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o is] 금탑산업훈장에 빛난 신격호 롯데명예회장의 삶
상태바
[Who is] 금탑산업훈장에 빛난 신격호 롯데명예회장의 삶
  • 변동진 기자
  • 승인 2020.01.20 14: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껌 시작으로 유통·관광·화학으로 사업 확대
롯데, 재계 5위로 우뚝…자산 115조3000억
한국 랜드마크 롯데월드타워, 30년 공들여
형제간 경영권 분쟁·건강으로 얼룩진 말년
신격호 롯데그룹 명예회장. 사진제공=롯데지주
신격호 롯데그룹 명예회장. 사진제공=롯데지주

[오피니언뉴스=변동진 기자] 흔히 이르기를 '난세는 영웅을 만들고 불황은 거상을 만든다'고 했다. 세계2차대전, 6·25전쟁 등 전쟁의 불황기에 갖은 고생 속에서도 성실함으로 신격호 롯데그룹 명예회장은 한국과 일본에서 거대한 부를 일궜다. 그리고 고국, 대한민국으로 돌아와 한국경제 성장에 큰 역할을 하고, 이제 고국에 묻히게 됐다.    

◆일본 오일 사업 실패 후 비누로 재기…식품으로 사업 확장

1922년 10월 4일 경남 울산 삼남면 둔기리에서 5남 5녀의 맏이로 태어난 신 명예회장은 1942년 일본으로 건너갈 당시만해도 공부에 대한 열망이 더 컸다. 그곳에서 신문·우유 배달 등으로 고학 생활을 시작했고, 와세다대 화학공학과 야간부를 다니면서도 문학도를 꿈꿨다.

그의 성실함을 눈여겨본 한 일본인이 직접 출자, 그는 1944년 커팅 오일 제조 공장을 세웠다. 하지만 이 사업은 쓰디쓴 실패를 맛봤다. 2차 세계대전 당시 가동도 해보지 못한 상태에서 공장이 두 번이나 폭격을 맞아 잿더미가 됐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에 굴하지 않고 신 명예회장은 1946년 허물어진 군수 공장에서 비누 회사를 차려 재기에 성공했다. 생활용품이 부족했던 전후 상황의 흐름을 읽었던 것. 사업 시작 1년 반 만에 일본인에게 신세진 돈을 모두 갚고 따로 집을 한 채 사주며 고마움을 전했다.

비누에 이어 화장품으로 사업기회를 잡았던 신 명예회장은 당시 주일미군이 씹던 껌이 일본 어린이들에게 엄청난 인기를 누리자 껌 사업에 뛰어든다. 없어서 못 팔 정도로 인기를 끌며 큰 돈을 벌었다. 그의 눈에는 전후 복구상황에서 사업기회가 지천으로 늘렸을까. 1948년 종업원 10명과 함께 자본금 100만엔을 투자해 ‘롯데(LOTTE)’를 세웠다. 문학도를 꿈꿨던 그는 한창 심취해 있던 괴테의 소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에 나오는 여주인공 이름인 ‘샤를로테(Charlotte)’에서 이름을 따왔다. 

신 명예회장은 1961년 초콜릿 시장이 커질 것을 예감, 유럽의 기술자와 설비 확보를 위해 과감한 투자를 단행했다. 이후 캔디, 비스킷, 아이스크림, 청량음료로 사업 영역을 확대했다. 최고의 경쟁력을 갖출 때까지 투자를 아끼지 않았던 경영 방침은 롯데가 지속적으로 성장할 수 있는 토대가 됐다.

식품업으로 마련한 자금은 1959년 롯데상사, 1961년 롯데부동산, 1967년 롯데아도, 1968년 롯데물산, 주식회사 훼밀리 등 사업 다각화에 쓰이면서 일본 10대 기업으로 성장했다. 조선인에 대한 편견과 차별이 심했던 당시, 일본내 10대 기업을 일궜다는 사실은 그의 사업능력이 얼마나 대단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다.

롯데제과 공장을 점검하는 신격호 명예회장. 사진제공=롯데지주
롯데제과 공장을 점검하는 신격호 명예회장. 사진제공=롯데지주

◆고국으로 돌아와 롯데그룹 시대 열어

신 명예회장의 사업에 큰 전기가 된 것은 한·일 수교(1965년). 이로인해 양국간 경제 교류가 활발해지자 신 명예회장은 조국으로 눈을 돌렸다. 1967년 한국으로 돌아와 롯데제과를 설립하며 ‘롯데그룹’의 시대를 열었다.

