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대호의 책이야기] 공포와 증오로 지키려는 건 무얼까...'야만인을 기다리며' 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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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대호의 책이야기] 공포와 증오로 지키려는 건 무얼까...'야만인을 기다리며' 리뷰
  • 강대호 북칼럼니스트
  • 승인 2019.10.12 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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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벨문학상 수상자인 J. M. 쿳시의 문학세계가 집약된 역작
서구문명의 도덕적 위선을 통렬하게 비판하다
공포와 증오로 이익을 얻으려는 이들은 과연 누구인가
문학
J.M. 쿳시 '야만인을 기다리며'. 문학동네 펴냄.

[오피니언뉴스=강대호 북칼럼니스트] ‘증오’와 ‘공포’는 지금 대한민국에 흘러넘치는 감정이다. 이 감정들은 아무 이유 없이 그냥 생기는 게 아닌 원인과 대상이 있을 때 더욱 증폭된다. 공포는 사람은 물론 동물도 느끼는 감정이다. 자기보다 강한 상대를 만난다거나 삶과 죽음을 가를 위험을 맞닥뜨릴 때 공포를 느낀다.

여기에 더해 사람들은 자기의 치부를 드러내는 상대를 만난다거나, 지금 누리는 게 영영 사라질 것 같은 순간이 올 때 공포를 느끼기도 한다.

반면 증오는 오직 인간만이 느끼는 감정이다. 포식자는 사냥대상이 미워서 잡아먹을까? 약한 동물은 자기를 잡아먹기 위해 쫓아오는 맹수가 증오스러울까? 물론 그 감정을 정확히 측정할 수는 없겠지만 동물들은 그렇게 태어났기 때문에 그 순간을 충실히 살아갈 뿐이다.

증오는 항상 대상이 있다. 특히, 그 상대가 나와 많이 다를 때 증오가 더욱 폭발하기도 한다. 그런 면에 있어서 증오는 공포에서 오는 것도 같다. 특히 내 가치관과 다른 가치관이 부닥칠 때, 그것이 나의 안녕과 행복을 영원히 방해할 거라 느껴질 때 공포가 생긴다. 자연스럽게 그 대상에 대한 증오가 피어오르게 된다.

그러한 증오는 사람들의 생각을 헛되게 이끈다. 헛된 생각들이 모이면 소문이 되어 흐르고 소문은 사실로 둔갑하여 세상에 널리 퍼진다.

 

쿳시. 사진=게티이미지
남아프리카 태생 소설가 J. M. 쿳시. 사진=게티이미지

노벨문학상을 받은 ‘J. M. 쿳시’(번역본에 따라 ‘쿠체’라고도 함)의 소설 ‘야만인을 기다리며’에서도 그런 이야기들이 펼쳐진다. ‘쿳시’는 남아프리카공화국을 대표하는 소설가다. 그는 2003년에 “서구 문명의 도덕적 위선을 날카롭게 비판했다”는 평과 함께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1980년에 쓴 ‘야만인을 기다리며’는 ‘쿳시’에게 세계적 명성을 얻게 한 대표작이다. 그는 ‘아프리카너’, 즉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태어난 백인이며, 남아공 인종 정책 비판은 물론 전 세계에 깔린 서구 중심 사고를 비판하는 작품도 많이 썼다.

이 작품은 상당히 상징적이다. 언뜻 보면 남아공의 ‘아파르트헤이트’를 비판하는 것도 같고, 유럽 열강들의 식민지 정책을 비판하는 것도 같다. 소설 배경은 아프리카의 어느 사막 접경 같기도 하고 중동이나 서남아시아의 어느 변경 같기도 하다. 다양한 상징과 은유가 소설 전체에 흘러넘친다. 뒤에 언급하겠지만 지금 대한민국으로도 읽혔다.

큰 줄거리는 단순하다. 어느 제국의 평화로운 변경 도시에 수도의 제3국 소속 경찰들이 파견된다. 그들은 변경 너머의 야만인들을 잡아 들이고 고문한다. 그 도시를 통치하는 치안판사인 ‘나’는 고문 후유증으로 눈이 먼 젊은 야만인 여자에게 마음이 끌리고 보살핀다. 결국, 치안판사는 야만인과 내통했다는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히고 온갖 치욕을 겪는다.

소설은 치안판사의 눈을 통해 식민주의가 벌이는 억압과 국가의 안위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정당화되는 타자에 대한 폭력을 강도 높게 비판한다. 그 과정에서 서로 상충하지만, 서로를 있게 만드는 두 단어 혹은 개념이 등장한다. 바로 ‘제국’과 ‘야만인’이다.

소설에서 ‘제국’은 어느 나라를 특정하지 않은 개념 그대로의 제국을 은유한다. ‘자율주의 운동’의 창시자인 ‘안토니오 네그리’가 쓴 ‘제국’에서 “제국은 전 지구적 일방주의”를 품고 있다고 주장한다. 강한 나라에 의해 펼쳐지는 전 세계적 질서 재편을 의미한다고. 쿳시도 특정 나라를 은유하기보다는 강한 힘으로 질서를 유지하는 가상의 나라와 그 공권력을 은유했다.

