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명품 스토리] ⑨ 스타 디자이너들 자라는 '끌로에'의 온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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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명품 스토리] ⑨ 스타 디자이너들 자라는 '끌로에'의 온실
  • 김서나 패션에디터
  • 승인 2020.01.04 1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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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춤복 퀄리티의 고급기성복 ‘쁘레따뽀르떼’ 제안한 가비 아기옹
칼 라거펠트, 스텔라 맥카트니 등 디자이너들의 성장 도운 끌로에 하우스
새롭게 발탁된 나타샤 램지 레비도 끌로에와 시너지 일으킬 수 있을까
끌로에 2019 가을 광고 캠페인
끌로에 2019 가을 광고 캠페인

[오피니언뉴스=김서나 패션에디터] 인형 같은 예쁨이 아닌, 자유롭고 독립적인 여성들을 위한 로맨틱 스타일을 보여주는 '끌로에(Chloé)'.

특유의 보헤미안 무드 속에서 끌로에 하우스의 디자이너들은 마음껏 재능을 발휘하며 자신의 가치를 높였고, 그 결과 칼 라거펠트(Karl Largerfeld)는 '샤넬(Chanel)'로, 피비 파일로(Phoebe Philo)는 '셀린느(Celine)'로, 그리고 가장 최근엔 클레어 웨이트 켈러(Clare Waight Keller)가 '지방시(Givenchy)'로 스카웃되었다.

이쯤 되면 스타 디자이너 육성 하우스로 불리기에 손색이 없는 끌로에.

이제 새로운 디자이너 나타샤 램지 레비의 커리어도 빛내줄지 패션계가 주목하고 있다.

 

◆ 쁘레따뽀르떼 개념을 세운 가비 아기옹, 디자이너들 리크루팅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의 유복한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난 가비 아기옹(Gaby Aghion, 결혼 전 이름은 가브리엘 아노카 Gabrielle Hanoka)은 어릴 적 친구와 결혼한 후 1945년 함께 파리로 이주했다.

남편이 아트 갤러리를 준비하는 동안 자신도 일을 해보기로 결심한 아기옹은 직접 디자인을 하고 소재와 부자재를 구해와서 숙련된 재봉사에게 제작을 맡기는 방법으로 옷을 만들었다.

당시는 옷을 하나의 작품으로 표현하는 맞춤복, '오뜨 꾸뛰르(Haute Couture)'가 패션을 주도하던 시대.

하지만 여러 번의 피팅이 요구되는 꾸뛰르의 시스템이 불합리하게 느껴졌던 아기옹은 고급스러운 소재와 섬세한 장식, 꼼꼼한 재봉으로 꾸뛰르의 수준을 맞추면서도 편하게 입을 수 있는 기성복을 전개하기로 했다.

최고급 기성복, ‘쁘레따뽀르떼(Prêt-a-Porter)’를 탄생시킨 것.

1952년 친구의 이름 ‘끌로에’로 라벨을 런칭하고 점차 고객을 늘려간 아기옹은 1958년 파리의 예술가들이 자주 모이던 ‘카페 드 플로르(Café de Flore)’에서 첫 패션쇼를 열며 디자이너로서의 존재감을 드러냈고, 다음 해엔 제라르 피파르(Gérard Pipart)를 기용하며 디자이너 리크루팅을 시작했다.

재능 있는 디자이너들을 모아 팀을 꾸린 아기옹은 이들과 함께 우아한 실크 블라우스, 여유로운 실크 팬츠, 실용적인 셔츠 드레스 등 끌로에의 1960년대 대표 아이템들을 발표했고, 1964년엔 프리랜서였던 칼 라거펠트를 팀에 합류시켰다.

대담한 프린트의 보헤미안 롱 드레스들로 호평을 받으며 1974년 디자인 팀의 수장에 오른 라거펠트는 레이스 디테일과 부드러운 실루엣으로 여성미를 강조하는 한편 남성용 아우터를 응용한 케이프도 제안하며 로맨틱하면서도 활동적인 끌로에의 이미지를 각인시키는 역할을 했다.

라거펠트의 활약 덕분에 1975년부터 향수도 선보이며 사업을 확장한 끌로에 하우스.

