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로징 멘트로 고민하는 아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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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로징 멘트로 고민하는 아침
  • 황헌
  • 승인 2015.09.15 13:0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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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방송을 마치고 안도감과 피로감이 함께 몰려옵니다”

(mbc라디오 오전 8시 ‘뉴스의 광장’을 진행하는 황헌(사진) 앵커가 생방송을 진행하며 겪은 애환과 소회를 SNS에 올렸습니다. /편집자주)

 

4지선다형 퀴즈입니다. 다음 네 가지 가운데 가장 화나게 하는 건 무엇일까요? 1)우리 국민들의 가계부채 비율이 신흥국 최고 수준이다. 2)막걸리의 6배가 넘는 높은 세금 때문에 토종 와인업체 줄 도산한다. 3)다리를 잃고도 택시운전을 하며 열심히 살던 장애인이 ‘묻지마 폭행’에 실명했다. 4)고위공직자 아들 18명이 대한민국 국적 포기하고 군대를 안 갔다. 바로 오늘아침 나온 우리를 답답하고 화나게 하는 리얼 뉴스들입니다. 고민할 필요 없는 네 가지 모두가 정답이죠? 화요일 뉴스의 광장 마칩니다. 함께 해주신 여러분 고맙습니다.
(9월 15일 ‘뉴스의 광장’ 황헌 앵커의 클로징멘트. /편집자주)

 

지난 50년 간 매일 출근 시간 대한민국의 아침을 열어온 텔레비전과 라디오 통틀어 최장수 프로그램 <뉴스의 광장>을 진행하는 저는 새벽마다 전쟁을 치릅니다. 2010년부터 지금까지 중간에 잠깐 다른 동료가 맡은 때를 제외하고는 계속 이 일을 하고 있지만 매일 새벽이 살얼음판이지요. 그리고 무사히 끝나고 나면 “휴~” 하는 탄식과 함께 일순 피로감이 밀물처럼 몰려옵니다.

 

방송은 예고 없는 사고의 무대

방송은 예고 없는 사고의 무대 그 자체입니다. 몇 가지 사례만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톱뉴스로 출연하기로 한 기자가 갑자기 설사가 나서 좀 늦겠다는 전화를 라디오 뉴스센터 주조정실, 줄여서 ‘뉴스 주조’로 해옵니다. 화장실에서. 이건 뭐 사고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두 번째 나갈 아이템 기자 리포트 녹음테이프로 순식간에 대체하면 되니까요.

제일 황당한 건 생방송 전화 인터뷰 도중 갑자기 전화가 끊어지는 경우입니다. 이때는 거의 전 요원들이 사색이 됩니다. 그럴 경우에 대비해 저는 앞에 나간 아이템의 헤드라인만을 간추려놓습니다. 그걸로 전화가 다시 연결될 때까지 시간을 메워야 하니까요.

한번은 이런 사고도 있었습니다. 바쁘게 생방송 연결하고 취재기자 출연해 방송하는 기사의 원고 애드립으로 수정 지시하고 하다 보니 그만 원고 두 장짜리 가운데 뒷장이 어디론가 사라진 겁니다. 아! 그 순간 낭패감이라니...부랴부랴 문장을 접속사에 이어 화장실 가서 닦지 않은 기분으로 마무리해버립니다. 그건 누구 잘못도 아닌 제 잘못이니까요. 생리적 현상이 방송을 방해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아까의 설사 상황이 왜 저라고 안 생기겠습니까? 방송 시작 6분 전에 도저히 앉아있을 수 없어 100미터 달리기 하듯 뛰어가서 급히 해결하고는 숨이 턱에 닿을 정도로 도착해 가쁜 숨 몰아 쉰 적도 없지는 않았으니까요. 제 동료 한 친구는 방송 시작을 앞두고 동료들과의 얘기에 푹 빠져들었다가 “앗차! 이거 방송 시작시간 다됐네.” 하며 뛰어올라갔지만 이미 시보는 울렸고 뉴스 타이틀 음악도 나가버렸습니다. 하는 수 없이 기술 감독이 앵커 오프닝 인사 없이 곧바로 CM을 틀어서 그 시간을 채웠지요.

이밖에도 옛날 아나로그 시절 특파원 리포트 녹음은 릴테이프에 따로 받아서 그걸로 방송을 내보냈는데 그 시절 참 에피소드가 많습니다. 욕 잘하기로 유명한 한 유럽 특파원은 실컷 리포트 녹음을 하다가 마지막 부분에 가서 발음이 꼬여서 다시 해야 하는 상황이 생기자 그만 습관적으로 “열여덟”이 들어간 욕을 했지요. 방송 시간은 다가오고 외신부에서 야근한 신참 기자가 그걸 가위로 잘라 내서 이어붙이는 작업을 해야 하는데 요즘처럼 디지털이 아니라 그 욕이 나간 부분이 어딘지 아무 곳에도 표시가 없으니 얼마나 당황했겠습니까? 제네바 북핵 협상 관련 리포트 톱뉴스인데 말입니다. 그래서 대략 가위질하고 그게 괜찮은지 사전에 들어볼 시간도 없이 편집된 릴테이프 들고 뉴스 주조로 달려왔지요. 앵커는 “제네바의 북핵 협상 속보 현지에서 ㅇㅇㅇ특파원이 전해드립니다.” 라고 유도 멘트를 날렸고 릴테이프는 플레이가 됐습니다. 전 국민이 듣는 그 방송은 그러나 대참사로 이어졌습니다. “갈루치 미국의 북핵특사는...에이 니기미 오늘 발음 더럽게 안 되네...야...다시 가자...에흠...”하는 내용이 그대로 방송이 된 겁니다.

