술의 범위 내에서 이루어졌다. 책들도 일부 귀족이나 성직자들만이 가질 수 있는 고급품이었기에 스스로 자아비판이라도 하지 않는 이상, 그들만의 세계에서 소비되는 문화에 외설이라는 딱지를 붙일 이유가 없었다.

인간의 누드나 성행위의 묘사가 외설이라는 주홍글씨를 붙이게 된 건 인쇄술이 발명된 중세시대 이후의 일이다. 바로 대중들이 포르노그래피를 소유하기 시작하면서이다.

19세기 유행했던 포르노 이미지(일부). 사진= wikipedia.
19세기 유행했던 포르노 이미지(일부). 사진= wikipedia.

짧게 살펴보는 포르노그래피의 역사

우리나라의 고려나 독일의 구텐베르크는 각자 종교 경전을 대량 생산하기 위해 인쇄술을 발명했다. 하지만 항상 그렇듯이 사람들은 기술의 발명을 ‘숭고한 의미’에만 사용하지 않는다.

인쇄술의 발명으로 인해 가장 혜택을 본 건 종교개혁을 외치던 마르틴 루터일지도 모르겠지만 당시 긴 밤 딱히 오락거리가 없었던 수많은 성인 남녀들도 인쇄술의 은혜를 충분히 받게 된다. 인쇄술이 본격적으로 대중화되기 시작한 15세기 중반 이후 노골적인 성기 묘사와 성행위 장면 등을 포함한 다양한 삽화들이 페이지를 가득 채운 소설들이 대중들의 성적 욕구에 부응했다.

르네상스 시대와 맞물려 고대 그리스 신화를 배경으로 한 포르노 소설들이 특히 인기를 끌었다. 이미 그리스 신화 자체가 신들이 벌이는 다양한 성적 활동들이 메인 주제이기 때문에 이러한 미디어 믹스는 대중들에게 어필하기 쉬웠을 것이다.

이렇게 포르노가 인기를 끌면서 이를 못마땅하게 여겼던 사람들이 있었으니 바로 교회였다. 당시 교회에는 성직자나 귀족들만이 책을 소유했다. 교회는 무지몽매한 대중들을 교육해야한다는 종교적 관점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교회에게 인쇄술은 상당히 위협적인 도전이었다. 인쇄술을 통해 대중들이 쉽게 책을 접하게 되고 이로 인해 평민들의 지식수준이 높아져가면서 대중들을 컨트롤하기가 점점 힘들어졌다.

인쇄술에 대한 교회의 불만은 높아졌고, 특히 종교 개혁파들이 구교를 비판하는데 인쇄술이 사용되었던 터라 인쇄술은 당시 교회에 있어 악마의 기술로 여겨졌다. 이런 상황에서 인쇄술로 인해 인기를 끌게 된 포르노 외설서적들은 교회에 좋은 명분을 제공했다.

기독교 윤리에 반한다는 이유 등을 들어 광범위한 검열이 일어났고 일련의 포르노 도판들과 서적들이 불태워지는 한편 작가들은 투옥되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포르노의 유혹에 한 번 맛들인 대중들이나 제작자들이 ‘네네’ 알겠습니다하고 항복했을 리는 만무하다. 17세기 중후반에 들어서면서 교회의 권위도 예전 같지 않고, 서서히 계몽운동이 발현되기 시작하면서 포르노는 자유사상의 물결을 타고 하나의 대중문화로 자리 잡게 된다.

특히 프랑스의 자유사상가들을 중심으로 한 사회개혁파들은 포르노가 사회 비판과 풍자의 도구로 대중들에게 아주 효과가 높은 것을 깨닫게 되면서 포르노를 정치 활동의 무기로 활용하기 시작한다. 주로 그들이 타파해야할 대상인 고위 성직자들이나 귀족 계층들의 부패를 대중들에게 알리고 그들의 권위를 떨어뜨리기 위해 그들의 도덕성을 공격하는데 포르노를 활용했다. 이 정치적 포르노는 귀족과 성직자들이 난교와 매음을 일삼는 부패한 집단이며 이들로 인해 피해 받는 것은 힘없는 대중들이다라는 단순하면서도 명확한 프레임을 제공했다. 

결과는 아주 효과적이었다. 이 시기 포르노와 정치는 빈번하게 메시지를 공유했고, 상대 정치인을 비난하기 위해 그를 포르노 속의 난봉꾼으로 등장시키는 흑색선전에 이용하기도 했다. 얼굴은 사뭇 근엄한 표정이지만 하의 실종 상태에 커다랗게 강조된 성기를 덜렁거리며 겁먹은 어린 하녀를 강제로 올라타고 있는 정치인의 모습이 삽화로 가득 채워져 있는 포르노 소설을 한편 보고나면 그 정치인에 대한 신뢰가 뚝하고 떨어졌음직하다. 이러한 포르노 마타도어는 꽤 효과적이었던지 프랑스 혁명을 지나 18세기까지도 꾸준히 활용되었다. 