이와 동시에 라거펠트는 타 브랜드들의 영입 타겟 1순위로 떠올랐는데, 끌로에와 펜디(Fendi)의 디자인을 병행하던 중 침체된 샤넬을 부활시키는 중책까지 추가로 주어지자, 그는 결국 1983년 끌로에와 헤어졌고, 1985년 아기옹은 '던힐 홀딩스(Dunhill Holdings, 현 리치몬트 Richemont)'에 끌로에의 경영권을 넘기고 은퇴했다.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가비 아기옹, 1950~60년대 끌로에 룩 2컷, 1970년대 끌로에 향수 광고, 칼 라거펠트, 1970년대 끌로에 룩 2컷 (사진=끌로에 홈페이지)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가비 아기옹, 1950~60년대 끌로에 룩 2컷, 1970년대 끌로에 향수 광고, 칼 라거펠트, 1970년대 끌로에 룩 2컷 (사진=끌로에 홈페이지)

◆ 런던 출신의 절친 디자이너들이 이끈 끌로에의 새로운 시대

끌로에 하우스는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1987년 신진 디자이너 마틴 싯봉(Martine Sitbon)을 맞았다.

매혹적인 카바레 스타일과 턱시도의 디자인을 믹스한 싯봉의 감각으로 끌로에는 다시 생명력을 얻었는데, 하지만 그 과정에서 패션계에서의 확고한 입지를 다진 싯봉은 자신의 라벨을 키우기로 결정했고, 1992년 그녀가 떠난 빈 자리로 끌로에의 옛 파트너 칼 라거펠트가 컴백했다.

샤넬과 펜디, 그리고 자신의 브랜드까지 전개하는 스타 디자이너가 되어 금의환향한 라거펠트는 끌로에로 더 많은 관심을 끌어오는 데엔 성공했으나, 아쉽게도 지난 1970년대 시절만큼의 임팩트는 주지 못했다. 

그러던 중 오랜 전통의 명품 브랜드들이 젊은 디자이너들과 앞다퉈 손을 잡으며 거센 변화의 파도를 일으켰던 1997년, 끌로에 역시 이 물결에 뛰어들었다.

'비틀즈(Beatles)' 출신의 전설적 뮤지션 폴 맥카트니(Paul McCartney)의 딸, 스텔라 맥카트니(Stella McCartney)를 발탁한 것.

하지만 런던 센트럴 세인트 마틴즈 졸업 후 두 번의 컬렉션을 발표한 것이 경력의 전부인 25세의 디자이너가 라거펠트를 대체한다는 소식에 아버지의 후광이 작용했다는 지적이 이어졌고, 라거펠트도 그녀가 아버지만큼 재능이 있길 희망한다고 인터뷰하면서 논란에 불을 지폈다.

이에 대해 끌로에 하우스가 아버지의 이름만 보고 자신에게 회사를 맡길 만큼 바보가 아니라고 일축한 스텔라 맥카트니.

그녀는 로맨틱한 빈티지 란제리와 과감한 프린트 저지, 영국 전통의 신사복 테일러링을 조화시켜 자신만의 끌로에 룩을 멋지게 완성했고, 젊은 에너지와 당돌한 애티튜드로 어필하며 많은 팬들을 새롭게 유입시켰다.

이렇듯 패션계의 우려를 잠재우고 디렉터로서의 역량을 보란 듯이 증명한 맥카트니에게 독립브랜드 런칭을 도와주겠다며 '구찌(Gucci)'가 다가왔고, 이 제안을 수락한 맥카트니는 끌로에의 지휘권을 친구 피비 파일로에게 넘겼다.

센트럴 세인트 마틴즈 시절부터 맥카트니와 친구였던 파일로는 끌로에 팀에서 함께 작업을 해왔다. 2001년 바통을 이어받은 후 맥카트니의 끌로에보다 한층 부드럽고 차분한 페미닌 룩을 선보이며 친구의 그림자에서 벗어난 피비 파일로.

그녀가 가져온 안정적인 성장에 힘입어 끌로에 하우스는 가방과 가죽 소품, 슈즈로 라인을 확대하고 세컨드 브랜드 ‘시 바이 클로에(See By Chloé)'도 런칭했다.

2005년 봄 시즌엔 자물쇠가 달린 재미있는 디자인의 '패딩턴(Paddington)' 백을 내놓아 끌로에의 첫 ‘잇 백’을 탄생시키기도 한 그녀는 하지만 출산을 앞두고 일을 놓았고, 이후 셀린느로 옮겨 커리어의 꽃을 피웠다.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끌로에 1998년 광고, 1999년 광고, 2001년 광고, 스텔라 맥카트니, 패딩턴 백, 2004년 가을 광고, 같은 해 봄 광고 캠페인, 피비 파일로 (광고 외 사진=끌로에 홈페이지)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끌로에 1998년 광고, 1999년 광고, 2001년 광고, 스텔라 맥카트니, 패딩턴 백, 2004년 가을 광고, 같은 해 봄 광고 캠페인, 피비 파일로 (광고 외 사진=끌로에 홈페이지)

