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예선의 벤허처럼 눈에 불을 켜야만 나는 사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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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예선의 벤허처럼 눈에 불을 켜야만 나는 사는 것이었다”
  • 하종오 편집인
  • 승인 2015.09.15 1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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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다 그리고 쓰다 – 김윤식 저서 특별전’을 보고… 한국현대문학관서 12월11일까지 열려

1936년생이니 올해 우리 나이로 팔십, 산수(傘壽)가 되었다. 한국문학의 기념비적 저서가 된 ‘한국근대문예비평사연구’를 1973년 출판한 것을 시작으로 지금까지 단독 저서만 147종을 썼다. 원고지로 계산하면 10만 장을 웃도는 분량이다. 단독 저서 외에 공저서 13종, 편저서 28종, 번역서 6종, 편·감수서 7종 등을 합하면 저서가 200여 종에 이른다. 범인으로서는 상상하기 힘든 글쓰기의 결과다.

 

▲ 김윤식은 "나는 발바닥으로 글 쓰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철저한 실증주의적 태도다.

 

글쓰기의 양만 놀라운 것이 아니다. 그는 스스로를 “발바닥으로 글 쓰는 사람”이라고 했다. 도서관 구석에 먼지 켜켜이 쌓인 채 숨은 신문과 잡지 등의 자료, 국내외를 막론한 현장 답사, 그리고 매일 혹은 매달 발표되는 신작을 거의 한 편도 빠짐없이 찾아 읽는 ‘현장비평’으로 쓰는 사람이다. 그의 한 권 한 권의 책이 그런 철저한 실증적 연구의 소산이다. 일본에서 지난 2011년 동아시아 여러 나라의 20세기 중반 이후 간행된 인문서 가운데 명저와 문제작 100권을 가려 뽑아 해설한 ‘동아시아 인문서 100’이라는 책이 출간했다. 그의 첫 저서 ‘한국근대문예비평사연구’는 김구의 ‘백범일지’ 등과 더불어 그 100권에 포함됐다.

스스로의 글쓰기에 대한 생각을 드러낸 그의 말이 많지는 않지만, 기억나는 것이 두어 가지 있다. 하나는 “노예선의 벤허처럼 눈에 불을 켜야만 나는 사는 것이었다”라는 말이다. 1962년 그가 현대문학의 추천을 받고 평론가로 공식 등단하면서 쓴 천료소감에 나오는 말이다. “이것은 너 때문이었다. 내가 왜 문학을 하게 되었는지는 나도 잘 모르지만, 그러나, 이렇게 X자가 붙은 것을 하게 된 것은 바로 너 때문이었다. 빌려주지도 않은 돈을 달라고 떼쓰던 - 그런 심정을 아는가… 노예선의 벤허처럼 눈에 불을 켜야만 나는 사는 것이었다. 이것을 너는 내게 가르쳤다.”

또 하나는 그때로부터 40년이 지난 2001년 그가 서울대 교수 정년퇴임 고별강연에서 한 말이다. “비평가란 공동묘지의 묘지기 같은 존재”라는 말이다. 그는 강연에서 “저는 책이라는 시체에 몸을 빌려줬고, 공동묘지인 서재의 묘지기였을 뿐이지요. 단순히 책에 대한 해설자가 아닌 표현자가 되는 것, 비평을 예술의 단계로 끌어올리는 것이 저의 평생 소원입니다. 아직 제 소원을 이루지 못했으니 전 패배자인지도 모르겠습니다”라며 “내가 이룬 것들은 결코 내 것이 아닙니다”라고 말했다.

60년 외길 글쓰기 인생으로 한국근현대문학사 자체가 돼버인 그는 그렇게 자신을 겸양했다. 그는 문학평론가 김윤식이다.

 

▲ 60년 글쓰기 외길 인생의 고집이 엿보이는 김윤식의 얼굴이다.

 

60년간 하루 20장, 원고지 10만장 분량 147권의 단독 저서

서울 지하철3호선 동대입구역 1번 출구로 나와 조금만 걸어 올라가면 파라다이스 빌딩 뒤편에 숨은 듯이 ‘한국현대문학관’이 자리하고 있다.

이곳에서 지난 11일부터 ‘읽다 그리고 쓰다’라는 주제로 ‘김윤식 저서 특별전’이 열리고 있다. 12월11일까지 3개 월 동안 열린다.

