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성황후 시해 120주년, 왜곡과 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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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성황후 시해 120주년, 왜곡과 진실
  • 김인영 발행인
  • 승인 2015.10.08 1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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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미사변 배후를 숨기려는 일본, 시해자를 찾는 한국인들

1895년 음력 8월 20일, 양력 10월 8일은 명성황후가 시해된 「을미사변」이 일어난 날이다. 한 나라의 국모가 침략자의 창검에 참혹하게 살해되고, 증거를 없애기 위해 불태워진 국치일이다.

이 엄청난 사건이 발생한지 8일로 120년이 지났다. 육십갑자가 두 번이나 지나도록 일본은 그 사건을 은폐하고, 우리는 진실을 밝혀내는 작업을 끊임없이 하고 있다.

▲ 8일 오전 서울 중구 장충단공원에서 을미사변 순국열사를 추모하기 위한 '제119기 장충단 추모제향'이 열리고 있다. /연합뉴스
국모 살해사건을 은퍠, 왜곡한 일본

그 사건이 얼마나 은폐되고 왜곡되었는지는 「고종실록」에 단적으로 드러난다.

「조선왕조실록」 홈페이지에서 「고종실록」편을 보면, 고종 32년(1995년) 8월 20일자(음력)의 기록은 어처구니가 없다.

“묘시(오전 5시~7시)에 왕후가 곤녕합(坤寧閤)에서 붕서하다. 내각과 궁내부가 그 권한 범위를 지킬 것을 명하다. 대궐 안에 분소한 사태가 진정되어 궁정이 조용해졌음을 고시하다”.

새벽녘에 왕후가 죽었고, 사태가 조용해졌다는 짤막한 표현만 있을 뿐이다. 어떻게 죽었는지에 대한 설명이 없다. 궁정이 조용해졌다는 사실만 전달했을 뿐이다. 마치 「삼국사기」 고대편을 읽는 것 같다. 고대사에서 차기 권력에 의해 전임 임금이 타살될 경우, 우물에 용이 승천했다거나 일식이 생겼다는등의 애매한 표현을 쓰며 죽음의 비밀을 베일에 가리는 것과 같다.

더욱 가관인 것은 이틀후인 6월 22일자 「고종실록」 기사다.

"“왕후 민씨를 서인으로 강등시키다.”

국모가 일본 낭인에 의해 시해됐음에도 고종황제는 왕후를 서인으로 강등시켰다니... 고종은 인간인가 하는 생각이 든다.

다음날짜인 6월 23일자로 넘어가보자.

“왕태자가 상소문을 올리다. 페서인 민씨에게 빈의 칭호를 특사하다.”

아들인 왕태자(나중에 순종황제)가 읍소를 해 어머니가 서인으로 강등되는 것을 간신히 막았다는 내용이다. 황후도, 비도 아닌 그나마 빈이라는 칭호로 절반 정도 복원됐을뿐이다.

 

그러면 「고종실록」이 조선의 국모가 무참하게 살해된 사건을 이처럼 비하한 까닭은 무엇일까. 그것은 「조선왕조실록」 가운데 「고종실록」과 「순종실록」을 일본인이 썼기 때문이다.

고종실록이 편찬된 때는 일제식민통치기다. 일제가 1910년 조선을 강점한후 고종과 순중을 포함해 조선왕족을 관리하기 위해 이왕직(李王職)이라는 관청을 설치했다. 순종이 돌아가신 다음해인 1927년 4월 이왕직에서는 역대 실록의 예에 따라 고종과 순종의 실록을 편찬하기로 했다.

실록편찬위원회는 초대위원장에는 일본인 이왕직 차관 시노다(篠田治策)가 취임했다. 편찬 총책임은 경성제국대학 교수이던 오다(小田省吾)가 맡았다.

당연히 일제에 불리한 내용은 삭제하고, 미화하는 작업이 이뤄졌다. 실록 원고는 위원장인 일본인 이왕직장관의 결재를 얻어 간행됐다. 「고종실록」과 「순종실록」은 실록이라 할수 없다. 일제에 의해 왜곡되고 손상된 실록일뿐이다.

▲ 명성황후가 시해된 건천궁 옥호루 앞 마당에서 1900년대 초 옥호루 사진을 들고 촬영한 사진. /연합뉴스

 

아직도 일본은 명성황후 시해를 부정하고 있다. 일본 언론은 명성황후 시해를 고종이나 대원군이 주도했다는 식으로 왜곡 보도하고 있다. 일본 지식인들의 DNA에는 역사왜곡의 인자가 박혀 있는 것 같다.

