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 가야의 배가 일본을 지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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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 가야의 배가 일본을 지배했다
  • 김인영 발행인
  • 승인 2015.09.18 18:3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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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가 오사카 난바에 식민해 선박 기술을 전수

일본 제2도시 오사카의 중심지는 난바(難波)라는 곳이다. 그곳의 지명은 백제와 가야 사람들이 대한해협과 세토 내해의 ‘험한 파도(難波)’를 헤치고 도착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고 해서 만들어진 이름이라고 한다.

난바에서 멀지않은 곳에 임진왜란의 주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건축했다는 오사카 성이 있고, 그 옆에 오사카 박물관이 있다. 오사카 박물관에는 다카마와리 1호와 2호 고분에서 발견된 선형 하니와(토기)의 모형이 전시돼 있다. 그중 2호 고분의 모형은 선수와 선미가 상하 2단으로 분리된 구조선의 모양을 하고 있다. 선수 부분은 물고기가 입을 딱 벌리고 있는 모양으로 파져 있다.

 

한국과 일본의 배 모양 토기가 비슷하다

9월초 오사카 박물관을 방문하면서 다카마와리 2호분 고분의 고대선 모형을 보고 많은 궁금증을 가졌다. 왜 배를 이중구조로 했으며, 선수(이물)에 입을 벌린 모양의 공간을 만들었을까.

오사카 박물관측 설명은 4세기말엽의 선박이라고 한다. 당시엔 ‘일본(日本)’이라는 국호를 채택하지 않고 ‘왜(倭)’라는 나라이름을 쓰고 있을 때다. 정확히 표현하면 왜선(倭船)인 셈이다.

궁금증을 뒤로 하고, 서울로 돌아와 일상을 보내고 있는데, 서울의 호림박물관에 보관된 고대 토기 가운데 일본 다카마와리 고분의 그것과 비슷한 것이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해양탐험가 이효웅씨가 전해준 정보였다.

호림미술관에 소장된 주형토기(舟形土器)는 통나무 속을 파내 만든 배모양의 토기로, 항해용 배를 사실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토기의 높이는 11.5cm, 길이 18.0cm, 최대폭 10,1cm다. 배 바닥은 깊고, 단면은 삼각형에 가까운 형태를 띠고 있다.

▲ 고대 철교역로. 김해 금관가야가 중심항이고, 오사카까지 연결돼 있다.

놀라운 사실은 배의 아랫 부분에 물고기가 입을 벌린 형상으로 파여있다는 점이다. 오사카 박물관에 전시된 다카마와리 2호 고분의 선박 모형도와 비슷하다. 전문가들은 호림박물관의 주형토기는 후기 가야 즉 5세기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했다. 만들어진 시기도 비슷하다.

굳이 차이점이 있다면 오사카의 것은 이물과 고물이 평평하고, 호림박물관의 것은 뾰족하다. 좌우에 노를 거는 장치가 톱니모양으로 마련돼 있는데, 호림박물관의 토기엔 6개인데, 오사카박물관의 것엔 4개다.

전문가들은 주형토기는 신라와 가야의 고분에서 흔히 발견되는데, 호림박물관의 토기는 가야의 것으로 추정했다.

이 궁금증을 해결하기 위해 김해시청에 근무하는 송원영 학예연구사(박물관 운영담당)와 통화를 했다.

–  오사카 박물관에 전시된 선박과 국내 호림박물관의 선박이 같은 것인가요.

▲ 완전하게 같지는 않다. 하지만 전체적으로는 같은 것이라고 볼수 있다. 한국의 것은 이물과 고물이 예각인데 비해 일본의 것은 예각이 아니다.

– 선체를 이중으로 한 이유는?

▲ 파도를 헤쳐가기 쉽게 하기 위해서인 것 같다. 배 측면에서 파도가 칠 때 공간이 있어 물이 빠져나가고, 힘을 덜 받게 된다. 상하가 분리된 부분에서 말뚝을 박에 정박하기 쉽게 하려는 목적도 있는 것 같다.

▲ 윗 것은 서울 호림미술관의 주형토기. 아랫것은 일본 다카마와리 2호고분에서 출토된 선형토기. 선수에 입을 벌린 모양을 한 점에서 닮았다.

가야의 배와 왜선이 모양에서 비슷하다는 점에서 하나의 추론이 가능하다. 고대에도 가야의 본거지인 경남 김해와 오사카의 긴 뱃길이 열려 있었고, 가야가 이 뱃길의 해상무역을 장악했다는 얘기다.

 

가야는 철(鐵)을 수출하는 무역대국이었다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는 이런 문구가 있다.

“國出鐵, 韓·濊·倭皆從取之” (나라에서 철이 생산되는데, 삼한과 예, 왜가 모두 이를 가져다 썼다)

여기서 나라는 가야를 말한다. 삼한은 진한·변한·마한이고, 예(濊)는 강릉, 삼척 일대의 부족국가를 말한다. 즉, 가야에서 생산된 철이 평양 인근의 낙랑군, 황해도 일대의 대방군, 한반도 남쪽의 삼한 부족, 동해안 부족은 물론 멀리 일본까지 수출됐다는 뜻이다. 가야는 철의 왕국이자, 무역대국이었다.

이 사서는 진(晉)나라의 학자 진수(陳壽:233∼297)가 편찬한 것으로, 위·촉·오의 중국 삼국시대 정사로 통한다. 글 쓴 시점이 3세기이므로, 가야의 철 수출은 한국과 일본에서 발견된 배 모양의 토기가 만들어지기 이전부터 시작됐다.