김윤식의 단독 저서 147종을 비롯해, ‘이광수와 그의 시대’ 등 대표적 저서 저술 때 쓴 원고 뭉치, 손글씨로 깨알같이 눌러 쓴 독서 노트, 1980년 일본 도쿄대 등 유학을 가면서 쓴 연구계획서, 서재에서 집필 중인 그의 사진 등이 전시된 공간은 서책과 문필의 기운으로 가득하다.

전시장에 들어서면 ‘발바닥으로 쓰다’라는 구절을 커다랗게 인쇄해 놓은 전시물이 우선 눈길을 붙든다. 그는 하루 평균 원고지 20매씩 글을 썼다. 중노동 같은 글쓰기, 그는 어떻게 60년간 그것을 이어왔을까. 지난해 한 잡지에 그는 이런 글을 썼다. “하루 20매란 말하자면 내 글쓰기의 리듬 감각이었습니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나에게는 부적합했어요. 그러니까 하루 70매를 쓸 때는 사흘을 앓고, 또 하루 3매밖에 쓰지 못할 때도 사흘을 앓았습니다. 이렇게 해서 20매의 분량이 나의 리듬 감각이라는 것을 알았는데, 지금은 암만해도 그렇게 할 수 없지만 그때는 그렇게 해서 몇 달씩이라도 지속할 수 있었어요. 지금은 하루에 10매씩을 쓰지요.”

 

▲ 김윤식의 단독 저서 147종은 언제나 시대를 앞서 나간 기록이기도 하다.

 

시집 간 누나가 준 교과서에서 문학과 만난 1940년대부터 연필로 습작소설을 쓰는 문학청년이던 1960년대, 그리고 식민사관에 맞서 한국문학의 근대성을 파고 들던 1970년대, 이념의 소용돌이 시대였던 1980년대, 역사가 종언을 고한 탈근대의 폐허였던 1990년대 이후까지, 연대별로 그와 관련된 자료가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이란 주제로 정리돼 있다.

김윤식이 ‘광장’과 ‘회색인’의 작가 최인훈과 각별한 사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최인훈의 소설 속에 그가 등장했다는 것은 이 전시장에서 처음 알게 된 사실이다. 최인훈의 1976년 작 소설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에 나오는 평론가 ‘김공론’이 김윤식이라는 것이다. 소설에는 주인공 구보가 김공론의 방으로 찾아가 월북 작가들의 작품에 관한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 나온다. 당시가 1970년대 중반, 유신 시절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김윤식의 시대를 앞서간 치열한 고민과 해답 찾기의 자세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억압의 시대에 맞서는 지식인들의 모습이 인상적이기도 하다. 소설을 잠깐 인용해 본다.

[… “그런데 말이야.” 김공론씨는 좀 정색을 하고 말했다. “월북 작가들 작품 말이야.” “응.” “이런 기회에 어떻게 안 될까.” “해방 전 작품 말이겠지?” “물론이지. 해방 전에야 같은 문단에서 살면서 쓴 작품이구, 지금 읽어봐도 특별히 이데올로기 냄새가 나는 것도 아닌 작품을 묶어놓을 필요가 뭔가?”…]

 

지구와 맞서 겨루는 사람을 보는 듯했다”

전시장 한쪽에는 김윤식의 동료, 후배 문인 그리고 외국의 한국문학 연구자 등이 그에게 쓴 편지, 그의 저서에 대한 해설, 그와 그의 저서를 만난 계기와 인상, 그에 대한 감사의 말 등을 쓴 원고가 전시돼 있다. 그의 면모랄까, 인품을 알게 해주는 것들이다.

그와 동년배의 소설가 최일남은 이렇게 썼다. “우리 연배는 ‘그만한 사람이 있어’ 미덥고, 한 시대를 함께한 증인으로 무섭다. 한낱 단편을 이야기할 때에도 당자조차 기억이 가물가물한 옛날 옛적 작품의 호적까지 들이대어 꼼짝 못하게 만든다. 역사적 내림으로 날줄을 삼고, 사회성으로 씨줄을 삼는 안목과 박람강기에 어쩔 도리가 없다.”

 

▲ '이광수와 그의 시대' 등의 저서와 그 원고 뭉치.