소설에서 제국은 ‘문명’을 은유하기도 한다. 문명은 어떤 상태에서 더 나은 상태로의 발전을 의미한다. 하지만 그 관점은 그 문명을 가진 사람들의 시각인 것. 소설에서도 ‘문명’은 제국이 가진 체제와 문화 그리고 권력이 미치는 영역으로 표현된다. 그러한 문명의 시각 반대편에는 ‘야만인’이 자리한다.

 

“문명이 야만인들이 가진 미덕들을 타락시키고 그들을 종속적인 존재로 만든다면, 나는 문명에 반대한다고 결론을 내렸다.” (66쪽)

 

주인공인 나, 치안판사는 변경을 다스리며 그곳 사람들의 풍습에도 나름의 질서와 미덕이 있다고 믿는다. 그들 관점에서 보면 문명이 있다는 것. 주인공, 어쩌면 작가는,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닌 다름의 문제라고, 다르다고 옳지 않은 것은 아니라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런데 제국은 문명을 거부하거나 제국의 가치와는 다른 방식으로 살아가려는 사람들을 ‘야만인’으로 치부한다. 제국은 문명으로 개화되지 않는 야만인들 때문에 위험해질 거라고 믿지만 그들은 그저 자기만의 방식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일 뿐이다.

 

“그가 멀리 가리키는 점들은 말을 탄 사람들이다. 야만인들이 아니면 누구겠는가! (중략) 저들은 우리의 모습이 반사되어 생긴 형상일까? 아니면 빛의 장난일까? (중략) 말을 탄 세 사람은 언제나 우리의 시야에 들어오는 지점에 있다. (중략) 그런데 셋이 아니라 여덟, 아홉, 열이다. 아니, 어쩌면 열둘인지도 모르겠다.” (114~115쪽)

 

제국은 결국 야만인의 실체를 밝혀내지는 못한다. 눈에 보이는 듯도 하고 손에 잡힐 듯도 하지만 제국이 생각하는 그런 실체는 없는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실체가 확실하지 않다는 공포는 제국이 더욱 혈안이 되어 야만인을 탄압하는 빌미가 된다.

 

“제국은 역사 속에 존재하고, 역사에 반해 음모를 꾸미도록 운명지어져 있다. 제국의 속마음에는 오직 한 가지 생각만 있을 뿐이다. (중략) 어떻게 하면 제국이 시대를 연장할 수 있는가 하는 생각. 제국은 낮에는 적들을 쫓아다닌다. (중략) 제국은 사냥개들을 이곳저곳에 파견한다.” (219쪽)

 

제국은 실체 모를 그 야만인들이 자기들의 안녕을 해칠까 봐 두려워한다. 두려움은 공포를 낳기 마련이고, 공포는 증오를 낳기 마련이다.

 

”밤이 되면, 제국은 재앙에 대한 상상을 먹고 산다. 도시가 약탈당하고, 사람들이 강간당하고, 죽은 사람의 뼈가 산처럼 쌓이고, 드넓은 땅이 황폐해질지도 모른다는 상상 말이다. 말도 안되는 미친 상상이지만 전염성이 강하다.” (220쪽)

 

제국은 제국을 지키기 위해서 자기의 틀 안에 들어오지 않는 사람들에게 야만인이라는 굴레를 씌웠다. 제국은 야만이 문명에 벌일 허상을 만들어 퍼뜨렸고 결국 제국의 틀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공포를 안겨준다. 그 공포는 제국을 유지하는 강한 힘이 된다.

쿳시 소설 원작, 조니 뎁 주연의 최근 개봉작 'Waiting for the Barbarians' 스틸 컷. 사진=IMDb
쿳시 소설 원작, 조니 뎁 주연의 최근 개봉작 'Waiting for the Barbarians' 스틸 컷. 사진=IMDb

 

소설이지만 요즘 대한민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이기도 하다. 떠도는 소문을 믿는 순간 소문은 진실이 되고, 진실이 된 소문은 공포를 낳는다. 공포는 점점 증폭되어 떠돌면서 증오를 만들어 내기에 이른다.

누군가에게서 시작되었을 그 소문, 어쩌면 소문일 뿐인 그 소문의 목적은 명확할 것이다. ‘야만인을 기다리며’에서도 그랬듯이. 소설 속 그들에게는 영원히 지켜야 할 제국이 있었고, 현실 속 누구에게는 오래도록 지켜야 할 기득권과 영원히 숨겨야 할 과거의 비밀이 있는 것이다.

대한민국을 정상으로 되돌리자고 촛불을 들었던 그 광장에서 어떤 이들은 증오 어린 절규를 토하고 있다. 그들에게 증오를 일으킨 공포는 무엇이었을까. 공포를 자아낸 소문은 무엇이었을까. 그들을 광장으로 내몬 사람들은 그 어떤 무엇이 그렇게 무서웠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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