◆ 클레어 웨이트 켈러의 활약과 나타샤 램지 레비의 입성

피비 파일로와의 이별에 아쉬워하던 끌로에 하우스는 후임인 '마르니(Marni)' 출신의 파울로 멜림 앤더슨(Paulo Melim Andersson)에 기대를 걸었지만, 엇갈리는 반응이 이어지자 결국 파일로와 함께 일했었던 한나 맥기본(Hannah MacGibbon)의 내부승진을 단행했고, 그녀는 끌로에를 제자리에 가깝게 돌려놓았다.

그리고 보다 풍부한 경력을 지닌 디자이너를 물색하던 끌로에 하우스는 2011년 ‘프링글 오브 스코틀랜드(Pringle of Scotland)’를 패셔너블하게 업데이트시킨 영국 출신의 클레어 웨이트 켈러를 선택했다.

먼저 끌로에 초기의 디자인들을 들여다 본 켈러는 섬세함과 편안함이 공존하는 특유의 스타일을 살리는 동시에 모던한 감각을 가미한 컬렉션을 내놓으며 끌로에의 새로운 출발을 알렸다.

또한 멈추어 있었던 끌로에의 잇 백 리스트도 다시 채우기 시작했는데, 가볍고 걸리쉬한 ‘드류(Drew)’, 여유롭고 세련된 ‘페이(Faye)’가 많은 인기를 모았다.

주춤했던 끌로에가 켈러의 리드로 다시 상승곡선을 그려나갈 때 2014년 9월 9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난 가비 아기옹. 경영에서 물러난 이후에도 끌로에 하우스에 조언을 아끼지 않았던 그녀는 눈을 감으면서도 당시 앞두고 있던 새 컬렉션 발표를 미루지 말라는 당부를 남겼다.

그녀의 뜻에 따라 스케줄대로 진행된 2015 봄 시즌 패션쇼는 끌로에의 정신과도 같은 보헤미안 무드를 바탕으로 목가적인 로맨틱 아이템들과 내추럴한 데님 의상들이 어우러지며 아기옹도 흡족할 만한 무대로 연출되었다.

그러나 6년간 끌로에를 정상궤도로 유지시켰던 켈러를 지방시에 빼앗겨버린 끌로에.

켈러의 뒤를 이을 디자이너로 나타샤 램지 레비(Natacha Ramsay-Levi)가 2017년 끌로에 하우스에 입성했다.

오랜만에 등장한 프랑스 출신 디자이너 레비는 ‘발렌시아가(Balenciaga)’에서 니콜라 게스키에르(Nicolas Ghesquière)의 디자인을 도우며 신임을 얻어 게스키에르가 옮겨간 '루이 비통(Louis Vuitton)'에도 중용되었을 정도로 잠재력을 갖춘 디자이너.

새롭고 경쾌한 느낌을 불어넣기 위해 다채로운 문양을 넣고 재단에 변화를 주는 등 여러 시도를 보여주었던 레비는 차츰 압박감을 덜고 끌로에 본래 모습과의 합의점을 찾아가고 있다.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나타샤 램지 레비, 끌로에 2012년 광고, 2013년 광고, 드류 백이 등장한 2015년 광고 캠페인, 클레어 웨이트 켈러, 2020 봄 컬렉션 2컷, 2019 가을 컬렉션 2컷 (광고 외 사진=끌로에 홈페이지)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나타샤 램지 레비, 끌로에 2012년 광고, 2013년 광고, 드류 백이 등장한 2015년 광고 캠페인, 클레어 웨이트 켈러, 2020 봄 컬렉션 2컷, 2019 가을 컬렉션 2컷 (광고 외 사진=끌로에 홈페이지)

고급 기성복 ‘쁘레따뽀르떼’를 만들었을 만큼 어렵지 않은, 입기 편한 디자인을 지향했던 가비 아기옹.

그녀의 이러한 디자인 철학은 끌로에의 디자이너들이 창작의 무게를 덜고, 폭넓게 사랑 받을 수 있는 의상을 만들도록, 그리고 그렇게 해서 상업적인 성공을 이끌어내는 능력이 부각되도록 도와주었다.

디자이너들의 성장 덕분에 잦은 교체의 고충을 겪고는 있지만, 그 가운데에서도 끌로에는 가비 아기옹으로부터 물려받은 자유로운 정신과 보헤미안 감성을 잘 지켜가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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