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명품 스토리] ⑤ 이브 생 로랑의 독자적인 영역, 파리지앵 시크
상태바
[세계의 명품 스토리] ⑤ 이브 생 로랑의 독자적인 영역, 파리지앵 시크
  • 김서나 패션에디터
  • 승인 2019.12.06 14:4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고정관념 깨는 과감한 시도 이어가며 패션계 지형 바꾼 '이브 생 로랑'
이브 생 로랑이 남긴 다채로운 유산 각기 다른 각도로 조명한 디자이너들
잊혀졌던 브랜드 고유의 매력 되찾아오고 있는 안토니 바카렐로
생 로랑 2019 겨울 광고 캠페인
생 로랑 2019 겨울 광고 캠페인

[오피니언뉴스=김서나 패션에디터] 넘치는 아이디어와 발상의 전환으로 패션의 새로운 길을 열면서 동시에 소수의 상류층이 아닌, 보다 많은 사람들이 즐길 수 있도록 패션의 흐름을 바꾼 디자이너, 이브 생 로랑(Yves Saint Laurent).

그가 남겨놓은 풍부한 유산들은 그의 자리를 물려 받은 디자이너들에 의해 각기 다른 모습으로 해제, 조립되며 끊임없이 되살아나고 있다.

 

◆ 이브 생 로랑, 패션의 경계를 무너뜨리다

프랑스령이었던 북아프리카 알제리에서 태어난 이브 생 로랑은 어린 시절 연극을 관람하고 나서 예술과 의상에 마음이 끌렸고, 어머니의 패션잡지를 오려내 종이인형놀이를 하며 관심을 키웠다.

17세였던 1953년, 국제양모사무국 디자인 콘테스트에 스케치를 출품해 3등상에 오른 그는 다음해 파리의상조합학교에 입학했고, 다시 도전한 콘테스트에서 1등을 차지한 후 프렌치보그 편집장의 추천으로 크리스찬 디올(Christian Dior) 하우스에 입사하게 되었다.

디올에게 채택되는 디자인이 점차 늘어나며 신임도 쌓여가던 이브 생 로랑은 하지만 디올이 갑작스럽게 사망하면서 21세의 나이로 거대한 패션 하우스를 책임져야 할 운명에 놓이게 된다. 1958년 한층 간결하고 부드럽게 해석된 디올 컬렉션에 갈채가 쏟아지면서 그는 화려하게 데뷔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가 차츰 변화를 더하자 평가는 엇갈리기 시작했고, 그 와중에 알제리 전쟁으로 인한 입영통지서가 날아와 입대를 해야 했다. 생 로랑은 곧 자신이 해고되었다는 소식까지 접하면서 군대에서 힘든 시기를 보냈다.

사회에 돌아온 후 그는 다행히 친구 피에르 베르제(Pierre Bergé)의 도움으로 디올로부터의 배상금과 추가의 투자금을 확보했고, 1962년 베르제와 함께 꾸뛰르 하우스를 설립했다.

이제 자신의 이름으로 선보이는 만큼 아무런 제약 없이 자유롭게 컬렉션을 준비한 이브 생 로랑.

그는 자신의 첫 패션쇼 무대를 피코트로 여는 파격을 택했다. 선원들이 바닷바람을 막기 위해 입었던 두꺼운 울 코트를 짧고 가볍게 제안하며 여성들에게 당당하고 편안하게 패션을 즐기라는 메시지를 던진 것. 이는 그의 스승인 크리스찬 디올보다는 코코 샤넬(Coco Chanel)을 잇는 모습이었다.

피코트 외에도 트렌치코트, 사파리 재킷, 점프수트 등 남성복을 차용하는 생 로랑의 시도는 이어졌다. 대표적인 작품은 바로 1966년에 발표한 턱시도 수트 ‘르 스모킹(Le Smoking)’. ‘르 스모킹’은 연미복을 입던 남성들이 담배를 피울 때 갈아 입던, 좀더 편한 재킷에서 턱시도가 유래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 이후 이브 생 로랑의 스타일을 상징하는 이름이 되었다.

이와 함께 그는 피에트 몬드리안(Piet Mondrian)을 비롯한 예술가들의 그림을 입힌 의상, 몸이 비치는 과감한 시스루 룩, 그리고 아프리카, 아시아, 러시아의 민속적 느낌을 넣은 디자인 등으로 패션계를 놀라게 했다. 꾸뛰르에 최초로 유색인 모델을 무대에 세우기도.