무엇보다 당시 박정희 전 대통령은 해외 자본으로 국내 산업을 일으키고자 했던 시기로, 신 명예회장 입장에서는 최적의 기회를 주었다. 실제 박 전 대통령은 외국인투자기업에 최소 5년간 취득세, 소득세, 법인세 등을 면제해주는 외자도입특례법을 제정했다. 신 명예회장이 이끄는 롯데 역시 파격적인 특혜를 제공받았다.

예컨대 1973년 롯데가 호텔을 짓기 위해 당시 반도호텔과 국립중앙도서관 부지를 매입할 때도, 1980년 서울 소공동 롯데백화점 본점 자리에 있던 산업은행 부지를 사들일 때도 정부는 롯데를 적극 밀어주었다. 1988년 부산 부전동 롯데호텔 부지 5800평을 사들일 당시 자본금의 99.96%가 일본인 소유란 이유로 외국인투자촉진법을 적용받았다. 

신 명예회장은 한일 양국을 오가며 ‘셔틀 경영’을 했고, 1973년 호텔롯데·롯데기계공업·롯데파이오니아를 설립했다. 이듬해 롯데상사를 세운 뒤 훗날 롯데칠성음료가 되는 칠성한미음료를 인수했다. 1976년 호남석유화학(현 롯데케미칼) 인수에 이어 1978년 삼강산업(현 롯데푸드)과 평화건설(현 롯데건설)를 인수했고, 롯데햄·롯데우유(현 롯데푸드)를 설립하는 등 파죽지세로 사업을 확장했다. 1979년 호텔롯데에 이어 롯데쇼핑센터(현 롯데백화점 본점)을 오픈하며 불모지나 다름없던 국내 시장에서 유통·관광 산업의 꽃을 피웠다. 결국 롯데는 1983년 24개 계열사에 2만명의 종업원을 거느린 한국 10대 대기업으로 올라섰다.

1989년 7월12일 롯데월드 개관식에 참석한 신격호 롯데그룹 명예회장. 사진제공=롯데지주
1989년 7월12일 롯데월드 개관식에 참석한 신격호 롯데그룹 명예회장. 사진제공=롯데지주

◆한국 '관광산업'을 본격 발전시킨 신격호, 금탑산업훈장 받아 

신 명예회장은 현대적인 의미의 관광산업을 한국에 제시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그 공로로 1995년 신 명예회장은 금탑산업훈장을 수여받는다. 

그는 세계적인 수준의 호텔을 한국에 짓기 위해 글로벌 시장에서 위상이 높은 호텔들을 답사했고, 수시로 현장을 방문해 건물 설계와 인테리어까지 꼼꼼히 확인했다. 국내 최초의 초고층 빌딩인 서울 잠실 롯데월드타워(지상 123층, 높이 555m)도 그가 얼마나 관광에 관심이 있는지 보여주는 대목이다.

롯데월드타워는 30여년간 품어온 신 명예회장의 숙원사업이었다. 그는 “외국 관광객들에게 계속 고궁만 보여줄 수는 없지 않냐”며 “외국인들이 찾아오고 싶어할 만큼 세계에 자랑할 만하고 후세에 길이 남을 수 있는 건축물을 세워야 한다”고 항상 강조했다.

그는 또 일본 롯데로 번 돈을 국내에 대거 투자했다. 호텔롯데의 지분 90% 이상이 일본계인 이유도 일본 자금을 국내에 끌어오기 위해서였다. 일본 정부의 견제까지 있었지만, 고국을 향한 그의 투자는 계속됐다.

신 명예회장은 기간산업에도 관심이 많았다. 1979년 호남석유화학 인수 성공으로 그는 날개를 달았다. 그해 여천단지 내 3개의 공장을 완공하고, 고밀도 폴리에틸렌(HDPE)·폴리프로필렌(PP)·에틸렌옥사이드(EO)·에틸렌글리콜(EG)의 상업생산을 시작해 국내 석유화학산업을 이끌었다. 2012년 롯데케미칼로 사명을 변경했고, 현재는 유통과 함께 그룹의 한 축을 담당하는 캐시카우로 성장했다.

2011년 6월 롯데월드타워 건설현장을 점검 중인 신격호 명예회장. 사진제공=롯데지주
2011년 6월 롯데월드타워 건설현장을 점검 중인 신격호 명예회장. 사진제공=롯데지주

◆가족간 경영 분쟁은 오점...국가 경제 발전 이바지에는 후한 점수줘야

신 명예회장은 특유의 통찰력과 카리스마로 70년 가까이 ‘왕좌’ 앉아 한국과 일본 롯데를 진두지휘했다. 그러나 일본에서 일본인들의 차별적인 시선과 견제를 받으면서 몸에 배인 폐쇄적인 경영 방식은 비판과 오해를 받기도 했다. 결국 법정에서 배임과 횡령 혐의로 유죄를 선고받는 오명도 남겼다. 게다가 아들 신동주 전 일본 롯데홀딩스 부회장(現 SDJ코퍼레이션 회장)과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의 경영권 분쟁은 좀더 빨리 후계체제 정리를 하지 못한데 따른 인과응보라는 평가도 없지 않다. 