이민원 동아역사연구소장은 지난 7일 서울 국회도서관에서 한국학중앙연구원 주최로 열린 명성황후 시해 120주년 추모 학술세미나에서 “일본 정부는 명성황후 시해와 무관하다는 것을 공식입장으로 내세웠으며 일본 언론은 을미사변을 고종이 주도했다거나 대원군이 주모했다는 식으로 사태를 호도했다"고 지적했다. 일제강점기 한국 측은 사건의 진상을 제대로 알기 어려웠고 알았다 해도 이를 기록으로 남겼다가 발각될 경우 목숨을 부지하기 어려웠던 틈을 타 일본이 한국사를 마음껏 왜곡했으며 지금까지 이런 행태가 이어져 오고 있다는 것이다.

이 소장은 "이 사건에 관한 일본의 조치는 19세기 말부터 진행된 한국사 왜곡의 원조“라면서 "미래의 한일관계 개선과 우호를 위해 맨 먼저 넘어서야 할 과제"라고 역설했다.

 

진실을 밝히려는 노력들

하지만 역사의 상흔은 아무리 지우려 해도 지워지지 않는다. 지금으로 치면 청와대 비서실 일지에 해당하는 「승정원일기」에 그 흔적이 남아있다. 1995년 8월 20일자 「승정원일기」에 조선왕의 비서들은 이렇게 기록했다.

“是日寅正後, 日人與二訓鍊隊, 突入坤寧閤, 變起創卒, 宮內府大臣李耕稙, 遇害於坤寧閤楹外, 聯隊將[聯隊長]洪啓薰, 遇害於光化門” (이날 오전 세시가 지난 두헤 일본인이 두 명의 훈련대원과 함께 갑자기 곤녕합에 들어와 순식간에 변란을 일으켰다. 궁내부대신 이경직이 곤영합 대문 밖에서 살해되고 연대장 홍계훈도 광화문 밖에서 살해됐다.)

그러면 승정원일기가 기록하고 있는 그 일본인은 누구인가. 명성황후를 잔혹하게 시해하고 그것도 불태운 그 일본인은 누구인가. 우리 역사학계에서는 명성황후 시해범이 누구인지에 대해 다양한 각도의 연구를 해왔다. 최근 나온 두 책을 소개한다.

 

그동안 명성황후 시해범은 익명의 '일본 낭인'이라는 게 통설이었다.

이화여대 역사학 박사 하지연 씨의 '기쿠치 겐조, 한국사를 유린하다'는 저서에서 구마모토의 낭인 기쿠치 겐조(菊池謙讓·1870~1953)가 명성황후 살해 가담자 중 하나로 적시했다. 저자는 기쿠치가 자신을 포함한 낭인 무리들의 행위를 정당화하기 위해 1896년 '조선왕국'이라는 서적을 집필해 명성왕후 살해의 주모자들이 대원군 세력임을 부각시키려 했다고 주장했다.

기쿠치는 이후 이토 히로부미의 명을 받아 1910년 명성왕후의 일생에 관한 저술을 펴낸뒤 '조선잡기'(1931)와 '근대조선이면사'(1936) 등은 고종과 명성왕후를 비롯, 조선 집권층의 정치적 무능력함과 부패상을 부각시키며 역사를 왜곡한 인물이라고 하지연씨는 주장했다.

▲ 일본이 경복궁을 기습해 명성왕후를 시해하고 시신을 불태운뒤 그 뼛가루를 뿌렸다고 하는 향원정. /연합뉴스

 

또다른 주장은 그동안의 일본 낭인설을 깨고 일본인 장교가 직접 명성황후를 시해했다는 것. 이종각 동양대 교수는 저서 '미야모토 소위, 명성황후를 찌르다'를 통해 경복궁 안의 담장을 넘어들어가 명성황후를 칼로 참혹하게 찌른 시해범은 익명의 '일본 낭인'이 아니라 당시 일본군 경성수비대 장교였던 미야모토 다케타로 소위였다고 주장했다.

이 교수는 이 같은 사실을 뒷받침하는 자료로 당시 주한영사관이 본국 외무차관에게 보낸 '우치다 사신'과 '우치다 보고서' 등을 제시했다.

저자가 명성황후의 직접적 시해범으로 미야모토 소위를 지목하는 결정적 단서는 을미사변 당일에 우치다 사다쓰치 주한영사가 본국의 하라 다카시 외무차관에게 보낸 '우치다 사신'. 이는 현존하는 을미사변 관련 기록 중 그 전말을 가장 충실하게 적은 문서로 평가받는다.