바쁜 컬렉션 일정 중에도 생 로랑은 발레, 연극, 영화 의상에도 애정을 쏟았는데, 그 과정에서 까뜨린느 드뇌브(Catherine Deneuve)를 만난 그는 그녀의 1967년 작품 ‘세브린느(Belle de Jour)’의 의상을 맡아 멋진 결과를 만들어냈고, 드뇌브는 그의 뮤즈이자 친구로 영원히 남았다.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이브 생 로랑, 영화 ‘세브린느’의 이미지 2컷, 러시아 컬렉션의 스케치, 몬드리안 룩, 르 스모킹, 피코트 이미지 컷 (영화 외 사진=이브 생 로랑 박물관 홈페이지)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이브 생 로랑, 영화 ‘세브린느’의 이미지 2컷, 러시아 컬렉션의 스케치, 몬드리안 룩, 르 스모킹, 피코트 이미지 컷 (영화 외 사진=이브 생 로랑 박물관 홈페이지)

◆ 주인의 손을 떠난 ‘생 로랑 리브 고쉬’의 성장통

한편 고급 맞춤복인 오뜨 꾸뛰르가 점차 그들만의 세계로 갇혀가는 모습을 본 이브 생 로랑은 1966년 기성복 라인 ‘생 로랑 리브 고쉬(Rive Gauche, '센 강의 왼편'이라는 의미)’를 런칭했다. 별도의 상품 구성으로 단독매장까지 꾸렸는데, 이는 꾸뛰르로는 첫 시도.

폭발적 반응을 확인한 그는 곧 뉴욕, 런던에 리브 고쉬 매장을 추가로 연데 이어 남성복 매장을 오픈하고, 향수와 코스메틱 사업도 확장했다. 하지만 1990년대를 넘어서며 수익이 하락 곡선을 그리기 시작하자, 생 로랑과 베르제는 결국 1993년 사노피(Sanofi) 그룹과의 합병을 결정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자신이 이뤘던 패션 대중화가 점차 가속도가 붙으면서 힘에 부치게 된 이브 생 로랑은 꾸뛰르에만 집중하기로 결단을 내렸다.

신예 알버 엘바즈(Alber Elbaz)의 손에 넘겨진 리브 고쉬 라인은 1999년부터 경영권을 쥔 PPR그룹(현 케링)에 의해 톰 포드에게 맡겨졌다. 그는 구찌를 성공적으로 리런칭하며 패션계의 영웅으로 떠오른 미국 텍사스 출신 디자이너.

구찌와 유사하게 리브 고쉬 역시 톰 포드 특유의 섹시 글래머 스타일로 다시 태어났다. 그렇게 톰 포드가 브랜드 수익을 올리는 동안, 2002년 이브 생 로랑은 아쉽게도 꾸뛰르 라인의 중단을 알리며 은퇴를 선언했다. 그리고 2004년 톰 포드가 떠나면서 그의 지휘 아래 디자인을 해왔던 스테파노 필라티(Stefano Pilati)가 자리를 이어받았다.

이탈리아 밀라노 출신으로 구찌 합류 전, ‘조르지오 아르마니(Giorgio Armani)’, ‘미우미우(Miu Miu)’에서 경험을 쌓은 필라티는 톰 포드의 다소 노골적인 섹시함과는 거리를 두고 부드러운 우아함을 불러오며 좋은 평가를 받았다.

향수와 코스메틱 부문이 '로레알(L’Oréal)'로 분리되고, 브랜드 설립자 이브 생 로랑이 세상을 떠나는 상황에서도 필라티는 꿋꿋하게 하우스를 지탱했지만 좀더 강한 임팩트를 원한 케링(Kering) 그룹은 2012년 ‘디올 옴므(Dior Homme)’의 인기를 이끈 에디 슬리먼(Hedi Slimane)을 영입했다. 그는 이전에 리브 고쉬 남성복에서 활동한 바 있었다.

이번엔 남성복만이 아닌, 모든 부문의 아트디렉터로 전권을 부여 받은 그는 입성하자마자 본격적으로 리브랜딩에 나섰고, 2015년엔 꾸뛰르 라인도 다시 재개시키며 의욕을 보였지만, 다음 해 재계약이 이루어지지 않으면서 하우스를 떠났다.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이브 생 로랑 2003년 광고, 2002년 광고, 2008년 광고 캠페인 3컷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이브 생 로랑 2003년 광고, 2002년 광고, 2008년 광고 캠페인 3컷

◆ 안토니 바카렐로가 되찾아낸 아이덴티티

톰 포드와 같이 에디 슬리먼도 뚜렷한 자기 색깔로 전세계 수많은 팬들을 확보한 스타 디자이너.

