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 인연, 그리고 우주... 지예 칼럼 'Blurred Lin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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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 인연, 그리고 우주... 지예 칼럼 'Blurred Lines'
  • 오피니언뉴스
  • 승인 2015.10.08 1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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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친, 페친, 트친, 카친... 엉켜버린 인연의 실들

 

어느 날 누군가 나에게 굉장히 어려운 질문을 했다.

“인연이라는 것이 정말 있을까요?”

맙소사. 물론 나 역시도 살면서 그것에 대하여 궁금했던 적이 여러 번 있었다. 하지만 겨우 20대 중후반인 나는 아직 그 질문에 대하여 답을 내리지 못한 상태였다. 아니, 확신이 없다고 해야 맞다.

“인연의 기준이 무엇인데요? 정말 서로 사랑하게 되는 사람? 결혼하게 되는 사람? 아니면 평생 옆에 있어주는 사람? 아니면 마지막으로 사랑할 사람?”

내가 이렇게 묻자, 질문을 했던 이는 이렇게 대답을 했다.

“그거 다, 해당되는 사람이죠.”

난 잠시 고민하다가 이렇게 대답했다.

“글쎄요. 제가 아직 결혼은 안했지만, 제가 오늘 죽게 된다면 인연은 있는 거라고 말하고 싶네요.”

 

옛말에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랬다. 그렇다. 이건 정말 옛말이 되어버렸다. 매일 출근길에도 하루에 수십 명과 옷깃을 스쳐대는데 어찌 그들이 다 인연이겠는가. 물론 함께 불행한 일을 겪게 될 운명이라면 인연일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이런 무시무시한 이야기는 그만 치우고.

 

밀란 쿤데라의 소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읽다보면 반복되는 우연은 마치 인연으로 가장될 수 있을 것만 같다. 그렇다면 우연은 정말 우연일까. 당신 앞에 늘 나타나서 당신의 이성(理性)을 혼란스럽게 만드는 사람은 인연일까? 혹시 우연을 가장한 사람은 아닐까? 아니면 당신이 누군가에게 우연을 가장하고 있지는 않은가? 굉장히 흔한 일인데도 의미를 부여해가며 ‘그 사람’에게만 ‘인연’이라는 섣부른 이름을 부여하고 있지는 않은가(지나친 의미 부여는 상처받는 지름길이다).

 

어쩌면 현대인들에게는 ‘인연’이라는 말보다는 ‘인맥’이라는 말이 더 와 닿을 것이다. 오히려 너무 많은 사람과 인연을 맺으며 살아가기 때문이다. 예전에 우리는 기껏해야 가족, 친척, 이웃사촌, 사돈댁, 동창, 종교단체 정도와 인연을 맺으며 살았었다. 그랬기 때문에 친척이라는 틀 안에서도 그 관계를 세분화시켜서 호칭을 정하고 그 서열을 논했다.

그러나 지금은 어떠한가. 인친(인스타그램 친구), 페친(페이스북 친구), 트친(트위터 친구), 이웃(블로그 이웃), 카친(카카오톡 친구) 등등 그 종류도 다양하다. 그저 아무 사진에다가 대고 ‘#맞팔’이라는 단어만 적어 올리면, ‘소통해요’라는 말을 들고 걸어오는 여러 명과 ‘인친’을 맺을 수 있는 세상이 와 버렸다.

그리고 또 한술 더 떠서 거기에 대고, ‘이것도 인연인데’라는 말을 내세운다. 언제부터 이렇게 인연의 의미가 가벼워져 버린 것일까. 알랭 드 보통의 소설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에서 ‘나는 너를 사랑해(I love you)’ 대신, ‘나는 너를 마시멜로한다(I Marshmallow you)’라는 표현을 쓴다. 사랑이라는 표현이 너무도 남용된다고 생각했기에, 주인공이 정말 진심으로 사랑하는 마시멜로로 그 마음을 표현한 것이다.

음. ‘진짜 인연’에도 이런 다른 표현을 써야 될 시대가 온 건 아닐까. 법정 스님은, ‘진정한 연인과 스쳐가는 연인은 구분해서 인연을 맺어야 한다. (중략) 스쳐가는 인연이라면 무심코 지나쳐 버려야 한다’고 하셨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들에 의해 삶이 침해받는 고통을 받게 될 뿐만 아니라, 쓸 만한 인연을 만나기도 힘이 들기 때문이라고. 사람은 태어날 때 저마다 새끼손가락에 실이 묶여져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래서 살아가다보면 언젠가는 이 실과 이어진 다른 편의 사람과 만나게 될 거라고 했다. 하지만 요즘같은 시대에는 왠지 그 실들이 죄다 서로 엉켜 버린 것만 같다. 그러니 스쳐가는 인연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인생을 피곤하게 만든다. 때로는 상처를 준다. 그 엉킨 실들을 풀고 빠져나와야 진짜 인연을 찾아 갈 텐데.

