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민정의 예술적인 法] 봉준호의 영광, 고(故) 이재학PD의 눈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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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정의 예술적인 法] 봉준호의 영광, 고(故) 이재학PD의 눈물
  • 김민정 변호사(법무법인 휘명)
  • 승인 2020.02.16 11:20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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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사받을만한 CJ의 결단...영화계 근로환경 바꿔놔
공연, 방송은 스태프 '노동착취' 여전...이재학PD 목숨 끊어
문화예술계 근로기준법 '사각지대'...제2의 CJ 나와 획기적 개선해야
김민정 변호사
김민정 변호사

[김민정 법무법인 휘명 변호사] 바이러스의 위협으로 다소 위축되어있는 요즘 같은 시기에, 지난 10일 영화 ‘기생충’의 아카데미 수상 소식은 더욱더 반가운 낭보였다. 문화예술계는 큰 경사로 오랜만에 들뜬 분위기다.

작품상을 수상할 당시 제작자인 바른손이앤이의 곽신애 대표에 이어 봉준호 감독이 아닌 CJ그룹 이미경 부회장이 수상소감을 밝힌 것에 대해 뒷말이 나오기도 했다. 그러나 CJ그룹은 기생충을 포함한 한국 영화에 대한 전폭적인 투자로 우리 영화계의 발전을 이끌었고, 특히 영화산업 전반의 근로환경의 개선에 큰 몫을 해왔기에 그 공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기생충은 촬영 당시 스텝과 배우 전원이 표준근로계약서를 작성했고, 주 52시간 근무, 최저임금, 휴일 등 근로기준법상의 규정을 준수하면서도 총 77회의 촬영으로 작품이 완성됐다고 알려져 화제가 되었다. 그런데 불과 5-6년 전까지만 해도 영화계 근로환경의 현실은 그야말로 비상식적이었다.

CJ "표준계약서 미이행 영화제작사에 투자안해" 선언    

계약은 제작사와 스태프 팀장 사이의 도급 형태로 이뤄졌고, 팀장은 평소 일을 같이 해오던 친한 형, 동생들을 모아 팀을 꾸렸다. 그러다보니 각 스태프들은 제작사에 고용된 근로자로 인정받지 못했고 근로기준법의 적용대상이 아니었다.

주말없이 밤샘촬영을 해도, 한달 두달 촬영기간이 늘어나도, 연장근로수당은 꿈도 못 꾸었고 노동청에 신고하면 해결되는 일반 근로자들의 체불임금과는 달리 영화가 흥행에 실패하면 언제 받을 수 있을지 모르는 임금은 좁은 영화바닥에서 법적으로 해결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러던 영화판이 불과 몇 년 사이에 눈에 띄게 바뀌었다. 열악한 영화인들의 근로환경을 개선하고자 노사정이 모여 앉았다. 드디어 2012년에는 정부가 주관하고, CJ엔터테인먼트(CJ ENM)와 영화노동계가 적극 협조해 ‘영화산업 발전을 위한 노사정 이행협약’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당시 거대 투자·배급사인 CJ엔터테인먼트가 큰 역할을 했다. CJ는 표준계약서를 사용하지 않는 제작사에는 투자하지 않겠다는 전향적인 자세를 취한 것이다. 그 영향으로 이후 이어진 2차 및 3차 ‘노사정 이행협약’ 과정에서는 롯데엔터테인먼트, 쇼박스, 메가박스 등이 뒤이은 참여를 결정해 결국 영화 표준근로계약서 작성이 영화계의 관행으로 자리잡는데 성공했다.

봉준호 감독이 영화 '옥자'를 연출하고 있는 모습. 사진=연합뉴스(넷플릭스 제공)
봉준호 감독이 영화 '옥자'를 연출하고 있는 모습. 사진=연합뉴스(넷플릭스 제공)

영화外 문화예술계, 스태프 근로환경 개선 '요원' 

영화진흥위원회가 발표한 '2018년 영화 스태프 근로자 실태조사'에 따르면 2018년 기준으로 영화 스태프의 약 74.8%가 작성한 '영화산업 근로표준계약서’는 ‘시간급용(用)’과 ‘포괄임금용(用)’의 두 종류로 되어있고, 근로시간(주 52시간) 및 휴게시간, 임금(연장근로수당 가산, 연차수당 등 항목 포함), 휴일 및 휴가, 4대보험, 산업안전과 재해보상조치, 크레딧 명기, 지적재산권 등에 관한 내용이 구체적으로 명시되어 있다.

그런데 안타까운 점은 아직 문화예술계에서 이러한 정상적인 근로환경이 조성된 분야는 영화계가 유일하다는 것이다. 근로자라면 누구나 보장받는 위와 같은 권리들이 방송, 공연 등 분야의 종사자들에게는 '딴 세상' 얘기라는 것이다.

