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촌에 미친 사람들(상) - 힘겨운 농활의 추억
상태바
농촌에 미친 사람들(상) - 힘겨운 농활의 추억
  • 박범준
  • 승인 2015.09.25 18:2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과학자의 꿈을 접고, 농촌으로 갔다

1982년 여름 경기도 여주군 도전리 마을에서 농촌봉사활동을 했다. 10여일의 극히 짧은 농촌봉사활동의 의미와 보람을 갖기 위해 몇 달 전부터 우리나라 농업 농촌 농민의 현실을 이해하기 위해 이러저러한 책들을 보았다. 박현채 선생님의 글과 이우재 선생님의 글들 그리고 기독교 단체에서 나온 자료들을 많이 봤다.

글로 접한 우리나라 농업 농촌 농민의 현실은 참으로 암담하고 암울하였다. 현실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도 많았다. 그럼에도 농촌봉사활동에서 만날 농민들과 대화를 하기 위해서라도 억지로 꾸역꾸역 머리에 집어 넣었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탈농, 아무리 농사를 지어도 빚만 늘어간다는데, “그럼 왜? 농사를 짓는 거지?”라는 의문도 들고, 농협이 농민들에게 아주 커다란 도움을 주는 줄 알았는데, 자료에서 보면 “농자재를 떠 넘기고, 돈을 빌려주고 돈 놀이하는 것 처럼 보이고”, [경자유전의 법칙]이라고도 하고, 도시인이 농지를 사는 것은 불법이라고 하는데, 실제로는 외지인들이 땅투기를 목적으로 농지를 많이 사고 있다고도 하고......

농업 농촌 농민 현실에 대해 자료를 접하면 접할수록 한편으로는 “이 글이 사실일까? 너무 과장된 것은 아닐까? 이게 사실이면 농민들은 어떻게 살라고?” 라고 동정적인 마음이 들다가도, “어차피 젊은 시절에 ‘사서 고생한다’라는 말이 있듯이, 그냥 좋은 경험을 하는 거지”라고 하며 가슴에 담아두려 하지 않았다. 어차피 내가 가야할 길을 “졸업 후 유학을 가서 나름 세계적으로 유명한 생물학자이자 과학자가 되는 게 꿈”이라고 정해 놨기 때문에.....

 

“서울대 졸업하고 어떻게 살건데?”
“농민을 절대 배반하지 않겠습니다.”

도전리 마을에서의 농촌봉사활동은 참으로 힘들고 힘들었다. 연일 계속되는 폭염속에 논 밭은 거북등처럼 쩍쩍 갈라지고, 안하던 육체 노동에 몸은 물먹은 솜처럼 무겁기만 하고, “쓸데없는 일을 한다”며, 호미며 낫등 농기구를 빌려주지 않아, 나무 막대기로, 손으로 논 밭을 뒤집고, 땀을 비오듯 흘렸다. 험한 식사를 하며 - 아마도 어머니가 그렇게 해줬으면,“엄마 내가 개야? 돼지야? 이걸 어떻게 먹어?”라고 했을 정도의 험한 음식 -, 농민들이 “애고 애고 애쓴다. 이거라도 먹구들 해”라며 내미는 찐 감자며 옥수수며 등을 보며 속으로는 “아아 먹고 싶다” 그런데 우리 스스로가 정한 규율에 따르면 새참이기 때문에 농민의 손길을 뿌리치고 매몰차게 “농민에 피해를 주는 새참이라 받을 수가 없다”고 말했던 기억이 새롭다.

내가 1988년 함평에서 농사를 지으면서 농촌봉사활동을 하러 온 대학생들에게 다짐을 받았던 것 중의 하나가 “농민이 손수 생산한 농산물을 주는 것은 무조건 먹어라. 안그러면 농촌봉사활동 못할 줄 알아라”라고 으름장을 놓았다.

농촌경험이 없는 대학생의 삶과 농촌에서 삶을 동시에 경험하다보니 [새참]에 대해서도 다르게 해석을 하게 되고, 대학교 때의 어리석음에 대해 헛웃음을 짓기도 한다.

