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통일 25년이 지났건만, 우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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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통일 25년이 지났건만, 우리는...
  • 김인영 발행인
  • 승인 2015.10.05 1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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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독 주민들의 평화 시위와 미국의 지지가 만들어낸 결과

1987년 7월 당시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은 리하르트 폰 바이츠제커 독일 대통령에게 “독일 통일은 100년은 지나야 가능할 것”이라고 했다. 1년 6개월 뒤 1989년 1월 에리히 호네커 동독 사회주의통일당(SED) 서기장은 “베를린 장벽은 50년이나 100년은 더 버틸 것”이라고 장담하며 그해를 열었다.

이들의 예언은 보기좋게 빗나갔다. 그들 스스로도 공산주의 국가들의 변화 속도와 폭을 가늠하지 못했고, 그런 변화에 대한 불길한 두려움을 자기 기만하는 주술적 레토릭에 빠져 있었던 것이다.

1989년 11월 9일의 베를린장벽 붕괴에서 이듬해 10월 3일 독일 통일에 이르기까지 불과 329일이란 시간 밖에 걸리지 않았다.

독일이 통일된지 3일로 25주년, 즉 4반세기가 지났다. 독일이 통일되던날, 우리도 통일이 멀지 않았다고 믿었지만, 세월이 하염없이 지났다. 독일 통일 과정을 되짚어보면서 한국의 통일을 다시 염원해보자.

▲ 2014년 3월 24일 박근혜 대통령이 베를린 이스트 사이드 갤러리를 방문해 옛 서독과 동독을 가르던 베를린 장벽과 'DMZ-그뤼네스 반트 사진전' 작품을 감상하고 있다. /연합뉴스

 

① 통일의 서막을 올린 니콜라스 교회의 평화시위

베를린장벽 붕괴는 두가지 자그마한 사건에서 단초를 형성한다. 1989년 3월 13일 동독 라이프치히의 니콜라스 교회에서 예배를 마친 300명의 신도가 여행자유를 요구하며 시위를 벌였다. 그리고 그해 5월 2일 헝가리 정부가 소련의 개혁 개방 정책을 받아들여 오스트리아와의 국경에 설치한 철조망을 제[거했다. 그러나 당시에 두 사건이 독일 통일의 회오리 바람을 일으킬지를 알아차린 사람이 거의 없었다.

독일의 일요신문 벨트암존탁은 동독 국민 150만명이 서독으로 이주하고 싶어한다고 보도했고, 동독의 철권 통치자 호네커 서기장도 더 이상의 국경탈주를 막을수 없어 발포 행위를 중단하겠다고 밝혔다.

동독에선 5월 7일 실시된 지방선거에서 부정 선거가 드러나 동독인들의 분노가 조직적인 정치운동으로 발전하는 결정적 계기로 작용했다. 밖으로는 서독행을 원하는 동독 난민들이 프라하, 바르샤바, 부다페스트의 서독 영사관으로 몰려들었다.

안팎의 상황 변화에 맞물려, 라이프찌히 니콜라스 교회에서 매주 열리는 월요일 평화시위에는 9월 4일 1,200명이 모였다. 교회는 공산 치하의 동독에서 체제 이념에 흡수되지 않은 유일한 사회기관이었기 때문에 시민운동을 조직화하는 기회를 제공할수 있었다.

하이라이트는 10월 9일 라이프치히 월요 시위였다. 이날 무려 7만 명이 운집했다. 당시 동독 당국은 시위를 해산시키기 위해 무력을 사용할 계획이었다. 앞서 그해 6월 또다른 공산국가인 중국에서 벌어진 천안문 사태는 무력에 의해 진압된 바 있다.

하지만 치안당국은 시위군중이 그렇게 많이 몰릴줄 예상하지 못했다. 7만명의 군중을 경찰 병력 8,000명을 제어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당국은 개입하지 않기로 했고, 동독의 종주국인 소련도 무력 불사용을 묵인했다.

전문가들은 당시 고르바초프와 호네커가 탱크와 총칼로 짓밟고 나섰다면 모든 것은 끝났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렇다고 해서 민중의 집단적 저항과 역사의 도도한 흐름을 역류시키지는 못했을 것이다.

호네커는 결국 10월 18일 서기장에서 물러나고 에곤 크렌츠가 바통을 이어받았다.

▲ 분단 시절 동독은 베를린장벽 안쪽에 내벽을 추가하기도 했다. 이중 장벽인 셈이었다./연합뉴스

 

② 동독 경제는 파탄 상태

크렌츠 신임 서기장이 권력을 물려받은 직후인 1989년 10월말, 경제전문 그룹의 대표인 게르하르트 쉬러가 신임 총리에게 “동독 경제가 파산 직전의 상태”라고 보고했다. 그는 “동독이 현재의 국가 부채를 유지하기만 해도 국민의 생활수준이 25% 하락하며 통제 불능의 상태가 될 것”이라고 밝혔다.

