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상희의 컬쳐 인사이트] 영화 '천문', 감정과잉으로 빛바랜 상상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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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상희의 컬쳐 인사이트] 영화 '천문', 감정과잉으로 빛바랜 상상력
  • 권상희 문화평론가
  • 승인 2019.12.28 1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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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뉴스=권상희 문화평론가] “대호군 장영실이 안여(安與)를 감조(監造)하였는데, 견실하지 못하여 부러지고 허물어졌으므로 의금부에 내려 국문하게 하였다”

세종실록 95권, 세종 24년 3월 16일의 기록에서 출발한 영화는 두 줄 남짓한 역사적 사실에 특별한 상상력을 덧입힌다. 

세종의 총애를 입어 관노의 신분에서 조선시대 최고의 과학자가 된 장영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역사적 팩트는 여기까지다. ‘역사’라는 것이 과거의 기록이기에 기록으로 남지 않은 사실들은 가치 평가를 받을 수 없는 한낱 떠도는 ‘이야기’에 불과하다. 장영실의 죽음이 그러하지 않을까.

백성들의 삶을 획기적으로 바꿔놓는데 크게 기여하고도 그의 발명품들만 기록되었을 뿐, 정작 장영실의 생사는 역사에서 부유(浮游)하고 말았다. 영화는 그의 빛나는 삶의 과정과 소멸하고만 삶의 끝을 세종과의 관계를 통해 복원시킨다. 

◆ 스펙트럼 무한대의 두 배우, 한석규 & 최민식

자신을 발탁해주고 신뢰해준 세종을 위해 목숨도 아까워하지 않았던 장영실과 신분을 뛰어넘어 그를 벗으로 의지했던 세종, 두 사람의 감정선이 이 영화가 관통하는 내러티브의 큰 줄기다. 

하늘처럼 여겨지던 왕 ‘세종’과 땅을 향해 고개 숙이는데 익숙한 노비 ‘영실’이 함께 하늘의 별을 바라보며 ‘벗’이 되고, 위민(爲民)정책의 꿈을 실현시키는 ‘동지’가 된다.

비 내리는 밤, 별을 보고 싶어 하는 세종을 위해 영실이 처소의 문풍지를 까맣게 칠해 하늘의 별을 형상화시킨 장면은 어른들을 위한 한편의 동화처럼 아름답고 순수하다. 이렇듯 ‘하늘과 별’은 두 사람의 신분을 뛰어넘는 ‘우정’을 상징하는 매개체로 작용한다. 

무엇보다 이 영화에서 가장 빛나는 것은 더 이상 말이 필요 없는 한석규와 최민식의 ‘연기’다. 드라마 ‘뿌리 깊은 나무’에서 이미 ‘이도’역을 연기했던 한석규는 이번 작품에서 또 다른 느낌의 ‘세종’을 표현했다.

배우로서 같은 배역을 두 번 연기한다는 게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이미 잘 만들어진 캐릭터가 하나의 프레임이 되어 창조성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석규가 연기한 드라마의 이도와 천문의 세종은 그 결이 달랐다. 마치 각기 다른 두 명의 배우가 만들어낸 하나의 캐릭터를 보는 느낌이다. 

참고할 만한 자료가 없었던 캐릭터 장영실을 우직하고 순박하게 그려낸 최민식은 눈빛 하나만으로도 모든 정서가 온전히 전달되는 명연기를 선사한다. 역사에서 소멸돼 버린 인물이 최민식으로 하여 되살아난 느낌이다. 

만약 두 배우가 아니었다면 ‘천문’의 132분이나 되는 긴 러닝타임은 버틸 힘을 갖지 못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영화 '천문: 하늘에 묻는다' 스틸컷

◆ 과유불급의 미덕, 잃어버린 감정과잉

이번 작품에서도 ‘감성’에 포커스를 맞춘 허진호 감독은 여지없이 자신의 장기를 스크린 가득 투영했다. 그런데 넘쳐 흘렀다. 감정과잉이 문제다.

여기서 ‘과잉’이라 함은 ‘잦은 반복’을 의미한다. 세종과 영실 두 주인공의 브로맨스나 처음부터 끝까지 영실을 못마땅하게 여긴 대신들의 모습은 마치 돌림노래 같다. 

감정이 차근차근 쌓여서 터져야 하는데 결코 터지는 법이 없다. 웃음이 나오려다 말고, 눈물이 나오려다 마는 식이다. 관객들은 카타르시스를 분출할 준비를 하고 스크린에 집중하건만 엇비슷한 크기의 감정들이 내내 반복되다 보니 긴장감은 사라지고 처음 두 캐릭터가 꿈을 위해 뜻을 함께하는 모습에서 느꼈던 감동은 어느새 휘발되고 만다.

과유불급의 미덕을 잃어버린 탓이다. 안타깝게도 스토리가 진행될수록 억지로 감동을 쥐어짜내는 듯한 느낌마저 든다. 

사극이라는 장르를 선택함에 있어 역사적 사건보다 인물간의 관계에 초점을 맞춘 해석은 특별했지만 ‘재미’를 잃어버린 스토리는 지루함만 남긴 채 화력을 상실했다. 

 

●권상희는 영화와 트렌드, 미디어 등 문화 전반의 흐름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갖고 있다. 글을 통해 특유의 통찰력을 발휘하며 세상과 소통하길 바라는 문화평론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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