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고] 김우중 대우그룹 전회장을 추모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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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고] 김우중 대우그룹 전회장을 추모하며
  • 문주용 기자
  • 승인 2019.12.10 16: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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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뉴스=문주용 기자] 한국 현대 경제성장사에 1세대 기업인중 한 사람인 김우중 전대우회장이 '영욕의 생'을 마감했다. 숙환에 83세의 일기로 눈을 감았다.

불꽃같은 열정과 혼신을 다해 키운 대우그룹이 몰락하고, 자신은 단죄까지 받은 그는 그 후 20년 안팎의 세월동안 '정치의 희생양'이라며 억울함을 호소했다. 눈을 감는 그 순간까지도 신원되지 못한 그의 삶에 연민이 차오르기도 한다.

그는 어떤 인물로 기억될 수 있을까.

김 전회장은 1936년 대구에서 태어났다. 경기고와 연세대 경제학과를 졸업한 수재였다. 만 30세인 1967년 대우를 설립한 후 1999년 그룹 해체 직전까지 자산규모 기준으로 현대에 이어 국내 2위의 기업을 일군 대표적인 1세대 기업인이다.

한국 경제사에 1세대 기업인으로서 큰 족적을 남기고 세상을 떠난 김우중 전 대우그룹회장. 사진= 연합뉴스
한국 경제사에 1세대 기업인으로서 큰 족적을 남기고 세상을 떠난 김우중 전 대우그룹회장. 사진= 연합뉴스

김 전회장은 현대의 정주영 회장, 삼성의 이병철 회장과 함께 빅3를 형성하면서, 나름대로 한국 경제사에 '세계 경영'이라는 특별한 재벌 성장사를 써나갔다.

세 총수들이 모두 정경유착에 적극 관여한 사실은 숨길 수 없는 공통점이다. 그렇지만 정주영 전회장은 국내에 기반을 잡은 후에는 곧바로 중동지역으로 토목 공사 역량을 쏟아붇고, 조선업을 일궈 중동의 오일머니를 끌어왔다. 달러가 부족했던 당시 그는 경제계의 영웅이었다. 

또 삼성의 이병철 전회장 또한 섬유, 직물, 식음료등 경공업 분야에서 국내 시장을 석권해갔고, 해외 수출을 넓히고 탐색하며 오늘날 삼성그룹의 초석을 세웠다. '반도체'의 잠재력을 제일 먼저 간파한 것은 이 전회장이다. 

반면, 김우중 전회장은 배짱과 포부, 이상을 앞세우며 국내 최고인재들을 수출전선에 투입시켰다. 우리나라의 유일한 자원은 '인재'를 수출 전선 전면에 배치했던 것이다. 1969년에 한국 기업 최초로 해외 지사(호주 시드니)를 설립하고, 1975년 한국의 종합상사 시대를 열었다. (주)대우는 질 좋은 제품을 생산하면서도 해외 수출은 꿈도 꾸지 못하는 국내 중소기업들에겐 구세주 같았다. 실제 현재 주요 중견그룹중에는 (주)대우 덕분에 자사 제품을 처음 해외에 수출했다는 기업도 적지 않다.

대우맨들은 세계 곳곳을 누비며 섬유, 신발등 한국의 주력 경공업 제품의 수요처를 찾아냈으며, 국내 중소기업이 수출창구를 연결시켜주었다. 선진국 외에는 전화, 팩스조차 제대로 연결되지 않는 나라들이 대부분이었지만, '대우맨'들은 동남아시아, 남미는 물론 아프리카 오지까지 찾아다녔다. 

'세계경영'은 그의 이상이었다. 1990년대 당시 해외시장 개척에 주력해 신흥국 출신 최대의 다국적기업으로 대우를 성장시킨 김 전회장. 당시 대우의 수출규모는 한국 총 수출액의 약 10%에 달했다. 1998년 한국 총 수출액 1323억달러중 대우의 수출액은 186억불로 약 14%에 달했다.

소설가 조정래가 쓴 대하소설 '한강'에서 김우중 전회장인 듯한 사업가를 이렇게 묘사된다. 정치권과 가깝게 지내면서, 정권실력자로부터 얻은 정보를 바탕으로, 시중에서 빌린 자금까지 동원해서 특정사업에 올인하는 사람으로. 조정래 작가는 박태준 포철 명예회장을 높이 평가한 반면, 김 전회장에 대한 평가는 이상하게도 박했다. 

초기 김 전회장의 무모한 사업확장에 대우실업을 공동창업했던 동업자들이 자주 브레이크를 걸었지만, 김 회장의 승부수가 번번히 맞아떨어지자 오히려 김 회장의 리더십이 커지는 결과로 이어졌다.

