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대호의 책이야기] 『총,균,쇠』의 재레드 다이아몬드가 연구한 일본인의 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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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대호의 책이야기] 『총,균,쇠』의 재레드 다이아몬드가 연구한 일본인의 뿌리
  • 강대호 북칼럼니스트
  • 승인 2019.08.10 10:30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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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레드 다이아몬드의 '총,균,쇠' 증보판에 수록된 '일본인은 어디에서 왔는가'를 읽고
퓰리처 수상자이자 문명발달사 분야 세계적 권위자가 파헤친 일본인의 뿌리는 무엇인가
인류의 역사와 문명을 분석하는 데 있어 흥미롭고 의미있는 관점 제시
재레드 다이아몬드의 '총,균,쇠'. 문학사상사 펴냄
재레드 다이아몬드의 '총,균,쇠'. 문학사상사 펴냄

 

[오피니언뉴스=강대호 북칼럼니스트] 북한과 일본이 축구 시합을 하면 누구를 응원해야 하는지 망설인 기억이 여러 번 있다. 70년대 어느 아시안 게임이었을 것이다. 초등학교 (당시는 국민학교) 같은 반 친구 중 그 누구도 북한을 응원한 친구는 없었다. 당시는 북한의 실상과 일본의 만행 모두를 비중 있게 배우던 시기였다. 어린 나이였지만 반공이 그 어떤 신념보다도 신성한 가치로 자리 잡았던 시기이기도 했다.

머리가 커지면서 역사에 대한 다양한 시각을 보게 되었다. 사상과 민족에 대한 생각도 바뀌게 되었다. 2000년대 이후 월드컵 아시아 지역 예선에서 일본과 북한이 여러 번 만났다. 당시에 북한이 일본을 꺾어주었으면 하는 분위기가 무르익었었다. 물론 북한이 싫어서 일본을 응원한 사람들도 있었다. 요즘 어떤 시각에 빗대어 보자면 북한을 응원한 그들은 모두 좌파였을까.

우리나라 사람들은 자라면서 일본을 싫어할 수밖에 없는 마음가짐을 자연스럽게 배운다. 어쩌면 그런 마음을 품고 태어날 수도 있다. 그렇다고 무조건 일본이 싫다고 하는 건 아니다. 그들이 뿜어내는 일부 정체성을 특히 싫어하는 거다. 한반도 발전에 이바지했다는 왜곡된 역사의식을, 동아시아는 물론 전 세계에 영향을 주려는 군국주의적 망상을 서슴없이 내비치는 그런 일본말이다.

일본의 어떤 이들 또한 우리나라를 싫어하는 기색을 숨김없이 드러낸다. 과거 은혜를 보답하지 않는 배은망덕한 민족이라고, 약속을 저버리는 믿을 수 없는 민족이라고, 뜨겁게 달아오르곤 재빨리 식어버리는 냄비 같은 민족이라고 조롱을 아끼지 않는다.

한국인 관점에서 보자면 그런 일본인에게서 어떤 ‘시샘’이 읽힌다. 시샘은 ‘자기보다 잘 되거나 나은 사람을 공연히 미워하고 싫어하는 마음’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굳이 예를 들자면, 어릴 때부터 자기를 따르던 동네 동생이 자기보다 키도 더 클 거 같고 힘도 세어질 거 같아서 불안한 동네 형과 같다고나 할까. 지금 일본은 그러기 전에 밟아주겠다는 지질한 동네 형과도 같은 모습을 보여준다. B급 영화에 나와도 욕먹을 삼류 건달 캐릭터이다.

이런 일본이 너무 싫어하는 게 있다. 싫어한다기보다 부정하고 싶은 걸 거다. 여기서 ‘부정’이란 ‘사실임에도 부인하게 되는 그런 마음’을 의미한다. 그것은 바로 그들 일본인의 조상이 우리 한국인이라는 거다. 일본에서 발견된 모든 사료가 그러하다고 진술하지만 아무도 (특히, 일본인 학자들은) 나서서 그렇다고 해석하지는 않는다고 한다.