 

권보드래 고려대 교수는 대학에서 그의 강의를 듣던 시절을 떠올리는데, 마치 현장에서 강의 모습을 보는 듯 생생하다. “지구와 맞서 겨루는 사람을 보는 듯한 느낌이었다. 30초쯤 침묵이 흐를 때마다 강의실의 긴장은 더해졌다. 강의에서는 흔히 상대성원리와 비유클리드 기하학이 호출되고 베버와 흄과 루카치가 언급됐다. 교양화된 구미 지식과는 달랐다. 그런 명사마저 씹어뱉는 듯한 통증으로써 발음되고 했으니까. 체계적이고 유려한 대신 산만하고도 독했다. 그런 가운데 이광수와 염상섭과 이상을 배웠다. 열렬한 자기혐오와 물샐 틈 없는 연민. 자기에 절망하고 자기를 혐오하면서 그러나 결코 포기하지 않는 – 그렇듯 멋대로 선생님을 상상했기에 ‘쓰레기 같은 것들’이란 꾸지람조차 동지애의 표현으로 새겨들을 수 있었다. 아직 조국근대화의 시절이자 민주화의 질풍노도기였다.”

문학평론가 서영채는 이렇게 썼다. “대학원을 마치고 선생님과 조금 가깝게 되었을 때, 이렇게 여쭈었던 적이 있다. ‘선생님, 슬럼프는 없으셨나요?’ 그때 나는 슬럼프라고 느끼고 있었고, 선생님의 해법을 듣고 싶었던 거였다. 내게 돌아온 대답은 이랬고 대화는 그걸로 끝이었다. ‘슬럼프? 나는 매 순간이 슬럼프야!’”

김윤식은 지금도 문학 현장에 있는 현역이다. 한국 문학사·문학사상 연구, 작가 평전, 예술론과 기행문이 147종 그의 저서 중 큰 세 줄기라면 또 한 줄기는 현장비평이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그를 쉼없이 쓰게 하고, 60년 동안 동년배든 후배든 모든 작가들과 동시대인으로 호흡할 수 있게 했던 원동력이었다. 작고한 소설가 박완서는 소설 속에서 김윤식에 대해 이렇게 쓴 적이 있다. “…잘 쓴 작품이든 못 쓴 작품이든 활자화되어 문예지에 찍힌 이상 그를 피해 가기는 어림없다 싶을 만큼 그는 죄다 읽는다… 가치 있는 게 쓰레기가 될까봐 눈에 불을 켜고 길목을 밝히는 거, 그게 바로 문학에 대한 지독한 사랑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읽고 쓰느라 삶을 온통 탕진했다”

혹시, 했지만 전시장에서 김윤식 선생(지금까지 존칭을 붙이지 않은 것을 용서 바란다)을 뵐 수는 없었다. 그러고 보니 기자의 최근 수상한 세월 때문에 선생께 연락 드리거나 뵙지 못한 지 벌써 3~4년이 된 듯하다. 선생이라면, 서영채에게 말했듯 이렇게 말하실까. “수상한 세월? 나는 매 순간이 그랬어!” 선생과는 기자와 평론가로 만났지만 언제나 ‘스승’이라는 느낌을 갖지 않을 수 없게 만든 큰 산 같은 존재였다.

김윤식 선생은 이번 전시에 이런 인사말을 했다. “… 그럼 네가 즐기고 좋아하는 것은 무엇인가 물으신다면, 저는 이렇게 대답하겠습니다. 남의 글을 열심히 읽고 그것을 쓰고 가르치기라고. 그리고 또 덧붙이겠습니다. 그 때문에 삶을 온통 탕진했다고. 그럼 네 글은 쓰지 않았는가? 물으신다면, 그렇소! 라고. 한 줄도 쓰지 않았다라고. 쓸 자신은 없었는가 또 물으신다면, 저는 저 ‘금강경’의 말씀을 들고자 합니다. 응무소주이생기심(應無所主以生基心·일체의 생각을 버리고 그 위에서 바른 깨침을 향하여 마음을 일으켜야 한다). 그렇게 저는 노력하고만 있을 뿐입니다.”

삶을 온통 탕진하며 쓴 원고지 10만 장 147종의 저서. 그래도 그는 “한 줄도 쓰지 않았다”며 아직 깨침을 향해 노력하고 있을 뿐이라고 말한다. 이 자그마한 전시장 한국현대문학관을 찾는 것은 김윤식이라는 큰 산에 다가가는, 그 깨침을 향한 도정을 더듬어보는, 마음의 산책길 같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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