도전리에서 농촌봉사활동을 끝내기 전날 마을에서 [마을잔치]가 열렸다. 나는 청년반소속으로 마을청년회 형님들과 막걸리 한잔을 하게 되었다. 술잔이 어지럽게 돌아가고, 마음속으로 “야! 오늘만 지나면 내집, 내방으로 가서 늘어지게 한 숨 잘 수 있겠구나. 한 이틀 푹하고 잠을 실컷 잘 수만 있으면 소원이 없겠다”고 생각하는 순간, 청년회 회장형님이 “야. 범준아! 니네가 우리마을에 와서 10여일 동안 죽어라고 고생을 했는데, 이런 말 하기는 뭐해도 실제로 도움이 되지는 않는다. 근데 서울대학교 대학생들이 우리마을에 온다고 하니까 어떻게 생겨먹었는지 신기하기도 하고, 니네 일하는 것 보니까 재미도 있고, 머리가 좋아 공부는 잘할지 몰라도 농사일은 진짜로 못하는구나” 라는 생각도 하고, “근데 범준아! 니네가 와서 농촌 현실이 어떻고, 농민이 어떻고 하는데, 니네는 그거 공부해서 알지? 우리는 맨날 몸으로 겪는 생활이야. 궁금한거는 너가 서울대학교 졸업하고나면 어떻게 살건데? 그게 궁금하네?”

나는 말문이 막혔다. 전혀 생각하지 않았던 기습적인 질문. 그런데 청년회장님은 나를 뚫어지게 쳐다본다. 일부러 막걸리 한잔을 걸치면서 숨을 고르고, 궁색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저는 절대로 농민에게 배반되는 삶을 살지 않을 겁니다. 약속합니다”라고 말했다.

청년회장님은 “글쎄, 그게 현실적으로 가능할까? 농대를 졸업하고나면 농협에 취직할 수도, 농약회사며 종자회사며 등등 농자재회사로 취직들도 하고, 교수도 되고 그럴텐데, 과연 농민에게 해를 끼치지 않고 살수 있을까?”

“암튼 저는 농민에게 도움을 주지는 못할 망정 피해를 주는 삶은 절대로 살지 않겠습니다”

이렇게 농촌봉사활동은 막을 내리고, 도전리 마을을 떠나던 날, 끝모를 폭염이 수그러 들고 드디어 아침부터 비가 세차게 내리기 시작했다. 마을주민들은 동네 마당에 모두 나와 우리들에게 “수고들 했어요”라고 말을 하며 손을 흔들고, 우리도 손을 흔들고.........

여주 읍내로 나와서 모두가 중국집엘 갔다. 그리고 각자 취향에 따라 자장면과 우동을 시켰다. ‘시장이 반찬’이라는 말이 있듯이, 아마 이때 먹은 자장면이 세상에서 가장 맛있던 자장면으로 기억이 된다.

▲ 목원대 소속 농촌봉사단들이 지난 8월 충남 금산군 제원면 바리실마을에서 일손돕기에 나서고 있다. /연합뉴스 (사진은 기사 내용과 관련이 없습니다.)

 

과학자의 꿈을 접고 할수 있는 일이 없었다.
농민속에 들어가는 거다.

방학이 끝나고 학교생활로 돌아온 나는 다시금 책과 씨름을 하는 나날이 이어지고, ‘농촌봉사활동’은 먼 옛날의 아련한 기억으로 점차 흐릿해져 가고 있었다.

그러다 12월 초에 서울대학교 총학생회일을 제안받고, 몇 날 몇일을 고민하고 또고민하였다. 그리고 결심을 하였다.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며, ‘암울한 시대로 인하여 더 이상 젊은이들이 자신의 찬란한 꿈을 버려서는 안되고, 내가 마지막이면 좋겠다’고 그러면서 어린시절부터 꾸었던 학자의 꿈, 과학자의 꿈을 접었다.

학자의 길, 과학자의 길을 접고나서, 그리고 총학생회일을 마치고 나서,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은 너무도 없었다. 시대적 상황이었다. 친구들 대부분은 학교를 떠나 공장으로 노동현장으로 뛰어들었다.

나도 결단을 내려야 했다. 그런데 기차의 기적소리가 멀리서 시나브로 가까워 지듯이 환청이 들리기 시작한다. “저는 절대로 농민에 배반되는 삶을 살지 않겠노라”고 다짐에 다짐을 했던 소리가......

노동자들의 삶이 비참하다고 들었다. 근데 내가 농촌봉사활동 과정에서 공부한 우리나라 농업 농촌 농민의 현실은 참으로 가혹하고 참담했고 특히나 내가 몸소 눈으로 확인하고 몸으로 겪어 봤다. 우리 농민의 삶이 노동자 보다 못하면 못했지 낫다고 감히 누가 얘기하겠는가?

“그래 농민에 배반되지 않는 삶의 최선은 농민속으로 들어가는 거다” 이렇게 결심하고 나니 한편으로는 후련해지는데, 또다른 한편으로는 참으로 암담하고 깝깝하다. “이게 의욕만 갖고 되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농촌에 집도 없고, 땅도 없고, 그리고 무얼 어떻게 시작 해야하는 건지 도통 알수도 없고. 불현듯 농촌현실과 농민 현실에 관한 자료를 펴냈던 카톨릭농민회가 생각났다. “그래 일단 카톨릭농민회를 찾아가 보자”

주소를 보니 대전. 무턱대고 대전에 있는 카톨릭농민회를 찾아갔다. 거기서 이상국 선배님을 만났다. 이러저런 얘기를 하다가 “고향이 어디요?” “전남 고흥인데요” “아아 그럼 전남 카톨릭농민회를 찾아가서 서경원 회장을 만나는게 좋겠군요”

“아아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광주도청앞의 카톨릭회관에 있는 전남카톨릭농민회를 찾아갔다.