이밖에도 지난 31년 방송의 현장에서 접한 수많은 사고는 천일야화처럼 밤을 새며 이야기를 해도 못다 할 정도로 정말 아찔하고 당혹스러운 순간들의 보고로 제 가슴 속에 각인되어 있습니다.

 

매일매일 뉴스의 소재에서 클로징 멘트를 고민한다

그렇게 매일 아침을 전쟁 치르듯 일을 하는 저로서는 우리가 함께 할 가치, 메시지를 찾아 클로징 멘트를 준비합니다. 미담이 있으면 그걸 소개합니다. 채찍질이 필요한 사람들에겐 가차 없이 매를 준비합니다. 격려가 필요한 이들을 위해서는 함께 위로나 힘이 되어주기를 권하기도 하지요. 그렇지만 막상 소재를 뉴스 준비하면서 찾는 게 여간 어려운 일은 아닙니다. 그런데 오늘 아침엔 그 고민 하나도 할 필요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시쳇말로 조질 일이 널널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순간 4지선다형 퀴즈 형식으로 클로징을 날리고 싶었습니다.

1)가계부채 비율 신흥국 최고 수준이다.

바로 오늘 아침 BIS 국제결제은행이 발표한 가계, 기업, 정부의 부채 총액과 그 나라의 GDP 대비 비율 결과가 말해준 뉴스입니다. 작년말 현재 한국의 가계부채는 GDP 대비 84%로 신흥국 평균인 30%의 2.5배에 달한다는 뉴스였습니다.

2)막걸리의 6배 넘는 높은 세금 때문에 토종 와인업체 줄 도산한다.

연합뉴스에 난 지방 기사였습니다. 충북 영동 이야기인데요. 국내 유일의 ‘포도, 와인산업특구’로 지정된 충북 영동에는 전국 포도밭의 12%가 소재합니다. 해마다 33,000톤의 포도가 생산되고 이 중 200톤 정도가 와인으로 발효된다고 합니다. 토종와인인 ‘샤토마니’를 생산하는 와인코리아 등 43곳의 와이너리가 있는 곳이기도 하지요. 여기서 100여 가지의 다른 향을 내는 와인이 생산된다는 거 혹시 알고 계셨는지요? 근데 이 와이너리들 정말 힘들게 버티고 있다고 합니다.

바로 높은 세율 때문이라고 하네요. 현행 주세법은 약주나 과실주에 세율 30%를 매깁니다. 그러나 농림축산식품부에서 전통주로 지정이 되면 절반을 감면 받아 15%로 줄어듭니다. 그렇다 해도 부가세 10%, 교육세 10% 해서 총 세금이 35%나 되는 셈입니다. 탁주인 막걸리는 어떨까요? 다 해서 5%가 전부입니다. 그러니 가뜩이나 국내에서 와인 만드는 일도 여의치 않은데 어떻게 버티겠습니까?

3)다리 잃고도 택시 운전 하며 열심히 살던 장애인이 ‘묻지마 폭행’에 실명했다.

오래 전 교통사고로 한쪽 다리를 잃은 올해 47살 지체 장애 3급 이 모씨 이야기입니다. 그는 지난 5월 수원시 장안구의 한 길가에서 술 취한 31살 A모씨로부터 아무런 이유없이 폭행을 당했습니다. 무차별적으로 가해진 주먹과 발길질에 이 씨는 눈 주변 뼈가 내려앉았고 안구가 손상됐습니다. 인근 병원으로 옯겨져 수술을 받았지만 결국 시력을 잃고 말았습니다.

13년 전 이 씨는 신호 위반한 버스에 치여 오른쪽 다리를 잃었지만 택시기사와 오토바이 택배 일을 하며 어렵게 가계를 꾸려왔습니다. 지금은 21살 된 아들과 둘이서만 살고 있다고 합니다. 무엇보다 안타까운 건 시력을 잃은 피해자인데도 불구하고 가해자와 합의가 이뤄지지 않아 수천만 원에 달하는 병원비가 그의 몫이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왜 이런 비극이 한 사람에게 반복해서 일어나야 하는지 참으로 답답한 노릇이 아닐 수 없습니다.

4)고위공직자 아들 18명이 대한민국 국적 포기하고 군대를 안 갔다.

국정감사 결과 드러난 내용입니다. 현재 행정부와 사법부의 4급 이상 직위에 재직 중인 공직자 아들 가운데 ‘국적 이탈 혹은 상실’의 사유로 병적에 제외된 사람이 18에 이른다는 기사입니다. 미래창조과학부 고위 공직자 아들이 4명으로 가장 많았고 외교부도 2명이 있었습니다.

이런 뉴스들이 줄줄이 오늘 아침 기사로 새로 뜨는데 하나하나 모두 중요한 메시지가 담긴 클로징 소재 또는 주제로 다가왔습니다. 그래서 오늘 고민하지 않아도 되는 아침을 보내고 이렇게 뉴스를 마무리하게 된 것 그 소회를 함께 공유하고자 적어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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