동독 정부가 이 사실을 발표한 것은 처음이었고, 경제가 파산상태라는 정보를 들은 동독 주민들의 저항이 들불처럼 번져나갔다.

 

동독 경제는 40년간의 공산 체제로 인해 심각한 상태였다. 1980년대말 대부분의 동독 공장은 거의 폐허수준으로 기계는 완전 구형이거나 낡았다. 건물과 교통 인프라, 통신부분도 비슷한 상황이었다. 제조업 생산력은 서독의 25~30% 수준에 머물렀다. 많은 제품들은 동독 내부나 공산 국가에서만 팔렸다.

1980년대 들어 생활필수품 부족 현상이 악화했다. 막대한 군사비와 거대해진 행정 경비의 부담으로 국민들에게 배를 불릴 여력이 없었고, 게다가 종주국인 러시아도 경제가 피폐해 지면서 동독에 싸게 지원하던 에너지등 원자재 공급을 줄였다. 국가부채는 늘어났고, 투자자금은 날로 부족해졌다.

호네커 공산 정부는 경제개혁을 할 능력도, 의지도 부족했다. 동독 경제의 근거가 무너지고 고르바초프의 등장과 함께 국제정치의 냉전 구도가 깨져가는 상황에서 동독인들은 자유와 평화를 위해 거리로 나섰고, '노이에스포룸' '데모크라티 예츠트' '민주약진' 같은 정당이나 정치조직이 활발하게 활동을 전개했다.

크란츠 정부는 서독정부에 100억 마르크라는 대규모 자금을 즉각 지원하고, 매년 20억 마르크씩 지원해 달라고 서독 정부에 요구했다. 서독 정부는 경제 지원을 약속해 줄테니 전력 공급 독점권을 포기하고, 민주주의 정당과 자유선거를 허용할 것을 요구했다. 돈은 주는 조건으로 동독 가두시위자들의 요구사항을 들어주라는 것이었다. 동독 정권은 안팎에서 압박을 받은 것이다. 크란츠 정부는 서독으로부터 경제지원을 약속받는 대가로 새로운 여행법을 내놨다. 하지만 사태를 진정시키기는커녕 악화시킬 뿐이었다.

 

③ ‘세기의 말실수’가 베를린 장벽 붕괴의 도화선

11월 6일 하루에만 라이프치히와 드레스덴에 각기 30만 명, 10만 명의 시위대가 거리로 나와 공산 정부를 반대했다.

이런 가운데 ‘세기의 말 실수 사건’이 터지며 일촉즉발의 상황에 기름을 붓는다. 베를린 장벽 붕괴는 우연의 사건에서 출발한다. 역사의 아이러니다.

11월 9월 귄터 샤보브스키 동독 정치국 선전상이 기자 회견을 열었다. 회견 내용은 앞으로 동·서독이 더 자유롭게 왕래 가능한 관계를 도모한다는 것.

그는 “언제부터 그 조치가 실현되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내가 아는 한은…”하고 뜸을 들인후 “지체없이, 지금 당장”이라는 유명한 ‘말실수’를 했다. 그는 전날에 과음을 해서 발표내용을 숙지하지 못했다는 설이 있다. 어쨌든 세기의 말실수가 전파를 타면서 동독 주민들은 서독에 가기 위해 헝가리와 오스트리아를 돌아 갈 필요가 없어졌고, 베를린 장벽으로 몰려들었다. 그들은 망치를 들고 장벽을 부숴버렸다.

 

베를린 장벽 붕괴는 즉각 통일의 열망을 들끓게 했다. 헬무트 콜 서독 총리는 동독 정부에 근본적으로 개혁하면 모든 것을 지원해 준다고 약속했고, 모드로브 동독 총리는 "변화는 되돌이킬 수 없다"며 현실을 직시했다.

그 사이 동독인들은 11월 20일 월요시위부터 "우리가 인민이다(Wir sind das Volk)"라는 기존 구호에서 나아가 "우리는 한 민족이다(Wir sind ein Volk)"라고 외치기 시작했다.

▲ 유라시아 친선특급 원정 마지막 날인 지난 7월 31일 독일 베를린 브란덴부르크문 앞 광장에서 국악단 소리개 단원들이 공연을 펼치고 있다. /연합뉴스

 

④ 미국의 지지, 러시아의 양보

콜 총리는 11월 28일 독일과 유럽의 분단 극복을 위한 10개 정책 발표를 통해 단계적 통일 비전을 제시하고, 1990년 벽두 프랑수아 미테랑 당시 프랑스 대통령에게 통일 추진에 관한 협조 의사를 전달받는 등 주변국 설득 외교 채널을 가동했다.