성애장면이 묘사된 인도 Virupaksha Temple의 조각의 일부. 사진=레드브로스 DB.
성애장면이 묘사된 인도 Virupaksha Temple의 조각의 일부. 사진=레드브로스 DB.

사진기술의 발명과 포르노

이 시기까지의 포르노는 활자와 그림이 주요한 매개체였고 매체는 책이었다. 19세기에 들어 사진 기술이 발명되면서 포르노는 새로운 전환기를 맞게 된다. 사진의 초창기 시절, 프랑스의 사진 교육 기관인 프랑스 과학 아카데미에서 많은 사진작가들은 그림에서 누드화를 그리듯 사람의 누드를 사진으로 촬영했다. 이는 지금의 미술 교육에서 인체 누드 데생이 차지하는 의미처럼 순전히 학술적이었고 예술적인 관점에서의 작업이었다.

이들이 촬영한 누드 사진은 정부에 등록해야했고, 판매는 금지되었다. 하지만 많은 이들이 (비공식적인 루트를 통해서라도) 이 누드 사진을 소장하기를 원했고, 결국 아카데미는 학생들을 돕는다는 취지(!)로 이 누드 사진을 일반 대중들에게 판매한다. 어떻게 보면 최초의 포르노 사진 판매업자는 프랑스 과학 아카데미였던 것이다. 

사진을 발명한 루이 다게르. 사진=레드브로스 DB.
사진을 발명한 루이 다게르. 사진=레드브로스 DB.

프랑스 과학 아카데미가 허슬러나 플레이보이 같은 잡지의 선배 격이라 생각하면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아카데미의 누드 사진이 인기를 끌면서 보다 자극적인 것들을 원하는 사람들이 늘었고, 당시 사진 관련 업자들은 이러한 대중들의 요구에 부응해 본격적인 포르노 사진들을 생산하기 시작한다. 

누드뿐만 아니라 남녀 간의 성행위, 즉 섹스를 촬영하기 시작한 것이다. 지금의 포르노와 같이 과격한 성기 노출보다는 주로 남녀 간의 에로틱한 성행위의 다양한 체위들을 ‘성교육’이라는 명분으로 포장한 작품들이었다. 초기의 이 포르노 사진들은 상류층의 전유물이었다. 가격이 상당히 비쌌기 때문이었다. 높은 가격의 원인은 일단 이들 포르노 사진들이 합법적이지 않았고 거기에 제작 프로세스의 비효율성이 더해졌기 때문이었다. 

당시의 사진은 촬영 시간이 아주 길었다. 포즈를 잡고 최소 3분에서 15분은 꼼짝하지 않고 있어야만 선명한 이미지를 얻을 수 있기 때문에 모델들은 상당한 고생을 해야 했다 (따라서 현대적인 의미의 역동적인 포르노 사진은 구현하기가 힘들었다). 누드 상태로 오랜 시간 꼼짝하지 않아야하는 고통에 성행위를 남에게 보여줘야 한다는 부담감 등 여러 요소로 인해 모델료를 포함한 제작비용은 높아질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포르노 사진 한 장이 당시의 평균적인 노동자 급여의 일주일 치에 상당했다. 

이 비싼 가격으로 인해 대부분의 노동자 계층에게 초기 포르노 사진은 그림의 떡이었다. 거기에다 루이 다게르가 발명한 초기 다게레오 타입(daguerreotype)의 사진은 복제가 힘들었다. 개별적인 건판을 사용해 피사체를 촬영하는 방식 덕에 복사본을 만들려면 원본 사진을 다시 촬영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열악한 제작 환경들은 초기 포르노 사진을 대중화시키는데 큰 걸림돌이 되었다. 이러한 초기 포르노 사진들은 수천 개 이상 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현재 남은 건 800개 정도로 그 희귀성으로 인해 수집가들에게는 큰 사랑을 받고 있다. 사진 한 장 당 평균 가격이 1만 파운드정도라고 한다.

포르노 콘텐츠 산업의 성장

이렇게 다게레오 타입의 포르노 사진이 한 장 한 장 힘들게 만들어지고 있던 와중에 1841년 영국에서 칼로 타입(Calotype)의 사진 기술이 발명된다. 건판이 아닌 필름 카메라처럼 원본을 필름으로 만들고 이를 종이에 인화할 수 있는 칼로 타입은 사진의 복제를 손쉽게 만들었다. 

칼로 타입 기술의 발명은 싼 가격으로 많은 상업 사진의 생산을 가능하게 만들었고, 칼로 타입이라는 신기술은 곧 포르노 사진의 대중화에 활용됐다. 1848년 파리에 13개에 불과했던 사진 스튜디오는 1860년에 400개까지 늘었고, 대부분의 사진 스튜디오의 주요 수입원 중 하나는 불법 포르노 이미지의 판매였다. 

섹슈얼 이미지를 사용한 당시의 사진엽서-아주 순화된 버전. 사진=레드브로스DB.
섹슈얼 이미지를 사용한 당시의 사진엽서-아주 순화된 버전. 사진=레드브로스DB.