특유의 중성적 록 시크 감성으로 컬렉션을 채운 슬리먼은 포드가 그랬던 것처럼 상업적 성공을 가져다 주었는데, 잡음도 적지 않았다.

그는 우선 브랜드네임을 ‘이브’가 없는 ‘생 로랑 파리(Saint Laurent Paris)’로 바꾸고 로고 디자인도 변경했다. YSL 이니셜이 겹쳐진 오리지널 로고는 밀려나 몇몇 액세서리와 코스메틱 제품에만 남겨졌다. 그리고 2013년부터 새 단장된 매장들은 무채색의 미니멀 스타일로 달라졌으며, 디자인 스튜디오도 파리가 아닌, 슬리먼이 선호하는 LA로 옮겨져야 했다.

엄청난 변화가 무색하게 그는 4년만에 떠났는데, 2016년 입성한 안토니 바카렐로( Anthony Vaccarello)는 슬리먼과 달리 이브 생 로랑의 아이덴티티를 조금씩 되찾고 있는 중이다.

벨기에의 이탈리아계 가정에서 자란 바카렐로는 법학 전공에서 조각으로, 그리고 패션으로 관심이 이어진 독특한 이력의 소유자.

‘펜디(Fendi)’에서 2년간 경험을 쌓고 나서 과감하게 자신의 라벨을 런칭한 바카렐로는 감각적인 섹시 미니 드레스로 셀럽들을 먼저 공략하며 이름을 알려나갔고, 2014년 ‘베르수스(Versus)’에 발탁된 후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오르면서 케링 그룹의 레이더 망에 잡혔다.

슬리먼이 바꿔놓은 현재의 생 로랑 브랜드를 인정하고, 큰 이질감 없이 변화를 주기로 한 바카렐로는 이브 생 로랑이 남겨 놓은 유산과 1980, 90년대 글래머 이미지에 주목했다. 그 결과 차갑고 직선적인 모습으로 변해있던 생 로랑에 다시 곡선을 그려 넣고, 엣지있게 커팅을 가미하면서 매끈하고 세련된 섹시 컬렉션을 탄생시켰다.

바카렐로의 이브 생 로랑을 향한 존경심은 곳곳에서 발견되는데, 그는 슬리먼이 외면했었던 YSL 로고를 생 로랑에서의 첫 패션쇼의 무대 배경으로 커다랗게 설치했다. 영화 ‘세브린느’의 50주년을 기념하며 이브 생 로랑의 영원한 뮤즈, 까뜨린느 드뇌브를 반갑게 맞기도 했다.

또한 기성복 라인의 오리지널 네임 ‘리브 고쉬’에 맞춰 ‘리브 드와(Rive Droite, 센 강의 오른편)’라는 라이프스타일 컨셉 스토어를 열어 이브 생 로랑과 또 하나의 연결고리를 만들기도.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안토니 바카렐로, 2019 가을 컬렉션 4컷, 무대배경으로 설치된 YSL 로고 (사진=바카렐로 인스타그램, 생 로랑 홈페이지)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안토니 바카렐로, 2019 가을 컬렉션 4컷, 무대배경으로 설치된 YSL 로고 (사진=바카렐로 인스타그램, 생 로랑 홈페이지)

1998년 프랑스 월드컵을 기념해 화려한 이벤트를 펼치며 프랑스 패션을 전세계에 알렸던 이브 생 로랑은 브랜드 설립 40주년을 맞은 2002년에 파리 퐁피두 센터에서 성대한 회고전을 열며 패션계와 작별인사를 했다.

세계 최고의 패션 도시 파리에는 수많은 디자이너들이 모여들지만, 이브 생 로랑은 파리 패션계로부터 누구보다도 많은 사랑을 받은 디자이너로 남아있다.

“패션은 사라지지만, 스타일은 영원하다”라고 한 그의 말처럼, 유행의 변화와 상관없이 ‘르 스모킹’과 이브 생 로랑은 앞으로도 시크한 파리 스타일의 상징으로 남아 있을 것이다.

 


관련기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0 / 40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