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명품 스토리] ④ 여성의 아름다움을 빛내주는 이름, 크리스찬 디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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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명품 스토리] ④ 여성의 아름다움을 빛내주는 이름, 크리스찬 디올
  • 김서나 패션에디터
  • 승인 2019.11.30 1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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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 룩’으로 고전적인 여성미의 극치를 보여주며 세계적 찬사를 받은 디올
입 생 로랑, 지안프랑코 페레, 에디 슬리먼 등 디자이너들을 성장시켜
꽃과 나무를 사랑했던 디올, 그의 정원에서 피어난 향기가 여성들 사로잡아
디올 향수 ‘자도르’ 광고 캠페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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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뉴스=김서나 패션에디터] 오랜 전쟁으로 지쳐있던 여성들이 자신의 아름다움을 다시 적극적으로 표현하며 즐길 수 있도록 디자인을 선사한 크리스찬 디올(Christian Dior).

그가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난 후, 그의 가치를 계승하기 위해 노력해온 디올 하우스는 하지만 교체된 디자이너들에 따라 적지 않은 혼란을 겪기도 했는데, 그 과정 속에서도 크리스찬 디올이 정성으로 가꾸었던 꽃의 향기는 변하지 않고 브랜드를 지키는 힘이 되었다.

 

◆ 여성을 다시 여성스럽게, 크리스찬 디올의 ‘뉴 룩’

프랑스 노르망디의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나 예술적 감성을 키우며 성장한 크리스찬 디올은 건축학 전공을 원했지만 부모님의 뜻에 따라 정치학교에 진학했다.

그러나 학업은 미뤄두고 예술가 친구들과 어울렸던 그는 결국 아버지로부터 지원을 받아 아트갤러리를 열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어머니와 형을 잃는 충격과 함께 경제 공황으로 아버지의 파산까지 겪으면서 갤러리를 정리해야 했고, 생계를 위한 일을 찾아야 했다. 그때 패션 드로잉을 그려서 팔았던 것이 디자이너의 길로 향하는 첫 걸음이었다.

로베르 피게(Robert Piguet)의 하우스에 입사해 의상에 대해 구체적으로 배우기 시작한 디올은 제2차세계대전으로 인해 군대에 다녀온 후 뤼시앵 를롱(Lucien Lelong)의 하우스로 옮겨 실력을 키웠고, 41세에 이르기까지 그곳에서 활동하며 자신의 이름을 파리 패션계에 알려나갔다.

1946년 12월, 섬유업계 재력가 마르셀 부싹(Marcel Boussac)의 투자를 받아 드디어 자신의 부틱을 가질 기회를 얻은 크리스찬 디올은, 소박하지만 품격이 느껴지는 몽테뉴가 30번지의 개인 저택을 골라 예술가 친구들과 함께 인테리어에 착수했고, 2개월 후인 1947년 2월 12일, 자신의 첫 부틱을 오픈했다. 그리고 같은 날, 그의 명성을 이미 알고 찾아 온 많은 기자와 관객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모두가 놀랄 만한 패션쇼를 펼쳐 보였다.

상체의 곡선은 부드럽게 드러내고 가는 허리 아래로는 스커트 자락이 풍성하게 퍼지도록 연출해 여성미를 극대화시킨 디올의 작품들은 전쟁이 끝난 후에도 여전히 어둡고 경직되어 있었던 당시의 옷들 가운데서는 찾아볼 수 없었던 디자인이었고, 고전적인 아름다움의 향수를 다시 불러일으킨, 그 시대의 여성들이 기다려온 모습이었다.

이날 발표된 컬렉션이 미국 하퍼스바자의 편집장에 의해 ‘뉴 룩(New Look)’으로 이름 붙여져 보도되면서, 크리스찬 디올은 단숨에 당대 최고의 디자이너로 등극했고, 프랑스의 패션 산업을 끌어올릴 리더로 추대됐다.

이후 그는 ‘뉴 룩’과는 다른, 새로운 디자인들도 선보였지만 여성스러운 선을 살리는 특유의 우아함은 잃지 않으면서 영화계와 왕가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았고, 1948년부터 호주, 중남미 등 해외 패션쇼 투어에도 나서며 세계 곳곳의 고객들을 가깝게 만났다.