앞서 말한 것처럼 포르노 사진의 생산과 판매는 프랑스 과학 아카데미에만 허락된 고유한 권한이었고 개인 스튜디오들이 정부에 등록하지 않은 이러한 포르노 이미지를 판매하는 일은 엄연히 불법이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불법이라고 사람들이 야동을 보지 않는 건 아니다. 가격도 싸졌고, 대량 생산도 가능한데다가 대중들도 그것을 원하고 있다면, 그 콘텐츠는 대중적으로 빠르게 확산해간다. 그것이 불법임에도 말이다. 

칼로 타입의 발명으로 인해 포르노 사진들을 싸고 대량으로 생산가능하게 되자, 포르노 이미지 비지니스는 급성장하기 시작한다. 여성의 누드가 가장 일반적인 형태였고, 남녀 간의 성행위도 주요한 테마였다. 
대량 생산으로 인해 아카데미에서 생산되던 이미지와는 달리 전문 모델들이 아니라 대부분 가난한 노동자 계급 출신의 여성들이 모델로 출연했다. 이런 이미지들은 스튜디오 주변의 기차역과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번화가 등에서 은밀하게 팔렸다. 

길거리에서 잘 차려입은 세일즈맨의 가방이나 여성의 드레스 속치마 등에 사진을 숨기고 암암리에 판매했다. 우리가 80년대 청계천에서 불법 포르노 비디오를 팔던 방식처럼 말이다. 이렇게 만들어진 사진들이 프랑스뿐만 아니라 영국이나 미국 등 글로벌하게 유통되기 시작하면서 사진 포르노 비지니스는 점점 성장했다. 

거기에 우편 시스템이 사회적으로 정착하기 시작하면서 우편을 통한 새로운 유통 경로도 찾게 된다. (넷플릭스가 초기에 우편으로 DVD를 배송했던 그 방식이다!) 이 시기 유행했던 것들 중 하나가 ‘에로틱 포스트카드’라는 것으로 바로 우편엽서에 여성의 누드사진을 인쇄한 것이다. 

19세기 후반 유행했던 포르노 이미지의 자세를 취한 사진 작품. 당시 유명한 사진작가였던 앙투앙 세브리겡(Antoin Sevruguin)의 작품. 이 사진은 당대에도 음란물이라기보다는 사진 작품으로 인정받았다. 사진=레드브로스 DB.
19세기 후반 유행했던 포르노 이미지의 자세를 취한 사진 작품. 당시 유명한 사진작가였던 앙투앙 세브리겡(Antoin Sevruguin)의 작품. 이 사진은 당대에도 음란물이라기보다는 사진 작품으로 인정받았다. 사진=레드브로스 DB.

특히 미국에서 이런 누드 사진엽서가 대유행을 했는데, 미국에서는 이러한 엽서를 ‘프랑스 엽서 (french postcard)’라고 불렀다. 대부분의 지역에서 이 엽서의 배달을 윤리적인 이유로 거부했기에 실제로 사용할 수는 없었지만 일종의 수집 아이템으로 큰 인기를 끌었다. 이 것이 어떤 건지 정체가 궁금한 독자는 구글링해보면 이미지를 쉽게 찾을 수 있다. (검색하기 전에: 이미지가 과격하지는 않지만 대부분이 여성의 누드이기에 구글 성인인증 및 뒤에 누가 있는지 확인이 필요함.) 

이렇게 성장한 포르노 이미지 산업은 새로운 기술과 새로운 유통 시스템, 합리적인 가격, 이를 뒷받침할 노동자계층의 임금 상승등 여러 요인이 딱 맞아떨어지면서 급격한 성장을 하게되면서 명실상부한 ‘산업(industry)’으로 발전하게 된다. 바야흐로 현대 포르노 산업의 여명기라 부를 수 있을 것 같다.

이렇게 성장을 거듭하고 있던 포르노 이미지 산업은 당시 막 대중들에게 선보이기 시작한 영화 산업에도 큰 영향을 주게 된다. 포르노가 돈이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된 많은 제작자들이 영화라는 새로운 기술을 두고 이를 포르노와 접목하게 되면 큰돈을 벌 수 있을 것이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그런 와중에 탄생한 것이 바로 최초의 포르노 영화라고 할 수 있는 ‘신부를 위한 취침시간 (Le Coucher de la Marie)’ 이다. (하편에 계속)

●문동열 대표는 일본 게이오대학 대학원에서 미디어 디자인을 전공하고, LG인터넷, SBS콘텐츠 허브, IBK 기업은행 문화콘텐츠 금융부 등에서 방송, 게임, 영화 등 다양한 콘텐츠 기획 및 제작을 해왔다. 콘텐츠 제작과 금융 시스템에 정통한 콘텐츠 산업 전문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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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비드 2020-03-28 11:59:15
이런 역사가 있었군요 이해하기 쉽게 팩트로 기반하여 만드신 유용한 기사 감사드립니다. 몇백년간 존재한 이슈였는데 마치 현대사회 지금부터 이슈가 재기된거처럼 느껴졌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