“대전에 있는 이상국 선배님 소개로 왔는데요. 서경원 회장님 계십니까?”

“회장님은 지역에 가 계시고 여기는 없는데요. 그럼 총무님은?”

“아! 노금노 총무님도 지역에 계시는데요. 그러나 무슨 일로?”

내 삶의 진로 문제를 여자 간사에게 시시콜콜 얘기할 수는 없었다. 사무실 한 켠의 자료를 보다보니, 기독교농민회에서 발간한 자료가 눈에 확 들어온다. 자료를 홑어보고 주소를 보니, “어라! 서울 종로구에 있네”

자료를 얻어갔고 나오면서, “어차피 농촌으로 들어갈 준비를 하려면은 자주 찾아보고 의논도 하고, 훈련도 받아야할 것 같다. 물론 막판에 도움도 받아야 하고. 그럴바에는 서울에 있는 기독교 농민회하고 의논하는게 훨씬 좋겠다”고 생각하고 부랴부랴 서울행 고속버스를 탔다.

어두운 터널을 지나 환환 빛을 만나듯 부푼 꿈을 갖고 서울에 올라와, 바로 기독교농민회를 찾아갔다.

그 때는 그분들이 그렇게 대단한 분들인지는 몰랐지만, 아무튼 배종렬회장님, 나상기 사무국장님, 정광훈 선배님, 윤기현 선배님, 허헌중 선배님, 김준규 선배등을 만났다. 얼마있다 KSCF에서 일하던 조성우 선배님과 최종진 선배님도 만났다.

“무슨 일로 왔느냐?”며 뜨아한 눈 빛으로 나를 보던 나상기 선배는

“농민운동을 배우고 싶어서 왔는데요”

“농민운동이 무슨 애들 장난인 줄 아냐. 바쁘니까, 어여 나가라”고 외면한다.

방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동물원의 원숭이 보듯, 신기한 동물을 쳐다보듯 나를 힐끔힐끔 쳐다본다.

“이왕 왔으니, 저기 자료 몇 권을 주시면 안될까요?”

“자료는 갖다가 뭐하게?”

“읽어 볼라구요”

“글쎄. 필요하면 알아서 챙겨가라”

아마도 농협에 대한 자료, 토지에 대한 자료, 가격에 대한 자료 등 1부씩 챙겨갖고 나오면서, “다시 오겠습니다”고 얘기하고 머쓱해진 상태에서 나왔다.

그리고 밤새 읽고 또 읽고, 이 삼일이 경과하고나서 또다시 기독교회관으로 찾아갔다. 마침 호랑이 같던 나상기 선배님은 안계시고, 허헌중 선배님과 김준규 선배님만 있었던 것 같다. 가져갔던 자료를 돌려주며

“다른 거는 없어요?”

“그새 다 본거냐?”

“얘”

“그럼 이 자료랑. 저 자료랑 가져가서 보고 돌려주라. 그리고 이자료는 안 돌려줘도 된다”

“아아! 그래요. 감사합니다. 그리고 다 읽고 꼭 돌려드릴게요”

흡사 고시공부하듯이 열심히 읽고 요약 정리하고, 그리고 몇 일 있다가 기독교농민회를 또 찾아갔다. 그러기를 여러차례, 드디어 어느 날 나상기 선배님이

“다들 노동운동 한다고 하는데, 너는 뭐 땜시 농민운동을 할려고 하느냐?”

“농촌활동을 하면서 보니까, 농민이 노동자 보다 더 비참하면 비참했지 덜 비참하지 않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가장 절박하다고 해야하나 뭐 그런”

“노동운동하고 비교하면 농민운동은 참으로 어렵고 힘들다. 맘 만 가지고 되는 거는 아니다”

“죽기아니면 까무러치기로 해보겠습니다. 도와주십시오”

이렇게 해서 기독교농민회를 찾아다니기를 몇 달 만에 처음으로 김치찌게를 얻어 먹고 일종의 수습사원(?)이 되어, 예비 기독교농민회 회원이 되었다.

이후 체계적으로 공부를 하고, 농업 농촌 농민의 문제가 어디에서 비롯되었고, 이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는 농민들이 깨어나야 하고, 조직적으로 힘을 길러야 한다는 것을 배웠다.