그렇다면 호림박물관의 주형토기는 가야가 철을 수출하는 무역선이고, 오사카의 선박모형은 왜(倭)가 가야에서 선박 건조 기술을 배워 배를 지은 다음, 가야의 철을 수입하던 선박이라고 추정할수 있다.

재미있는 사실은 2012년 6월에 경남 김해에서 고대 선박의 흔적이 발견됐는데, 목재의 재질이 일본의 것이라는 점이다.

▲ 김해 봉황동에서 출토된 선박 부재.

김해시청의 자료를 보면, 김해시 봉황동 119-1번지 연립주택 신축부지 발굴조사 현장에서 선박부재가 출토됐는데, 보존처리 결과 가야의 배로 밝혀졌으며, 발굴현장에서는 선박부재와 노, 닻으로 추정되는 돌 한점도 발견됐다. 가야가 고대 해상왕국이었음이 실물로 입증된 것이다.

보존처리를 한 결과, 선박부재는 길이 390cm, 폭 32~60cm, 두께 2~3cm의 대형목재 유물로서 앞면에는 일부 문양과 쐐기 및 쐐기홈이 존재하고 한쪽 끝 부분은 다른 부재와 결합할 수 있도록 가공되어 있었다.

재질을 분석해 보니, 선박에 사용된 나무는 녹나무와 삼나무로 밝혀졌다. 녹나무는 난대성 수종으로 중국과 일본에 많이 자라고, 우리나라는 남해안 일부 지역과 제주도에서 생장하고 있다. 또한 삼나무는 일본 고유 수종으로 일본의 선박건조에 흔히 이용되는 수종이다. 따라서 봉황동 출토 선박은 일본에서 건조됐을 가능성이 있다고 한다.

즉 왜에는 백제인이 진출하기 앞서 가야인이 먼저 진출했고, 선박 건조 기술이 뛰어난 가야인들이 왜에서 재질이 우수한 삼나무 또는 녹나무를 활용해 배를 지어 운항했다고 볼수 있다.

김해시 봉황동 출토 선박에 앞서 경남 창녕 비봉리 유적에서 우리나라 최고(最古)의 배 2척이 발굴됐다. 소나무의 속을 U자형으로 들어내 만든 이배는 길이 4m, 폭 62cm의 카누형 배였다. 7,000~8,000년전 신석기시대의 선박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봉황동 선북부재는 국내에서 출토된 유물 가운데 2번째로 오래된 배인 셈이다. 방사선 탄소연대 측정을 해보니 3~4세기로 파악됐다. 파편이 극히 일부분이어서 배의 실체를 파악하는데 어려움이 있지만, 비슷한 시기에 김해에서 왜계 유물이 출토된다는 점에서 봉황동 선박부재는 김해일대가 가야의 무역항구 유적임을 밝히는데 중요한 연구자료가 되고 있다.

한국과 일본에서 출토된 배 모양의 두 토기는 모두 고분에서 나왔다. 고대인들은 사람이 죽으면 저승으로 가는 강을 건넌다고 믿었다. 이때 죽은 사람의 영혼을 싣고 편안히 강을 건너라는 의미로 배 모양의 토기를 무덤에 넣어 주었다. 한국과 일본에서 발견된 토기는 모두 당대 최고 실력자의 무덤에서 출퇴된 것으로 추정되므로, 그당시 최고 성능의 배 모형이 매장됐을 것이다. 주인들은 배를 타고 저승을 편하게 갔는지는 모르겠지만, 토기는 무덤에서 나와 고대사의 비밀을 풀어주고 있는 것이다.

이쯤해서 결론을 내보자.

경남 김해에 본거지를 둔 가야, 구체적으로 금관국이 한반도 해상과 일본 해상을 장악한 무역 중심항이었다. 무역품은 당대에 최고의 상품인 철(鐵). 가야인들은 험한 파도(難波)를 헤치고 오사카를 개척해 식민했고, 그곳에서 왜(倭)의 자재를 활용해서 선박을 만들었다.

 

식민도시였던 일본에 비해 역사 연구와 홍보가 뒤떨어진 현실

아쉬운 점은 일본은 오래전부터 다카마와리 2호고분의 선형토기를 실제모양으로 만들어 기념하고 있는데, 당대에 기술을 전수했고 지금은 세계 조선1위국이라고 자랑하는 한국에선 고대선박에 대한 연구가 크게 부족하다는 사실이다.

▲ 일본이 다카마와리 2호 고분의 토기를 실제모형으로 건조한 나미하야호.

16년전인 1989년 오사카시는 고대 한일간의 뱃길을 재현해보기 위해 고대 목선을 복원한 통나무배 나미하야호를 건조해 탐험대를 부산항에 보냈다. 오사카시가 市制 실시 1백주년을 맞아 1,500년전부터 한반도와 일본 간에 문화교류가 있었다는 사실을 실증하기 위해 마련한 행사였다. 항해실험에 쓰인 나미하야호는 지난해 오사카 동남쪽에 있는 다카마와리 2호 고분에서 출토된 배모양 토기를 본떠 만든 것이다. 길이 12m, 폭 1.93m, 높이 3m, 무게 약 4톤으로 8명이 노를 젖게 돼 있다. 나미하야호가 부산항에 도착한후 김해시청으로 가 고대선 실험항해를 기념하고 가야와 일본의 문화교류를 규명하기 위한 국제학술강연회가 열었다. 당대에 한일 항로의 중심지였던 김해시는 식민도시의 행사에 들러리를 선 셈이다.

▲ 나미하야호의 사진을 실은 1989년 7월 31일자 동아일보 기사.

역사는 우리가 깊은데, 역사에 대한 연구와 홍보는 일본에 뒤져도 한참 뒤져있다. 속상한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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