정주영 현대 명예회장, 이병철 삼성 명예회장보다 사업을 늦게 시작한데 따른 조급함이었을까. 그들과 경쟁하듯 사업을 무리하게 확장한 것이 대우그룹 몰락의 서막이었다. 

김 전회장은 1976년 한국기계(대우중공업), 1978년 새한자동차(대우자동차), 대한조선공사(대우조선해양) 등 부실기업을 인수했다. 같은 시기에  에콰도르(1976년), 수단(1977년), 리비아(1978년) 등 아프리카 시장에 진출하고, 무역·건설부문을 통합해 ㈜대우를 설립(1982년)하며 명실상부한 대우그룹을 출범시켰다. 사업분야는 자동차·중공업·조선·전자·통신·정보시스템·금융·호텔·서비스 등 전 산업으로 뻗어갔다.

1999년 대우그룹 해체 직전, 대우는 41개 계열사와 600여개의 해외법인·지사망, 국내 10만명, 해외 25만명을 고용하는 등 해외 21개 전략국가에서 현지화 기반을 닦고 있었다. 당시 자산총액은 76조7000억원, 매출은 91조원(1998년)에 달했다.
  
대우그룹의 몰락에 대해 대우맨들과 금융권은 아직도 평가가 엇갈린다. 세월이 지나고 대우맨들은 "정치권, 정확히는 김대중 정권이 대우를 살리려 했으면 살릴 수 있었다"고 주장했다. 그만큼 '여한(餘恨)이 많은 순간이었다.    

대우 사태는 냉정히 말하지만 '글로벌 돌려막기'의 결말이라 할 수 있다. 1995년부터 한국 제조업의 투자가 붐을 이루는 과정에서 대우 역시 국내외 금융사로부터 막대한 대출을 받아 과잉투자를 단행했다. 특히 대우는 세계적인 금융 메카인 런던에 법인을 두고, '선진금융기법'을 활용한다면서 외자를 적극 유치했다. 그러나 세계경기가 위축되고, 대출금리가 오르면서 사업자금이 부족했던 대우그룹은 주요 계열사의 재무제표에 손을 대기 시작했다. 분식으로 금융권을 속이며 막대한 부채를 돌려막았다.   
 
국제통화기금(IMF) 위기가 닥치기 전, 일본 노무라 증권은 한국 대기업들의 과잉투자 사태를 경고했는데, 그 직격탄을 대우가 온몸으로 맞았다. IMF위기 직후 연 20%에 달하는 고금리를 감당할 수 없었던 김 회장은 결국 그룹을 포기하게 된다. 대우는 위크아웃 대상에 올라 해체됐다. .

대우자동차, 대우중공업, 대우조선해양 등을 인수하며 중화학 공업으로 그룹의 사업방향을 전환한 때가 불운의 기점이 아니었을까. 김 전회장은 자금난 때마다 오히려 부실기업 인수에 나서고 정부에게 인수자금을 조달받으며 연명하는 방법을 썼다. IMF 위기는 이런 방식의 종언이었다. 

그 이후 대우그룹, 김 전회장의 경영능력에 대한 평가는 큰 의미가 없어 보인다. IMF위기가 끌어들인  신자유주의적 세계관에서는 부도를 낸 기업인은 그냥 죄인이 됐고, 수출전선에 뛰어다녔던 임직원들도 고개를 들지 못했다. 용서는 되지 않았고 재기의 기회도 없던 시대였다. 채무자에게는 민형사법으로 무서우리만치 가혹했던 시기였다. 17조원이 넘는 추징금도 그때 판결의 결과다.

3년여 전, 대우그룹 창립 50주년 기념 행사에 김 전회장은 당시 측근들과 함께 언론에 모습을 비쳤다. 그 자리에 김 전회장은 기념 동영상에서 자신을 믿고 따랐던 임직원들의 분투를 보며 마음아파했다.   

이제 그를 모르는 아들 딸 같은 젊은 세대에게 감히 말해도 될 듯 하다. "김우중 전회장은 '1980년대판 한국의 마윈'이었다고."

마윈은 몇년전 이렇게 말했다. "때로는 당신이 일하는 곳이 어디인지가 아니라 당신의 마음이 어디에 있는지, 시선이 어디를 향하는지가 훨씬 중요하다."

'세상은 넓고, 할일은 많다'고 했던 김 전회장도 지금의 마윈처럼, 마음과 시선으로 자유롭게 세계 곳곳을 누볐다. 우리 중소기업들이 만든 제품을 수출하려 일생을 바쳤다. 마윈은 온라인으로 자영업자를 연결시켰지만, 이보다 앞서 김 전회장은 '세계경영'으로 우리 중소기업과 세계를 연결시키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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