지난 시기 농민운동의 주요 사례에 대해서도 공부를 하였고, 1985년 소몰이 싸움도 가까운 거리에서 지켜보게 되었다.

그리고 나서 1986년 겨울 전남 함평으로 귀농을 하게 되었다.

 

힘든 함평 귀농 생활의 나날
서울 친구를 만났더니 세상 참 많이 변했다

빈집을 차지하고 정착한 마을에서의 삶은 참으로 힘들고 힘든 나날이었다. 보통 농촌봉사활동이란 일정기간이 지나면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는데, 귀농이란 그게 안되었다. 농촌에서의 삶이 바로 생활이고, 하루하루가 생존을 위한 싸움이었다. 하루 평균 14시간 이상의 강도 높은 노동과 손에 쥐어지는 돈은 고작 8,000원.

그래도 다행인 거는 밥은 맘껏 먹을 수 있다는 것, 그리고 담배를 1갑씩 사준다는 것. 결국 벌이는 시원치 않아도, 돈 쓸 일이 없으니 그럭저럭 버틸 만 했다.

죽을 것 같았던 노동일도 점차 익숙해지면서, 몸이 튼튼해 지는 느낌을 받게 되었다.

땅속에 푹하고 쳐박혀 있는 동안 세상은 요동치고 있었다. 서울은 6월항쟁이라고 하여 연일 뜨거운데, 전남 함평은 이글거리는 땡볕속에서 모내기를 끝내고 보리타작하기 바쁘고, 얼굴은 까맣게 그슬려 진다.

추석이 다가오면서, 동네 어르신들이

“자네는 부모님 뵈러 고향엘 안간가?”

얼버무리며 “저도 댕겨와야겠지유?”

“그럼 몇 일가서 푹 쉬고 오게” 그러면서 뭔가를 조금씩 챙겨주신다.

할 수 없이, 광주행 버스로, 그리고 다시 서울행 고속버스를 타고 서울로 왔다.

서울사람이 되어 몇 일 동안 친구들을 만나니, 그간 세상이 무지하게 많이 변했다. “어쩌면 군사정권이 막을 내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 “정권이 바뀐다고 농민들의 삶이 바뀔까?”라는 생각도 들고

그러면서 눈 앞의 현실은 “빨리 내려가서 벼 베기를 해야하는데”

아우성치는 서울을 뒤로하고, 함평으로 돌아온 나는 다시금 일상의 농부로 하루하루를 열심히 땀흘리며 살았다.

벼 베기일이 막바지에 이를 즈음, 몇 몇 형님들이 찾아온다.

“김대중 선생님이 대통령에 나간다고 하는데, 자네가 이러고 있으면 어떻게 한단 말인가?”

“그게 나하고 뭔 상관이래요?”

“아따! 우리 대중이 선상님이 대통령 된다는데 가만히 있으면 쓰겄는가? 자네가 거들어야지”

“암튼 나는 모르는 일이요”

이러기를 몇 날 몇 일, 나는 형님들에게 몇가지 제안을 한다.

“형님들 뜻이 그러면 우선 활동자금을 각자 추렴합시다. 100명이 각자 10만원씩 내는 걸루 합시다 그럼 나도 10만원 내겄오. 그라고 설혹 김대중 선생이 대통령이 되더라도 우리 지역을 잘살게 할려면 우리가 합심해야 되요. 바쁜 대통령이 뭐 지랄 헌다고 우리 마을까지 신경 쓰겄오. 마지막으로다가 김대중 선생이 만약에 떨어져 불면 그땐, 공정선거 감시단을 그냥 접지 말고, 면 청년회로 전환합시다”

다급한 형님들은 “알았다고, 알았응께, 우리가 990만원 모태오면 자네도 확실히 같이 하는 거네”

불과 이삼일이 지나고 990만원이 찍힌 통장을 들고 형님들이 찾아오고 본격적으로 대외활동을 처음 시작했다. <계속>

 

박범준씨 이력
▲1981년 서울대 농과대 입학 ▲1986년 전남 함평군 엄다면 영농 ▲1989년 전남 농민문제연구소 연구실장 ▲1989년 전국농민운동연합 전남 정책실장 ▲1990년 전국농민회총연맹 전남 정책실장 ▲1991년 동양식품 상무 ▲1992년 한우리유통 대표 ▲1997년 새정치국민회의 농어민특별위원회 사무국장 ▲1999년 성환식품 전무 ▲2001년 (주)한국농산물류 기획실장 ▲2005년 대통령자문 국가균형발전위 자문위원 ▲2013년 강원도 인재개발원 심의위원 ▲2011년~현재 강원마을기업 및 주민기업 육성 자문위원
Tag
#N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0 / 40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