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상희의 컬쳐 인사이트] ‘설리’의 죽음으로 본 ‘익명성’의 오만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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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상희의 컬쳐 인사이트] ‘설리’의 죽음으로 본 ‘익명성’의 오만함
  • 권상희 문화평론가
  • 승인 2019.10.18 0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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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뉴스= 권상희 문화평론가] 25살이라는 꽃다운 나이로 세상과 영원히 작별한 설리(본명 최진리). 

생전에 돌출행동으로 평가받았던 ‘여성의 노브라 권리’는 소신 있는 당당한 발언이라는 재평가가 이루어지고 있다. 부정적인 의미로 붙여진 수식어 ‘이슈메이커’는 세간의 관심을 집중시키는 ‘인플루언서’로 순화됐다.

야속하게도 그녀의 죽음 이후에 말이다. 그리고 보면 삶이란 야멸차기 짝이 없는 것 같다. 비난이 ‘죽어서야’ 칭찬으로 바뀌는 현실이 못내 아쉽다. 

어쩌면 그녀는 이런 칭찬에 목말라하지 않았을까. 25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끝없이 계속되는 비난의 화살을 감내해야만 하는 일이 얼마나 지옥 같았을까. 실로 안타깝기만 하다. 

◆수준 높은 한류문화 뒤에 감춰진 ‘대중의 폭력성’

유서를 남기지 않은 탓에 설리가 극단적인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우리는 그저 추측할 뿐이다. 바로 대중들로부터 무분별하게 쏟아진 악성 댓글 때문이었다는 것. 여기에는 반론의 여지가 없어 보인다. 그런 까닭에 갑작스런 그녀의 죽음은 슬픔과 분노를 동시에 수반했다. 마구잡이식의 활자들이 소중한 생명에게 난도질을 가한 것이나 다름없기에.

“그는 소위 노브라 스캔들로 소셜미디어에서 엄청난 폭력을 당했다”, “끔찍한 온라인상 학대로 그룹을 탈퇴한지 4년 만에 숨졌다” 설리의 죽음에 대한 외신의 반응들이다. 창피하게도 우리나라의 댓글 문화를 해외에서는 ‘대중의 폭력성’이라고 평가한다. 수준 높은 한류문화 이면에 감춰진 저질문화인 셈이다. 

그녀의 죽음 이후에도 악플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설리를 추모하는 동료 연예인들에게, 그리고 전 연인이었던 ‘최자’에게까지 악플 세례는 멈출 줄 모른다. ‘유명세’라는 이름으로 감당하라는 것인가. 근거 없는 비난을 쏟아내고도 문제의식조차 갖지 못하는 악플러들, 이쯤 되면 가히 병적이라고 하겠다. 

고(故) 설리. 사진=연합뉴스

◆ ‘표현의 자유’로 포장된 ‘익명성’이 가진 오만함

‘자정작용’이라는 선한 기대감은 실현 불가능한 유토피아를 꿈꾸는 것이나 다름없는 우리의 댓글 문화, 이미 너무 멀리 와버렸다. 여전히 그러려니 하고 넘길 것인가.

‘사고(思考)’ 없는 활자는 활자로서의 기능이 마비된 것이나 다름없다. 이들의 ‘익명성’ 뒤에 감춰진 것은 이름과 얼굴이 아닌 제대로 된 사고체계가 없는 ‘망가진 인격’이다.

문제인 건 익명성이라는 편한 장치가 누군가의 목줄을 조여 오는 흉기가 되고 있는 상황에서도 여전히 ‘표현의 자유’를 들어 이를 포기할 수 없다는 데 있다. ‘익명성’이 가진 오만함이 ‘표현의 자유’로 포장되고 있는 현실이 어이없다. 누군가에게 큰 상처가 되는 ‘표현의 자유’를 그대로 인정해야 하는 것인가. 깊이 생각해 볼 문제다.

설리의 죽음을 계기로 국민의 70%가량이 ‘인터넷 실명제’를 도입해야 한다는 여론조사 결과가 발표됐지만 이미 2012년에 위헌 결정이 내려졌기에 현재로서는 실현 불가능한 상태란다.

그렇다면 악플러에 대한 법적인 처벌은 어떤가. 모욕죄로 고소할 경우 1년 이하의 징역, 200만원 이하의 벌금, 명예훼손죄는 2년 이하의 징역, 500만원 이하의 벌금이 고작이다. 가해자에 대한 처벌이라고 할 수 있는가. 이런 솜방망이 처벌로 피해자의 상처가 치유 될 리 만무하다.

법과 원칙은 중요하다. 하지만 국민의 대다수가 원하는 ‘국민정서’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법은 제도적으로 손질되어야 한다. 강한 규제가 없는 상황에서 ‘제 2의 설리’가 또 나오지 말란 법은 없지 않은가. 이제는 답을 내놓아야 할 때다. 

 

●권상희는 영화와 트렌드, 미디어 등 문화 전반의 흐름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갖고 있다. 글을 통해 특유의 통찰력을 발휘하며 세상과 소통하길 바라는 문화평론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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