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 맛보기 단동] ⑭'통-통 라인'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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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 맛보기 단동] ⑭'통-통 라인'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
  • 필명 이 강 단동 통신원
  • 승인 2019.08.03 1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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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측이 선호했던 정부간 교류방식 '통-통라인'
5.24조치후 유일 통로되다시피...경직되고, 부작용도 나타나
민간교류 방식으로 정상화되려면 5.24조치 조속 해제해야

[오피니언뉴스=필명 이 강 단동통신원] 얼마전 K는 '강건너(단동에서는 북한을 '강건너' 라고도 표현한다)'의 오랜 지기로부터 '통-통 라인'에 대한 이야기를 듣습니다.

소위 '통-통 라인'이라는 말은 북측의 통전부와 남측의 통일부를 잇는 연락관계나 접촉, 만남의 시스템과 이를 둘러싼 무형적 구조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저 북측이나 남측이나 양측을 왔다 갔다 하는 사람들 속에서 통용되었던 일종의 줄임말이었던 모양입니다.

南의 통일부, 北의 통전부 '통-통 라인'

남측의 통일부는 그 전의 통일원으로부터 1998년도에 한 단계 격상된 정식 부처의 위상으로 오늘날까지 존재해 왔습니다. 북측의 통일전선부는 북한 노동당의 한 기구로 역시 주로 남측에 대한 교류, 회담 등을 주관하는 기관입니다.

다만 북측의 통전부 성립의 애초 목표가 남측의 사회주의혁명을 도모한다는 점에서 남측의 통일부와는 약간 성격이 다를 수도 있습니다. 오늘의 현실에서 양측의 통,통이 표면적으로나마 같은 기능을 수행하고 있고 양측의 부서 사이에서 무언가가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통-통 라인이라는 말이 나왔으리라 봅니다.

북측의  민경련(민족경제협력연합회)과 민화협(민족화해협의회), 그리고 아태(아시아태평양위원회)와 같이 남측을 전담하는 기구도 당 지도의 원칙에 의거, 통전부의 지도와 지시를 받는다고 보아야 합니다.

K의 '강건너' 지기는 한잔 얼큰한 저녁 자리에서 이 '통-통 라인'의 페혜를 주장했습니다. K는 내심 많이 놀랐습니다. 왜냐하면 소위 민경련과 민화협 등으로 대표되는 북측의 '통-통 라인'은 남북교류 초기에 어쩌면 북측의 주장이 더 많이 반영된 구조이기 때문입니다. 더 놀란 점은 이 '강 건너' 친구 자신도 한 때 이 '통-통 라인'의 실무 책임자이었기 때문입니다.

 

남북 교류를 위해 단동을 오가는 남과 북, 조선족의 사람들이 자주 이용하는 단동의 식당. 사진= 필명 이 강
남북 교류를 위해 단동을 오가는 남과 북, 조선족의 사람들이 자주 이용하는 단동의 식당. 사진= 필명 이 강

북이 선호했던 '통-통라인' 방식, 관료적 경직성 나타나 

오늘날 북측의 입장에서 남북교류의 방식으로 '만인 대 만인'의 만남은 결코 좋은 방식이 아닙니다. 소비에트 연방의 붕괴로 야기된 국제 사회주의 분업체계의 급속한 붕괴와 이의 강력한 여파로 급속히 추락한 북측의 경제가 고난의 행군시기를 경유하는 즈음에 남북교류도 확대되고 있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남북교류가 한창 진행되는 시점에서는 남과 북 양측의 경제수준의 운동장이 이미 많이 기울어진 상태이었다는 것입니다.

교류의 전면적 확대는 이미 기울어진 경사 각 만큼 한쪽으로의 쏠림 현상을 결과할 수도 있고, 그 쏠림은 다른 한 쪽 측면의 약점이 두드러지게 노출되는 부작용을 초래할 것입니다. 따라서 북측의 입장에서 남측과의 교류는 통제되고 절제된 형식을 가지고 진행되어야 했습니다. 이 원칙은 당연 현시점에도 적용되는 것이고 당분간은 유지될 전망입니다.

남측의 모든 NGO, 학술단체 등의 비경제적인 민간 활동은 북측의 민화협을 창구로 해 일을 진행해야 합니다. 또한 경제적 교역은 반드시 북측의 민경련을 경유해 일을 하게 되는 것이 현실이고 남과 북 사이에 정해놓은 규칙입니다. 자유무역과 제약이 적은 경제활동이 몸에 배인 한국의 비즈니스맨들에게는 잘 맞지 않은 틀이었습니다.

더구나 북측에서 남측으로 수입되는 상품은 우리 헌법상의 국토 내부의 일로 간주됨에 무관세 혜택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갖추어야할 조건과 서류도 많았습니다. 그래서 북측과의 교역은 다른 세계와 달리 매우 복잡해 보였습니다.