사건 발생 후 뒷수습에 깊숙이 관여했던 우치다 영사는 이 비밀 서한에서 "살해당한 부녀 중 한 명은 왕비라고 하는 바, 이를 살해한 자는 우리 수비대의 어느 육군소위"라고 언급한다. 당시 경성수비대에는 모두 4명의 소위가 있었는데 그중 살해 현장에 난입한 유일한 인물이 바로 미야모토 소위였다고 이 교수는 밝힌다. 우치다 영사는 사건 한 달 뒤 히로시마 지방재판소 검사장에게 보낸 공전(公電)에서 "왕비는 먼저 우리 육군사관의 칼에 맞고"라고 증언하는데 여기에 나오는 '육군사관' 역시 미야모토 소위라는 것.

 

당시 사건현장에 있던 미야모토 소위와 마키 특무조장은 사건 한 달여 뒤 본국으로 소환된 뒤 참고인 조사를 대충 받았고, 다시 1년 9개월 후에 타이완 헌병대로 발령난다. 을미사변의 총책임자로 지목된 미우라 고로 공사를 비롯해 일본인 56명(군인 8명, 민간인 48명)은 사건 3개월여 만에 모두 무죄 판결을 받았다. 세계사에서 유례가 없는 참사이자 민족 자존심을 짓밟은 사변이었지만, 일본은 유야무야로 결론짓고 말았다.

 

우리는 명성황후를 시해한 사변을 잊지 않고 있다

을미사변은 1895년 10월 8일 새벽, 소총으로 무장한 한 무리의 군대와 일본도 등 흉기를 든 일본인 폭도들이 경복궁의 광화문 앞으로 몰려들면서 시작됐다. 조선 주둔 일본군 부대인 경성수비대와 일본군 장교로부터 교육받는 조선훈련대, 일본 공사관원과 영사관원, 경찰과 낭인 등으로 구성된 한일 혼성부대였다.

이들은 고종의 아버지 흥선대원군이 탄 가마를 앞세워 호위하면서 일제히 광화문을 통과한 뒤 건청궁으로 난입한다. 조선 왕비인 명성황후를 살해하는 이른바 '여우사냥' 작전이었다.

일본 측은 러시아 세력을 끌어들여 일본을 물리치고자 했던 명성황후를 제거할 목적으로 왕비의 아버지이자 정치적으로 견원지간이었던 대원군을 '괴뢰'로 내세워 쿠데타를 위장한 살해작전에 나섰다.

왕비 침전에 난입한 일본인 폭도들은 왕비와 궁녀들을 무참히 살육한 뒤 증거를 남기지 않기 위해 왕비 사체를 부근 녹산으로 옮겨 장작더미 위에 올려놓고 석유를 끼얹어 불태웠다. 그리고 타다 남은 유해를 근처 연못에 버렸다가 증거 인멸을 위해 다시 건져 녹산에 묻었다.

일국의 왕비가 자국의 수도 한복판에서, 그것도 시위대가 지키는 왕궁 안에서 외국 군대와 폭도에 의해 참혹하게 살해되고 불태워지는 전대미문의 참사가 발생한 것. 하지만 시해 12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범인의 정확한 정체는 밝혀지지 않은 채 단순히 낭인들에 의한 시해 정도로 얼렁뚱땅 치부해왔다.

▲ 장충단비. 비문은 명성황후의 아들인 순종이 섰다.

 

8일 서울 중구 장충동에 있는 장충단에서 을미사변 때 순사한 열사들에 대해 제사를 지내는 「120주기 장충단추모제」가 열렸다.

장충단은 을미사변과 임오군란으로 순국한 충신과 열사를 제사지내기 위해 1900년 고종이 건립한 일종의 「국립묘지」다. 을미사변때 순국자한 홍계훈, 이경직 등을 추모하는 행사였다.

고종은 명성황후가 살해된 지 5년 뒤인 1900년 9월, 남소영(南小營) 자리에 장충단을 꾸며 을미사변 때 순사한 장졸들의 영혼을 배향하여 매년 봄·가을에 제사를 지냈다. 그러나 1910년 8월 장충단은 일제에 의해 폐사되고 말았다. 1920년대 후반부터 일제는 이 곳 일대를 장충단공원으로 이름하여 벚꽃을 심고 공원시설을 설치했다.

6·25 때 장충단 사전과 부속 건물은 파손됐으나, 비는 남았다. 비 앞면의 장충단이라는 글씨는 순종이 황태자였을 때 쓴 것이다. 이 비는 지금 서울시 지방유형문화재 제1호로 지정돼 있다. 이 비는 지금 신라호텔 자리인 영빈관 내에 있었는데, 1969년 지금의 수표교 서편으로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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