그러는 사이에 동독에선 크란츠 정부는 고작 7주만에 정권을 내줬다. 12월 3일 내각 총사퇴 이후 온건파 한스 모드로브 정부가 등장했다

그러나 당시까지만해도 모드로브 동독 내각은 파탄 난 경제를 살리며 서독과 공존하려는 데 주안점을 두었고, 서독 역시도 동독을 자극하지 않고 적어도 겉으로는 공생을 도모하는 데 무게를 실었다.

하지만 서독의 콜 총리는 통일이 임박했음을 감지하고 외교전에 총력을 기울였다. 콜은 이듬해인 1990년 2월 10일 모스크바에서 고르바초프를 만나 독일 통일은 독일인 스스로 결정해야 한다고 확인받고, 2월 24일에는 미국으로 날아가 조지 부시 대통령에게 통독 추진 의사를 전하며 지지를 얻는 등 통독 행보에 속도를 냈다.

1990년 3월 18일 동독에선 첫 자유선거를 통해 콜이 이끄는 서독 기독민주당(CDU)과 함께하는 동독 CDU 주도의 로타어 데메지에르 총리 내각이 출범했다.

동·서독은 5월 '화폐·경제·사회통합 조약'을 체결해 통합 마르크화 사용을 발효하는 데 합의하고, 8월 말 900쪽 분량의 통일협정에 사인함으로써 통일로 급속히 내달렸다.

서독의 콜 총리에겐 미국이 든든한 아군이었다.

프랑스와 영국은 속으로 독일의 통일에 반대했다. 두 나라는 근현대사에서 독일과 대규모 전쟁을 치른 경험이 있기에 또다시 독일이 강성해지길 우려했다. 하지만 콜 수상은 미국을 적극 설득했다. 아버지 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은 독일이 나토 가맹국으로 잔류해 서방의 동맹국으로 남는한 독일 통일을 지지했다. 미국이 독일 통일을 확고하게 지지했기 때문에 프랑스와 영국의 반대는 확대되지 못했다.

 

독일은 통일 달성을 위해 동·서독과 소련·미국·프랑스·영국 등 전승 4개국 간 '2+4' 회담을 수 차례 가동했다. 나치 정권이 일으킨 2차 세계대전 전후, 승전국인 미국 프랑스 영국은 서독 영토를, 소련은 동독 땅을 각기 점유한 가운데 동, 서독 정부는 군사와 외교 등 주권적 사항을 이들 국가에 의해 제약당하고 있었다. 그 점에서 2+4 조약을 통한 통독은 온전한 주권국의 거듭남이란 의미도 있다.

러시아에는 동독에 주둔한 군대를 철수하는 문제가 남아있었다. 이 문제는 돈으로 풀었다. 러시아는 재정 위기 상태였기 때문에 돈을 원했다. 서독은 이 과정에서 러시아에게 통독이 나토에 잔류하고 통일 독일 군대를 37만으로 제한하며, 소련군 철수 비용 대가로 150억 마르크를 지원하는 조건에 합의를 얻어냈다.

독일 통일은 2+4 회담의 타결로 사실상 완성됐다. 2차 세계대전 전승 4개국 중 미국, 프랑스, 영국은 서독을, 소련은 동독을 점유하고 주권을 제한하고 있었던 만큼 이 회담 타결을 통한 독일 통일의 완성은 온전한 주권국가 '독일'의 탄생을 알리는 것이었다.

1990년 10월 2일 동독 의회가 해산되고, 다음날인 3일 동독의 서독 편입을 공식 발효하면서 통일을 완성했다.

▲ 1990년 9월12일 '2(동,서독)+4(미국 소련 프랑스 영국)' 조약 사인(독일정부 운영 홈페이지) /연합뉴스

 

⑤ 독일 통일의 또다른 주인공은 고르바초프

20세기말 역사의 기적으로 불리는 독일 통일은 과연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이 없이 가능했을까.

독일인들은 고르바초프에게 크게 빚 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올해 통일 25주년을 맞아 베를린 시내에 있는 마우어파크(장벽공원)에서 고르바초프의 이름을 앞세운 거리 사진전이 열린 것은 그런 인식의 일면을 보여준다.

그는 교조주의를 배격하고 페레스트로이카(개혁)와 글라스노스트(개방)를 앞세워 냉전을 녹였고, 이는 동구 사회주의에 일대 충격을 가했다. 아울러 동독인들의 자유 열망과 폭압적 공산정권에 대한 저항정신을 고양시키는 데 크게 기여했다. 그는 공산주의를 신봉했고, 생산력을 개방해 러시아 제국의 재정적 부담을 덜길 원했다. 고르바초프는 자신의 개혁 정책 때문에 공산주의가 붕괴되리라는 것을 예측하지 못했고, 결과적으로 독일 통일에 기여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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