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대호의 책이야기] 눈먼 자들의 세상에서는 누가 왕 노릇을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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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대호의 책이야기] 눈먼 자들의 세상에서는 누가 왕 노릇을 할까
  • 강대호 북칼럼니스트
  • 승인 2019.08.23 1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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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 노벨문학상 수상 '주제 사라마구'의 대표작 '눈먼 자들의 도시' 리뷰
포르투칼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용접공 생활 후, 1947년 소설 『죄악의 땅』 발표
19년간 공산당 활동 후 1968년 시집 『가능한 시』 이후 문단의 주목받기 시작
인간의 가치, 현대 문명, 인간 사회를 조직화한 정치 권력 구조 비판 등을 표현
눈먼 자들의 도시. 해냄 펴냄
눈먼 자들의 도시. 해냄 펴냄

 

[오피니언뉴스=강대호 북칼럼니스트]  문학책만 읽던 시절이 있었다. 중고등학생 시절에 그랬다. 부모님은 막내아들이 책 사달라 조르는 걸 좋아하셨다. 덕분에 중학교에 다닐 때는 한국 작가들의 단편소설을 전집으로 구해서 읽을 수 있었다. 고등학교에 올라가서는 책꽂이 한켠을 차지한 고전 명작소설 문고본을 흐뭇하게 바라보곤 했었다.

청소년 시절에 많이 읽기는 했지만 가볍게 읽었던 것 같다. 아마도 당시에는 이야기, 스토리를 따라가는 데에 집중했을 거다. 문학의 의미는커녕 작품에 담긴 역사적, 사회적, 철학적 배경은 생각할 수준은 되지 못했다. 대학교 때는 사회과학 책을, 사회에 나와서는 경제경영 책을, 때로는 자기계발서를 찾아서 읽었다. 사는데 필요한 실용 지식을 책에서 찾으려 했다.

그러던 약 10년 전쯤 문학책을 다시 찾게 되었다. 간간이 읽던 경제경영이나 자기계발서가 어느 날부터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사회과학책도 다시 꺼내 들었지만 마찬가지였다. 눈은 책을 향해 있었지만, 머리에는 다른 생각이 떠오르다가 또 다른 생각이 날개를 달곤 했다. 몸과 마음이 많이 지쳤던 시절이었다.

우연히 팟캐스트 ‘김영하의 책 읽는 시간’을 듣게 되었다. 소설가의 낮은 목소리가 나를 다시 소설책을 찾도록 자극했다. 처음에는 김영하가 읽어준 작품들을 읽었다. 그러다 그 소설을 쓴 작가의 다른 작품도 찾아서 읽었다. 읽다 보니 문학의 재미에 빠졌다.

소설은 이야기, 스토리가 중요하지만 그게 다가 아니었다. 그 안에 세상이 있었고, 역사를 은유하고 있었고, 철학을 담고 있었다. 평론가나 다른 독자들의 해석도 중요했지만, 나의 성찰도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나만의 해석을 쌓아갔다. 몸과 마음도 회복이 되어갔다.

한 번 읽고 마는 소설도 있었지만, 다시 펼쳐 보게 되는 소설도 있었다. 좋은 영화는 여러 번 봐도 좋듯이 책도 그랬다. 영화를 여러 번 보면 전에는 안 보였던 장면과 장치가 보이기 마련이다. 소설이 그렇다. 처음 읽을 때는 이야기 흐름에 집중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두 번, 세 번 읽을 때는 작가가 숨겨놓은 복선과 장치도 찾아낼 수 있다.

'영화 '눈먼자들의 도시'의 한 장면.남편을 지키기 위해 눈먼 자처럼 행동하지만 앞을 볼 수 있는 여인 줄리안 무어.사진=네이버영화
'영화 '눈먼자들의 도시'의 한 장면.남편을 지키기 위해 눈먼 자처럼 행동하지만 앞을 볼 수 있는 여인 줄리안 무어.사진=네이버영화

 

볼 수는 있지만 보지 않는 눈먼 사람들

다시 읽으면 독자로서 느끼는 감상과 해석이 달라지기도 한다. 이번에 다시 읽은 책이 그런 경우였다.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포르투갈의 소설가 ‘주제 사라마구’가 쓴 ‘눈먼 자들의 도시’가 그랬다.

책 뒤에 실린 해설을 쓴 부산외대 김용재 교수는 “조세 사라마구의 작품들은 문장 부호가 무시된 채 격류가 흐르는 듯한 문체로 현실과 비현실을 넘나들며 역사와 전통을 새롭게 해석하고 현대 사회에서 잃어가는 인간의 정체성을 추구하는 작업을 통해 삶과 세계에 새로운 의미를 부각시켰다”고 평가했다.

김 교수의 말대로 ‘눈먼 자들의 도시’에는 문장 부호라고는 쉼표와 마침표밖에 없다. 지문은 물론 모든 대화를 ‘따옴표’ 없이 표현했다. 집중하지 않으면 그 문장이 대사인지, 대사라면 누구 것인지, 아니면 독백인지, 생각인지 헷갈린다. 그렇게 휘몰아친다. 호흡을 놓칠까 봐 계속 읽게 만든다.