이에 앞서 친동생인 신춘호 농심 회장, 신준호 푸르밀 회장 등과 회사 소유권을 두고 다툼을 벌이는 등 잦은 송사를 겪었는데, 장남이었던 신 명예회장의 폐쇄적 경영 방식 탓이라는 지적도 없지 않다. 

그가 좀더 폐쇄적 경영방식을 개선하고, 지배구조를 투명하게 개선해가는데 소홀했던 점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평가가 많다. 그중에 하나는 일본 당국의 견제라는 설이다. 일본정부 특히 과세당국이 신 명예회장이 일군 사업, 그 자산에 대한 과세에 끊임없이 관심을 가졌고, 그래서 일본 롯데는 물론, 한국 롯데에 대해서도 계속 정보를 수집했다는 것. 반대로 이를 의식한 신 명예회장은 그룹 재무상황과 지배구조 상황을 드러내지 않으려 애를 썼다는 것이다. 신 명예회장의 별세로 일본은 다시 한번 그의 일본내 재산에 과세하는데 적극 움직일 것으로 보인다. 

1991년 롯데백화점 영등포점 개점 기념식에 참석하는 신격호 명예회장 내외와 차남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오른쪽). 사진제공=롯데지주
1991년 롯데백화점 영등포점 개점 기념식에 참석하는 신격호 명예회장 내외와 차남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오른쪽). 사진제공=롯데지주

 

롯데호텔 설립 추진 회의를 진행 중인 신격호 롯데그룹 명예회장과 임원들. 사진제공=롯데지주
롯데호텔 설립 추진 회의를 진행 중인 신격호 롯데그룹 명예회장과 임원들. 사진제공=롯데지주

◆신격호 경영철학, 신뢰·정직·최고

신 명예회장의 경영철학은 정직과 봉사, 그리고 열정으로 압축된다. 기업의 존재이유는 생산 활동을 통해 인간의 행복에 기여하는데 있으며, 이로써 사회와 국가에 봉사하는 것이므로 무엇보다 정직한 기업정신이 요구된다는 생각이다. 정직한 기업정신을 바탕으로 한 열정적인 활동 즉, 온 힘을 기울여 매진하는 정성스러운 기업인의 자세가 뒷받침 되어야 한다는 철학이다.

또 하나 시작한 사업이 최고의 경쟁력을 갖출 때까지 다른 부분을 엿보지 않는 자세다. 이는 그동안 손을 댄 사업이 대부분 우리나라에서 최고를 차지하고 있는 것에서도 드러나고 있다. 롯데제과와 롯데칠성음료, 호텔롯데, 롯데쇼핑, 롯데월드 등이 모두 업계에서 최고의 경쟁력을 갖추고 시장을 선도해 나가고 있다.

1979년 12월17 롯데쇼핑센터 개장 테이프 커팅. 사진제공=롯데지주
1979년 12월17 롯데쇼핑센터 개장 테이프 커팅. 사진제공=롯데지주

◆그가 남긴 어록

“고객과의 약속은 어떠한 경우에도 지켜야 합니다.”

“기업인은 회사가 성공할 때나 실패할 때, 모두 자신의 책임으로 돌려야 합니다.”

“고객으로부터, 동료로부터, 협력회사로부터 직접 생생한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현장으로 달려가기를 당부합니다.”

“한국의 장래를 깊이 생각했습니다. 부존자원이 빈약한 우리나라는 기필코 관광입국을 이루어야 한다는 것이 저의 신념이었습니다.”

“서울 잠실의 롯데월드타워를 세계 최대의 관광 명물로 만드는 것이 내 일생의 소원입니다.”

“인간의 능력이란 그렇게 극단적인 차이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가 하고 있는 일에 정열과 의욕을 가지면 상황도 유리해지고 올바른 해결책도 나오기 마련입니다.”

“CEO는 회사가 잘 나갈 때일수록 못 나갈 때를 대비해야 합니다. 반대로 실적이 악화될 때는 훗날 좋아질 때를 염두에 두고 투자해야 합니다.”

“상권은 주어지기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좋은 제품과 서비스로 만들어 나갈 수도 있어야 합니다.”

1965년 한국 롯데그룹 설립을 위해 입국하는 신격호 명예회장(오른쪽). 사진제공=롯데지주
1965년 한국 롯데그룹 설립을 위해 입국하는 신격호 명예회장(오른쪽). 사진제공=롯데지주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0 / 40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