그 결과 뉴욕 5번가에도 부틱을 여는 등 매장도 확장하며 큰 성공을 거둔 디올은 1957년 프랑스 디자이너로서는 최초로 타임지 커버에 오르는 영광을 누렸지만, 안타깝게도 같은 해 심장마비로 사망하면서 화려했지만 너무나 짧았던 커리어를 마감했다.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크리스찬 디올, 1947년 뉴룩을 선보이는 모델, ‘Dior New Looks Book’ 커버, 크리스찬 디올의 드로잉, 로저 비비에(Roger Vivier)와 함께 제작한 슈즈 (사진=디올 홈페이지)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크리스찬 디올, 1947년 뉴룩을 선보이는 모델, ‘Dior New Looks Book’ 커버, 크리스찬 디올의 드로잉, 로저 비비에(Roger Vivier)와 함께 제작한 슈즈 (사진=디올 홈페이지)

◆ '므슈 디올'을 잃은 디올 하우스의 롤러코스터 역사

크리스찬 디올을 떠나 보낸 상실감은 디올 하우스뿐만 아니라 프랑스 패션 산업계까지 번졌고, 그 위기를 이겨낼 임무는 당시 21세의 어린 디자이너 입 생 로랑(Yves Saint Laurent)에게 주어졌다. 지인의 추천을 받아 입 생 로랑을 영입했던 크리스찬 디올은 자신의 후계자로 그를 미리 점 찍어 놓은 바 있었다.

1958년 입 생 로랑이 준비한 첫 디올 컬렉션이 성대하게 펼쳐졌고, ‘뉴 룩’을 보다 가볍고 부드럽게, 입기 편한 스타일로 변모시킨 그의 감각은 파리 패션계를 안심시켰다. 하지만 자신감을 얻은 입 생 로랑이 점차 자신의 색깔을 드러내자 평가는 엇갈리기 시작했고, 그 즈음 알제리 전쟁으로 인한 입영통지서가 날아오면서 그는 6시즌만에 디올 하우스와 헤어지게 되었다.

그의 자리는 내부 승진으로 채워졌다. 그 주인공은 마크 보앙(Marc Bohan).

그가 심플 엘레강스 룩으로 분위기를 정리하면서 고객들이 다시 모여들고 디올 하우스가 안정을 되찾자, 경영진은 사업 확장에 박차를 가했다. 기성복 라인 확대는 물론 아동복과 남성복, 시계를 런칭했고, 향수와 코스메틱 사업도 병행했다. 1973년부턴 해외 라이선스 계약까지 늘리기도.

하지만 지나친 라이선스 진행으로 브랜드 가치 하락의 위기를 맞은 디올 하우스는 1984년 프랑스 명품 계의 거물 베르나르 아르노(Bernard Arnault)에게 인수된 후 그의 고급화 전략에 따라 명품 라벨로서 다시 위용을 갖춰갈 수 있었다.

디올 브랜드의 이미지 쇄신을 위해 아르노는 1989년 건축학을 전공한 이탈리아 출신 디자이너, 지안프랑코 페레(Gianfranco Ferré)를 영입했고, 페레는 모던하고 도회적인 디올 컬렉션으로 기대에 부응했다. 특히 그가 1995년 당시 다이애나 왕세자비에게 선물했던 ‘레이디 디올(Lady Dior)’은 디올을 대표하는 백이 되었다.

그러나 이에 안주하지 않은 아르노는 런던 세인트 마틴즈 스쿨 출신의 존 갈리아노(John Galliano)로 디자이너를 교체하는 모험을 했는데, 갈리아노는 거침없이 파격적인 컨셉을 시도하며 대중의 시선을 잡아 끄는 데에는 성공했지만 동시에 디올의 기존 팬들은 등을 돌리게 했다. 크리스찬 디올에서 페레까지 이어진 우아함과는 분명 다른 모습이었기 때문.

그럼에도 불구하고 2000년, 말 안장 모양의 ‘새들(Saddle)’ 백이 빅 히트를 기록하면서 갈리아노는 디올 하우스에 막대한 이익을 가져다 주었고, 슬림 실루엣의 남성복으로 ‘디올 옴므(Dior Homme)’ 열풍을 몰고 온 에디 슬리먼(Hedi Slimane)과 함께 디올의 이름을 트렌디하게 바꾸어놓는 성과를 냈다.

하지만 2011년 갈리아노가 유대인 비하 발언을 한 사실이 알려지자 디올 하우스는 그를 즉각 해고했고 시끌벅적했던 갈리아노의 시대는 그렇게 막을 내렸다.

왼쪽부터, 레이디 디올 백이 등장한 1995년 광고, 새들 백이 등장한 2000년 봄 광고와 2001년 봄 광고 캠페인
왼쪽부터, 레이디 디올 백이 등장한 1995년 광고, 새들 백이 등장한 2000년 봄 광고와 2001년 봄 광고 캠페인

◆ 꽃의 향기로 브랜드의 가치를 지켜준 디올의 정원

갈리아노 사건으로 얼룩진 브랜드네임을 다시 빛내기 위해 디올 하우스는 라프 시몬스(Raf Simons)를 선택했다.