하지만 일본이 부정하고픈 그 모든 사실에 근거가 확실하다고, 자료가 명확하다고 주장하는 학자가 있다. 게다가 세계적으로 권위가 있다는 저명한 학자다. 그가 그러하다고 쓴 책은 세계적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한국에서도 오래도록 사랑받는 책이 되었다. ‘재레드 다이아몬드’가 쓴 '총, 균, 쇠'가 바로 그 책이다.

 

재레드 다이아몬드.사진=worldwildlife.org
재레드 다이아몬드.사진=worldwildlife.org

 

도대체 일본인은 어디에서 왔을까

재레드 다이아몬드는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생리학 박사 학위를 받았고 현재 UCLA 교수로 있다. 그의 관심 분야는 진화생물학, 생물지리학 등 과학은 물론 인류학과 언어학 등 각종 인문사회과학도 망라한다. 그는 '총, 균, 쇠'를 내기 전에 인류 진화 과정을 분석한 '제3의 침팬지'로 세계적 명성을 얻었다. 그의 연구를 다른 학자가 인용하거나 비교하며 쓴 책도 많다.

저자는 이 책의 목적을 “지리적 조건이 지난 1만3000년간 전 세계인의 역사에 어떻게 영향을 끼쳤나를 밝히는 것”이라고 했다. 그는 책에서 오늘날 세계에 존재하는 문명 불평등의 원인을 생태지리학, 생태학, 유전학, 병리학, 문화인류학, 언어학 등의 접근을 통해 종합적으로 규명하였다.

또한, '총, 균, 쇠'는 인류 역사와 문명 분석에 흥미로운 관점을 제시한 공으로 ‘퓰리처상’을 수상하는 등 평단과 독자 모두로부터 선택을 받았다. 이런 호응에 힘입어 개정판에서는 초판 발행 이후에 연구한 내용을 추가했다. 특히 “일본인은 어디에서 왔는가”라는 논문을 포함했다.

논문에서는 인종학적, 역사적 자료를 통해서 일본 열도에 사는 사람들이 과연 어디에서 왔는지를 고찰한다. 또한, 일본어가 어디에 뿌리를 두는지도 밝힌다. 저자는 자기가 연구한 결과가 어쩌면 “일본인 학자들이 드러내고 싶어 하지 않고 일본인들이 알고 싶어 하지 않는 사실일 것”이라고 술회한다.

특히 고고학적으로 의미 있는 고대 일본 왕가 고분 조사를 금지하는 규정을 예로 들면서 일본의 시각을 설명한다. 일본인들이 극도로 신성시하는 일본 왕가의 선조가 신이 아니라 한국인이라고 밝혀질까 봐 우려하는 건 아니냐고.

 

“일본 고고학계가 냉철한 논쟁을 하기 힘든 이유는 과거에 대한 해석이 일본인의 현재 행동에 영향을 끼치기 때문이다. 동아시아 사람들 중 문화를 전달한 주체는 누구이며, 누가 문화적으로 우월한가, 미개한 야만인은 누구이며, 땅에 대한 역사적 당위를 내세울 수 있는 나라는 어디란 말인가?” (628쪽)

 

그렇다면 도대체 일본인은 어디에서 왔을까? 저자는 학계에 널리 퍼져있는 세 가지 학설을 나열한다.

첫째는, ‘조몬인’ (1만3000년 전 일본 열도에 살았던 수렵채집인)이 점차 일본인으로 진화했다는 학설이다.

둘째는 BC 400년경부터 한반도에서 이주한 한국인들이다. 당시에 우수한 농업기술과 문화 그리고 유전자를 가진 대규모 이주민이 일본 열도로 들어왔다는 학설이다. 이들이 ‘야요이 문화’의 주체가 되었다고 한다.

마지막은, BC 400년경부터 한반도에서 한국인들이 들어온 건 맞지만 대규모가 아니라 소수가 이주해 와서 차츰 인구가 많아졌다는 주장이다.

일본인들은 첫 번째 학설을 가장 좋아한다고 한다. 한국인과 아무 연계가 없는 독자적 계통이라서 믿고 싶어 한다고. 반면에 저자는 두 번째와 세 번째 학설에 힘을 싣는다.