소설은 자동차 운전석에 앉아 신호가 바뀌기를 기다리던 사내가 갑자기 눈이 머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런데 사내와 접한 사람들은 물론 도시 전체로 원인 모를 실명이 퍼져간다. 당국은 이를 전염병으로 판단하고 실명자들을 폐쇄 시설에 수용한다. 아직 눈이 멀지 않은 그들의 가족들도 보균자라며 함께 가둬버린다.

 

“그것은 그들이 해줄 수 있는 최소한의 일, 입증된 것이건 예측할 수 있는 것이건 어떤 역경과 마주했을 때 누가 그의 친구인지 확인해 주는 일이었다.” (149쪽)

 

원인 모를 실명이라는 불가항력의 재난은 인간성의 다양한 국면을 보여준다. 감시하는 군인들은 실체를 모르는 공포 때문에 차단선을 넘은 수용자들을 사살한다. 눈이 먼 수용자들도 점점 먹고 싸는 기본적 욕구에만 충실하며 질서를 잃어간다.

그런 수용자 중 단 한 명, 눈이 멀지 않은 사람이 있었다. 남편 곁에 머물기 위해 실명을 가장한 안과의사의 아내다. 그녀는 익명의 도시가 아수라로 변해가는 과정을 관찰하고 체험한다. 그리고 모순과 불의에 맞서 스스로 인간의 존귀함을 지켜내는 역할을 한다.

 

“우리는 모욕의 모든 단계를 내려갔죠. 그걸 다 내려가서 마침내 완전한 타락에 이르렀어요. (중략) 눈먼 것이 드물 일이었을 때 우리는 늘 선과 악을 알고 행동했어요, 무엇이 옳으냐 무엇이 그르냐 하는 것은 그저 우리와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를 이해하는 서로 다른 방식일 뿐이에요, 우리가 우리 자신과 맺는 관계가 아니고요, 우리는 우리 자신을 믿지 말아야 해요. (중략) 우리 내부에는 이름이 없는 뭔가가 있어요, 그 뭔가가 바로 우리예요.” (387~388쪽)

 

눈먼 자들 가운데 그녀만이 앞을 볼 수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소설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을 잃었을 때야 비로소 가지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된다는 사실을 날카롭게 풍자한다.

 

“나는 우리가 눈이 멀었다가 다시 보게 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나는 우리가 처음부터 눈이 멀었고, 지금도 눈이 멀었다고 생각해요. 눈은 멀었지만 본다는 건가. 볼 수는 있지만 보지 않는 눈먼 사람들이라는 거죠.” (461쪽)

 

포르투갈 작가가 쓴 작품이지만 소설의 배경이 포르투갈이라고 느껴지지는 않았다. 묘사된 도시가, 정부와 행정이 어디엔가 있을 법한 나라의 한 도시라는 생각이 들었다. 시대를 은유하는 기기가 나오지도 않았다. 하지만 지금이라도, 혹은 머지않은 미래에 그런 일이 벌어질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눈 먼 자들의 도시', '수도원의 비망록' 등 국내에서도 유명한 작가 '주제 사라마구'.지난 2010년 타계했다. 사진=연합뉴스
'눈 먼 자들의 도시', '수도원의 비망록' 등 국내에서도 유명한 작가 '주제 사라마구'.지난 2010년 타계했다. 사진=연합뉴스

 

눈먼 자들을 소리로 지배하려는 원래 눈멀었던 자들

이 책을 이번에 다시 읽은 배경은 예전에 내가 느꼈던 감상과 다를 것이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역시 그랬다. 예전에 읽었을 때는 작품의 상황이 나의 상황과 겹쳐졌었다. 내가 눈먼 자들과 뭐가 다를까 하는. 덕분에 눈을 제대로 떠야겠다는 생각을 했었고, 이후에 가끔 생각나던 작품이었다.

그런데 몇 달 전부터 자꾸 떠오르는 거였다. 왜 그럴까 되묻다가 지난주에 다시 읽었다. 이번에는 세상 상황과 겹쳐져서 읽혔다. 대한민국은 어쩌면 눈먼 자들의 세상이 아닐까 하는. 눈먼 사람이 많아지니까 그들이 중심이 되고, 함께 눈멀어 가는 세상. 눈먼 게 정상인 세상.

소설은 눈이 멀어서 수용된 신분이지만, 힘을 가진 무리가 약한 무리를 착취하는 상황이 나온다. 그 후 온 도시가 눈이 멀자 힘의 논리로 약탈을 하고 약한 무리를 부리는 장면도 나온다. 그 중심에 원래 눈멀었던 자가 있었다. 원래부터 눈이 보이지 않던 사람이 눈먼 자들을 이끄는 거였다.

 

“오래 전에 눈이 먼 사람은 방금 눈이 먼 사람들과는 다르다. 그는 그의 몸무게만큼의 금에 해당하는 가치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207쪽)

 

눈먼 사람들을 이끄는 원래부터 눈먼 사람들. 지금 우리 모습을 보는 거 같았다. 그런 면에서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보는 것도 눈먼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보기 싫은 것은 보려 하지 않는. 그러다 눈이 먼 그런 모습들.

갑자기 눈먼다면 소리에 의지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인지 원래부터 눈먼 사람들 기세가 등등하다. 자기가 길을 잘 안다고, 자기만 따라오라고 소리높여 외친다. 모두가 눈멀어 가니까 함께 눈먼 척해야 할까. 눈을 감는 게 옳은 것인지, 뜨고 있는 게 옳은 것인지 헷갈리게 만드는 세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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