현재 문화예술관련 10개의 분야에서 총 61종의 표준계약서가 만들어져 있는데, 문체부의 ‘2018 예술인 실태조사’에 따르면 예술활동을 하며 서면 계약을 체결한 비율은 37.3%에 불과했다.

방송계의 경우 표준계약서(근로, 위탁, 도급 등)를 작성한 방송 노동자 비율은 38.6%에 그치고, 이중 표준 ‘근로’ 계약서를 작성한 경우는 39.6%(한국콘텐츠진흥원의 ‘2019년 방송제작 노동 환경 실태조사’에서)다. 결국 전체 방송노동자 중 표준근로계약서의 내용대로 계약을 체결한 비율은 15.3%에 불과한 상황이다. 영화스태프의 수치(74.8%)와는 대조적이다.

설사 표준계약서를 작성하더라도 방송국이나 제작사의 이해관계에 맞춰 임의대로 수정하거나 계약내용 위반, 임금체불은 흔히 있는 일이다.

방송계 노동자의 72%가 방송사나 제작사로 출퇴근하며 주 40시간 넘게 상근체제로 일해도 프리랜서라는 이유로 근로기준법의 사각지대에 있으며, 원고료와 저작권에 대한 보호는 물론 기본 처우도 받지 못하고 있다.

지난 4일에는 청주방송에서 14년간 일했던 故이재학PD가 이러한 냉혹한 현실에 견디다 못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 PD는 월 160만원의 급여를 받고 과도한 업무에 시달리다 인건비 인상을 요구하자 2018년 4월 해고를 당했다. 그는 근로자 지위확인을 구한 1심 소송에서 패한 뒤 2주만에 세상을 떠났다.

공연계는 한참 뒤처져 지난해 8월에서야 비로소 표준근로계약서가 공표되었다. 기존에 프리랜서 기술스태프를 대상으로 했던 ‘표준기술지원계약서’를 ‘근로계약서’와 ‘용역계약서’로 구별했다. 근로계약서에는 근로기준법에 따른 법정 근로시간, 임금지급기준, 안전배려 의무 등이 포함되어 있다. 공연계는 표준근로계약서의 개발로 열악한 스태프들의 처우가 조금이나마 개선되기를 기대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랜 세월 뿌리 깊게 내려진 고질적인 문화예술계 스태프의 노동 착취구조가 표준근로계약서의 개발 및 사용 권고만으로 자연스레 개선되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메이저 방송사·공연기획사, 과감한 결단해야

법과 제도의 실질적인 뒷받침이 필요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다. 표준계약서 사용의 의무화는 신중히 검토해보아야 할 문제이지만 단순한 권고 이상의 적극적인 조치가 필요해 보인다. 또한 임금체불, 장시간 노동 등에 대해서는 근로기준법의 사각지대에 있는 영역을 포괄할 수 있는 실효성있는 제도가 시급하다.

무엇보다 영화계의 선례처럼 노사정이 ‘근로환경 및 관행의 개선’이라는 확고한 목표를 이뤄내기 위한 굳은 의지를 가지고 머리를 맞대야만 한다.

문화체육관광부와 방송통신위원회의 적극적인 주도 아래 자본력을 가진 제작사, 투자사, 방송사, 공연장들이 당장의 이익을 다소 포기할지라도 긍정적인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 과감한 결단을 해야 업계 전반이 달라질 수 있다.

결국 판을 뒤집는 것은 파워있는 자의 몫이라는 것을 영화계가 잘 보여주었다. 공연, 방송 등 엔터테인먼트 사업 전반을 움직이고 있는 CJ ENM 등이 한번 더 그 역할을 해주는 것은 어떨까. 방송에선 KBS 등 거대방송사가, 공연계에선 신시컴퍼니, EMK뮤지컬 등이 역할을 하고 문체부와 방통위가 제도 개선을 지원해야 한다.   

‘기생충’을 두고 좋은 제작이 좋은 작품을 낳은 것이라고들 한다. 스태프들의 권익이 보호되는 현장에서 수준 높은 작품이 나올 수 있다. 할리우드를 넘어 브로드웨이에서도 우리 작품이 당당히 토니상(연극·뮤지컬계의 아카데미상)을 거머쥘 날을 기대해 본다.

● 김민정 변호사(법무법인 휘명)는 서울대 음악대 기악과(피아노 전공), 베를린 국립 예술대를 나왔다. 이후 서강대 법학전문대학원을 졸업했다. 현재 법무법인 휘명에서 변호사로 재직중이며 한국저작권위원회 감정인, 한국엔터테인먼트법학회 정회원으로 활약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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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선인 2020-02-17 14:29:10
전적으로 동감합니다. 열정 페이로는 창작을 할 수
없습니다. 고생한 스태프들에 충분한 급여를 지급해야 지속적으로 좋은 작품이 탄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