저자가 진화생물학자로서 연구한 바에 따르면 고대 조몬인과 현대 일본인은 아무런 생물학적 관련이 없다고 단언한다. 오히려 조몬인은 지금은 거의 사라진 ‘아이누족’과 유사하다고 한다. 반면 야요이 시대 사람이 진화생물학적으로나 문화인류학적으로 현대 일본인의 조상이라고 저자는 확언한다. 모든 근거와 자료가 일관성 있게 진술한다고 설명한다.

저자는 언어학적으로도 가설을 제시한다. 언어학적 계통이 같음에도 한국어와 일본어가 유사성이 많지 않은 이유를 파고든다. 한글의 구조와 역사에도 조예가 깊은 그는 일본어의 기원을 역사에서 찾는다.

 

“현대 한국어는 삼국을 통일한 신라의 언어에서 유래한 것이지만 신라는 일본과 그다지 긴밀한 관계를 맺지 않았다. 한국의 초기 연대기를 보면 삼국은 서로 다른 언어를 사용했다. 신라에 복속된 고구려와 백제의 언어는 후세에 거의 알려지지 않았지만, 일부 전해지는 고구려어 단어들을 보면, 현대 한국어보다 오히려 옛 일본어의 그것과 더욱 유사하다.” (654쪽)

 

일본인들은 “일본어와 일본의 문화가 너무도 독특해서 세계의 어떤 나라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복잡한 발전 과정을 밟아왔다”고 자부한다고 한다. 그래서 저자는 “일본어가 다른 언어와 관련이 있다고 인정하는 건 곧 문화적 정체성의 함락으로 여긴다”고 본다.

 

후손들에게 부끄럽지 않으려면 지금이라도  

저자는 일본이 싫어할 만한 내용을 책에 많이 담았다. 그래서 한국에서 출판된 책에만 수록되었나 했지만, 영문판은 물론 일본에서도 그렇게 출판되었다. '총, 균, 쇠'는 인류 문명 흐름에 대한 시각을 갖게 했고 일본이 한국을 껄끄러워하는 어떤 이면을 들여다보게도 했다.

불편한 이웃과 딱 붙어사는 느낌이 이와 같을까. 시끄럽고 냄새나고 무엇보다 그 사람이 너무 싫은, 항의하면 오히려 자기에게 맞추라고 고함치는 이웃. 그런데 그렇게 안 하면 더 시끄럽게 할 거라고, 더 냄새나게 할 거라고도 위협하는 이웃. 그런 이웃이 진짜로 가까이 있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공권력에 도움을 청하면 어떨까. 꿈도 꾸지 말자 아무 도움이 안 될 게 뻔하니까. 실제로도 그러하니까. 그렇다면 그냥 눌린 채로 지내야 하나. 상상하기도 싫다. 그럼 적당히 타협하면 어떻게 될까. 당분간은 조용해지겠지. 하지만 적당히 타협한 모습이 우스워 보이겠지. 그러다가 더 무거운 조건을 짊어지라 하겠지.

그때도 타협할 건가. 윗세대가 적당히 타협한 결과가 지금 우리가 마주한 현실이다. 그들은 세상 편했겠지만, 지금을 사는 우리가 그 뒤치다꺼리를 해야 한다. 미래는 어쩌면 우리가 얼굴도 모르는 후손들이 살아갈 오늘이다. 우리가 살지 않을 미래라고 얼굴도 모를 후손들이 살아갈 오늘을 나 몰라라 하는 선조가 될 건가. 정녕 후손들에게 선조들을 부끄러워하게 할 건가.

그것도 아니라면 힘을 기를 건가. 모든 징후에서 힘을 기르라는 신호를 보내고 있는데. 너무 대들지 말고 머리 숙이자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을 보는 내가 괜히 부끄러워서 얼굴이 뜨거워진다. 얼굴도 모르는 그들의 후손들은 얼마나 부끄러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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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정욱 2019-08-13 16:45:31
옳은 말씀이십니다
일본의 문화, 기술의 수준은 매우 높습니다만,
일본이란 나라는 존경할 수 없고 인정하고 싶지 않게 만드는 나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