벨기에 출신의 시몬스는 미니멀 디자인을 주로 선보여왔던 만큼 정갈하고 우아한 의상들을 내놓았고, 그다지 임팩트는 없었지만 갈리아노의 흔적을 지우는 목적은 달성했다. 그리고 2016년부터 현재까지 ‘발렌티노(Valentino)’에서 옮겨온 이탈리아 출신의 마리아 그라치아 키우리(Maria Grazia Chiuri)가 디자인을 맡고 있다.

이렇듯 많은 변화를 겪는 동안 디올 브랜드가 크게 흔들리지 않도록 지켜준 건 크리스찬 디올이 디자인 못지않게 사랑했던 꽃과 향기.

어린 시절 노르망디 지방의 해변도시 그랑빌의 저택에서 자란 크리스찬 디올은 넓은 정원에서 꽃과 나무의 이름을 배우며 시간을 보냈고, 그 영향은 고스란히 그의 작품을 통해 표출되었다, 자연을 담은 무늬, 꽃잎을 닮은 실루엣, 섬세한 꽃 장식 등. 그리고 그는 컬렉션의 의상들에 꽃 이름을 붙이기도 했는데, ‘뉴 룩’으로 알려진 의상의 이름도 원래는 ‘꽃부리(Corolle)’였다.

꽃의 모습뿐만 아니라 향기 또한 크리스찬 디올이 애정을 쏟았던 부분.

향기가 룩을 완성한다고 믿었던 그는 1947년 첫 패션쇼를 준비하며 미리 사랑의 느낌을 담은 향을 의뢰했고, 발표 당일 부틱을 아름다운 꽃들과 향기로 가득 채웠다. 그날 첫 컬렉션과 함께 공개된 디올의 첫 향수는 그의 여동생을 상징하는 ‘미스 디올(Miss Dior)’로 이름 붙여졌다.

디자이너로 성공하며 여유를 찾은 그는 1951년 프랑스 남부 그라스 근처의 오래된 영지를 매입해 정원을 가꾸며 평화로운 휴식 시간을 보내기 시작했다. 마치 어린 시절에 그랬듯.

그곳은 세월이 흐른 뒤 현재 디올 하우스의 정원으로 관리되고 있으며, 새로운 향수의 탄생에 영감을 주는 동시에 향수의 주재료들을 키워내고 있다.

‘미스 디올’ 이후로 태어난 디올의 향기들 가운데 1966년의 남성용 ‘오 소바쥬(Eau Sauvage)’, 1985년의 관능적인 ‘쁘와종(Poison)’ 등이 많은 관심을 모았고, 1999년에 발표된 매혹적인 플로럴 향의 ‘자도르(J’adore)’가 샤를리즈 테론(Charlize Theron)의 광고와 함께 꾸준히 인기를 끌고 있다. 최근엔 제니퍼 로렌스(Jennifer Lawrence)를 모델로 내세운 ‘조이 바이 디올(Joy by Dior)’이 싱그럽고 부드러운 향으로 어필하는 중.

왼쪽 위부터 시계 방향으로, 향수 ‘미스 디올’ 이미지 컷, ‘조이’ 광고, ‘자도르 오 드 뜨왈렛’ 광고, ‘쁘와종 걸 언익스펙티드’ 이미지 컷, 디올 정원의 장미 (광고 외 사진=디올 홈페이지)
왼쪽 위부터 시계 방향으로, 향수 ‘미스 디올’ 이미지 컷, ‘조이’ 광고, ‘자도르 오 드 뜨왈렛’ 광고, ‘쁘와종 걸 언익스펙티드’ 이미지 컷, 디올 정원의 장미 (광고 외 사진=디올 홈페이지)

전세계 여성들의 마음을 흔들어놓았던 ‘뉴 룩’은 사실 비판에 부딪히기도 했다.

풍성한 스커트를 연출하기 위해 원단을 지나치게 낭비한다는 의견과, 코코 샤넬이 치워버렸던 코르셋, 페티코트를 다시 꺼내들어 여성들의 인식을 퇴보시켰다는 지적이었다.

하지만 여성들은 누구나 사랑 받고 싶어하는 욕망이 있다는 걸 알았던 크리스찬 디올은 여성들이 더욱 아름답게 보이도록 옷을 만들었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태어난 그의 작품들은 영원히 클래식으로 남아 많은 디자이너들에 의해 재해석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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