예를들어 민경련 신의주지사 발행의 '원산지 증명서', '국제화물운송증', 중국세관의 '과경화물 보관단(중국 경내를 경유하여 제3국으로 수출된다는 증명의 면장)', '대외상품검사서' 등의 서류를 적시에 발급받아 손에 쥐는 일이 남북교역에 있어 매우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농, 수산물과 식품의 경우에는 반드시 남포-인천의 직항로 선적을 해야 북한산을 인정받았습니다.

이런 복잡한 남북교역의 절차와 형식에 대해 그 불만을 제기하고 개선을 요구했던 이들은 남측의 교역 당사자들, '자유주의 비즈니스맨들' 이었습니다. 그들은 당연히, 북측의 기관들과는 맞서는 대신 남측의 통일부에 이런 절차와 형식의 불편함, 관료주의적 측면에 대해 지적했습니다.

하지만 5.24 조치로 남북교역이 중단되기까지 어떤 의미 있는 변화도 만들어지지 않았습니다. 북측의 원칙 고수가 분명했고 이 주제에 관해 남측의 '통'이 북측의 '통'을 설득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 대남창구의 실무자로 일했던 친구가 이 '통-통 라인'이 문제가 있다고 지적하는 데에 K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남북교역, '통-통 라인' 대신 '당사자간 교류'로 전환해야

그는 '통-통 라인' 일변도의 남북교역은 문제가 있어 향후는 실제적인 당사자들 간의 교류로 전환되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런데 이 부분을 남측이 북측의 통라인에 꾸준히 문제 제기해야 한다고 합니다. 그 변화를  굳이 북측 스스로 주도하는 것은 명분상 맞지 않다고 합니다.

다른 측면으로 이 '통-통라인'의 구조가 애초 북측의 주장이 많이 반영된 구조인데 북이 먼저 나서서 철회자고 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이에 불편함을 느끼고 있는 교역의 상대방이 문제제기를 함으로써 이를 북이 검토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요즘 들어 이 친구가 말하듯이 북의 대남기구들이 지나치게 '굳었다'는 느낌이 있습니다. 굳었다는 것은 대체적으로 '관료적'이란 말 대신의 표현으로서, 가능한 움직이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창구가 창구로서의 본래의 임무에 따라 실무단위와 연결하는 일에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지나치게 정치적인 판단만 하고 있어 될 일도 안 된다는 얘깁니다. 

만약에 실무단위로 남북교류의 일이 떨어졌을 때는 자기 조직의 이익을 위해서는 다소간의 정치적 부담이 있더라도 일을 추진할 수도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래야 남북교역이 내용적으로 실질적인 발전을 이룰 수 있다는 것입니다.

K는 내심 박수를 치고 있었습니다. 물론 K의  이 친구가 북측 내부의 다수 의견을 반영하고 있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의견이 개진되고 있는 것은 서로를 위해 고무적인 일이며 우리에게 분명한 시사점을 던지고 있습니다. 남측의 교역 주체들이 이 관점을 참고하고 유념해야 될 대목입니다.

5.24조치가 내려지게 된 계기는 천안함 피격사건이다. 5.24조치 해제가 된다면 남북 교류가 정부대 정부가 아닌, 민간 당사자끼리 접촉으로 유연화, 다양화할 것이라는 점에서 기대가 크다. 사진= 연합뉴스
5.24조치가 내려지게 된 계기는 천안함 피격사건이다. 5.24조치 해제가 된다면 남북 교류가 정부대 정부가 아닌, 민간 당사자끼리 접촉으로 유연화, 다양화할 것이라는 점에서 기대가 크다. 사진= 연합뉴스

5· 24조치 해제로 남북교역 방식도 바꾸자 

국제적인 정세를 가장 민감하게 반영하는 것이 남북교류의 진행입니다. 그게 현실입니다. 하지만 이와는 별도로 과거의 시스템들이 우리 스스로의 발목을 잡고 있는 부분은 없는가도 돌아봐야 합니다. 이 지점에서 K는 다시 한 번 '5.24 조치 해제의 의미'를 생각해 봅니다.

정부 대 정부, '통-통 라인'이 만들어 낸 구조물은 허물기가 쉽지 않습니다. 크고 단단한 구조물이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거꾸로 이 딱딱한 구조가 자유롭고 합리적인 민간의 남북교역을 구속할 수 있었음을 보았습니다.

하지만 좀 더 실무적이고 좀 더 민간적인 다양하고 조그만 구조물들은 스스로 그 해체와 건설을 반복하면서 만족할 만한 방향으로 전진해 갈 것입니다. 현재 시점에서 비록 선언에 불과하고 실제적인 조치가 안 되더라도 우리 스스로를 묶어놓았던 5.24 조치의 해제를 생각해야할 때인 것 같습니다.

● 이 강`(필명)은 2000년대 초반부터 단동에 정착, 다양한 대북사업을 진행했다. 본인 사정상 필명을 쓰기로 했으며, 사진도 싣지 않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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