 

▲ 쇼팽의 마지막 연인이었던 소설가 조르주 상드.

 

쓸 만한 인연, 그러니까 좋은 인연을 만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고(故) 피천득 선생님께서는, ‘어리석은 사람은 인연을 만나고도 몰라보고, 보통 사람은 인연인 줄 알면서도 놓치고, 현명한 사람은 옷깃만 스쳐도 인연을 살려낸다‘라고 하셨다. 어쩌면 벌써 인연은 우리의 곁을 지났는지도 모른다. 도대체 옷깃만 스쳐도 인연을 알아보는 현명한 사람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어릴 적 나는 수학을 잘하는 아이가 아니었다. 모든 과목의 평균이 다 높은데 늘 수학 때문에 평균 점수를 깎아먹어야만 했다. 그래서 새로운 유형이 나올 때마다 또 공부하고 또 공부했다. 수학은 (누군가는 암기과목이라 하지만) 다른 과목과는 달리, 개념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사람을 알아가는 일 역시 마찬가지다. 한 사람은 하나의 우주라는 말이 있다. 그 사람에 대하여 알아가는 것은, 그 사람이 어떤 커피를 좋아하고, 어떤 장르의 영화를 좋아하며, 어떤 음식, 어떤 차, 어떤 색, 어떤 날씨를 좋아하는지 아는 것이 아니다. 그 사람을 이해하면 대부분은 추측할 수 있게 된다. 사람을 대함에 있어서, 혹은 센스가 있는 사람이라면 이런 일에 능숙하다. 하지만 이런 능력이 있는 사람을 현명하다고 하고 싶진 않다. 나 역시도 아직 현명한 사람이 되지 못한지라 그저 노력할 뿐이다. 영 머리가 딸렸던 수학을 열심히 공부했듯이, 사람을 알아가는 일에도 그렇게 노력하는 것이다. 곧 나와 맞는 사람인지 아닌지 금방 알게 된다. 마치 ‘얼른 이번 수학 공부는 포기하고 다른 과목 공부를 더 열심히 해!’라고 생각하는 것처럼. 풀리지 않을 문제를 가지고 있다 보면 결국 모든 것이 엉망이 되고야만다. 알고자 하는 노력은 가상하지만, 인연은 억지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누군가와 인연이 되면 그때부터는 더욱 노력해야 한다. 왜냐하면 이제 두 사람은 시간을 나누는 사이가 되었기 때문이다. 상대방을 힘들게 하면 그와 인연인 나 역시도 힘들어지게 된다. 그들의 인연이 심화 과정으로 돌입하게 된 것이다.

 

(사람마다 인연을 정의하는 개념이 다르겠지만) 두 사람이 인연인지 아닌지, 사실 두 사람 모두 평생 퀘스천 마크를 가질 수도 있다. 영화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에 나오는 노부부처럼 평생을 다 바쳐도 모자랄 아름다운 인연도 있지만, 황혼에 이르러 서로의 더 나은 인생을 위하여 이혼을 선택하는 부부도 적지 않으니 말이다.

 

▲ 영화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 포스터.

 

인연을 믿는 사람들은 대부분 이렇게 말한다.

“인연은 노력하지 않아도 이루어져요. 어떻게든 만나게 되고, 어떻게든 내 옆에 있게 되더라구요.”

그랬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들은 상대방을 사랑했기에, 그 사람에 대한 최소한의 노력과 배려가 있었을 것이다.

 

난 인연이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운명의 상대’ 같은 거창한 의미는 아니다. 이미 이 사람이 나의 운명의 상대다, 라고 정해지지 않았기에 더 재미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우린 더욱 노력한다.

안타깝게도 누군가에게는 ‘길지 않은 인연’이 있을 수도 있다. 또 어떤 누군가의 인연은 아직 태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아무리 서로 좋았더라도 날 떠난 누군가는 인연이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난 인연에 대해 정의내리지 못한다. 그저 인연이 존재한다고 생각할 뿐이다.

 

옆에 있는 누군가가 ‘나의 인연’이라 생각하고 최선을 다한다면, 분명 그 사람은 당신의 인연이 되어줄지도 모른다. 그가 절대적 누군가가 아닌데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모든 사람이 모두 하나의 우주이기 때문에. 그래서 난 인연이 무엇인지 조금은 안다. ‘이 사람이 내 인연일 수도 있을 것 같아’라는 느낌과 더불어 내 옆에 있어주는, 또 하나의 우주.

/지예<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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