흡연자에 ‘면죄부’ 판 꼴 된 담뱃값 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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흡연자에 ‘면죄부’ 판 꼴 된 담뱃값 인상
  • 하종오 편집인
  • 승인 2015.09.09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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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배 판매량 6개월 만에 제자리… “서민 주머니 털어 정부 곳간만 채웠다”

죄악세(罪惡稅·sin tax)는 담뱃값 인상 논의와 관련해 잘 알려진 개념이다. 재정학, 조세론에서 사용되는 용어로 술, 담배, 도박, 경마 등 사회에 부정적 영향을 준다고 여겨지는 것들에 부과되는 세금을 가리킨다. 악행세(惡行稅)라고도 한다.

죄악세는 소득에 관계없이 해당 제품이나 행위의 소비자에게 일괄적으로 세금이 부과되는 간접세다. 담배의 경우 세금을 높게 물림으로써 담배 소비를 줄여 흡연자의 건강을 증진하고 간접흡연의 폐해를 줄이며, 술의 경우 음주운전사고나 음주폭력 등에서 비롯되는 사회적 비용을 줄인다는 취지로 부과된다. 얼마 전부터는 비만도 사회적으로 죄악시되면서 탄산음료, 포화지방이 많이 든 유가공식품이나 피자 등에 고율의 비만세를 매기는 나라도 생겼다.

죄악세라는 것이 만들어진 유래가 흥미롭다. 그 역사는 16세기 초인 1513~1521년 로마 교황을 지낸 레오 10세(1476~1521)로 거슬러 올라간다. 명문 메디치가 출신이었던 그는 초기에는 학문과 예술을 장려해 로마를 르네상스 문화의 중심지로 만든 인물로 알려졌다. 하지만 점차 교황 본연의 일은 추기경에게 맡기고는 연극, 음악에 탐닉하고 사냥, 오락에 빠졌다. 실정으로 교황청 재정이 바닥나자 그는 사제 직을 매매했다. 성 베드로 대성당 건립 자금을 모은다며 죽은 영혼에 대한 면죄권을 교황이 관장한다는 교서를 발행했다. 바로 면죄부(免罪符)다. 마르틴 루터가 이를 비난하자 파문했다. 종교개혁의 발단이었다. 레오 10세는 면죄부뿐만 아니라, 자신의 사치스러운 생활비를 충당하기 위해 매춘업자들에게 면허를 내주고는 세금을 거둬들였다. 이것이 바로 죄악세의 유래라는 설이다.

18세기 초 제정 러시아의 개혁을 주도했던 표트르 대제는 당시 귀족계급의 상징이었던 턱수염을 후진성의 표본으로 지적하고 이를 자르도록 하면서, 지키지 않을 경우 수염세라는 것을 부과했는데 이 역시 죄악세의 사례로 흔히 꼽힌다.

 

담배 판매량 원상 회복… “정부 세수만 늘렸다” 비판

한국의 대표적인 죄악세는 담배세다. 정부는 국민건강 증진을 내세우며 담뱃값을 올려 흡연율을 낮춘다는 명목으로 지난 1월부터 담뱃값을 2,500원에서 4,500원으로 80% 인상했다. 4,500원 중 각종 세금이 3,318원이다. 세금 비율이 73.7%에 달한다. 종전에는 2,500원 하던 담배 1갑 가격 중 세금은 1,550원, 세금 비율은 62%였다.

담뱃값 인상의 충격으로 인상 첫 달인 지난 1월의 담배 판매량은 1억7,000만 갑에 그쳤다. 인상 전 달인 지난해 12월 3억9,000만 갑에서 절반도 훨씬 넘게 줄어든 것이다. 정부의 담뱃값 인상 명분이 먹혀드는 듯했다. 정부는 당초 담뱃값 인상을 추진하면서 올해 담배 소비가 34% 줄어들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런데 아니었다. 한국담배협회 자료에 따르면 담배 판매량은 2개월 만인 지난 3월에 2억4,000만 갑으로 늘어났고, 갈수록 늘어나 지난 7월에는 3억5,000만 갑이 팔린 것으로 집계됐다. 이는 지난해 월 평균 판매량 3억6,300만 갑 등 최근 3년 동안의 월 평균 판매량 3억6,200만 갑에 근접한 수치다. 80%나 오른 담뱃값 때문에 잠시 주춤하던 흡연자들이 다시 담배를 손에 잡은 것이다.

 

 

덕분에 정부 세수는 엄청나게 늘었다. 기획재정부에 따르면 담뱃값 인상의 효과로 올해 상반기 걷힌 세금은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약 1조2,100억원이 늘었다. 올해 담배세 세수는 10조원을 넘을 것이라는 전망인데, 6조6,000억원이었던 지난해보다 늘어난 세수가 3조4,000억원에 달하게 되는 셈이다. 당초 담뱃값 인상으로 세수가 2조8,000억원 늘 것이라던 예상을 크게 뛰어넘는다.

하기야 처음부터 예상됐던 일이다. 정부는 담뱃값을 인상하면서 한국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들과 비교해 흡연율은 높고 담배세율은 낮다며 OECD 국가들의 낮은 흡연률, 높은 담뱃값 관련 온갖 통계를 들이댔다. 그렇지만 그때 이미 사람들은 알았다. 국민건강 운운은 명분일 뿐, 담뱃값 인상은 사실 세수 확보가 목적이었다는 것을.

SNS 여론을 보면 “뻔한 증세. 국민 건강은 핑계 없는 유행가일 뿐", "정부에서 가격을 좌지우지할 정도로 세수 확보에 아주 중요한 품목이고, 합법적으로 생산 유통 판매가 되는 담배인데, 보건복지부에서는 흡연은 질병이라면서 버젓이 포스터 및 TV 광고하는 나라. 너무 속보이는 거 아님?"이라는 의견이 있다. 반대쪽에서는 "담뱃값을 어정쩡하게 올리니 금연 욕구를 끊지 못하는 것이다. 진정으로 국민의 건강을 생각한다면 욕을 일시적으로 왕창 먹더라도, 정권을 잃더라도 3만원 이상으로 올려서 감히 피울 생각도 못하도록 해야 한다", "담뱃갑에 끔찍한 사진이나 올려놔라. 그건 왜 안 하느냐”는 글도 올랐다.

 

“간접세는 서민 부담만 가중, 사회적 불평등 심화”

죄악세로 담배세를 늘리는 것은 사회적 불평등을 오히려 심화시킨다는 주장이 있다. 김선택 한국납세자연맹 회장은 지난해말 담뱃값 인상 논란 때 “한국처럼 (담배세 등) 죄악세 비중을 높이면 세금의 소득재분배 기능을 마비시켜 불평등을 더욱 악화시킬 뿐”이라며 “서민 복지가 미흡한 상태에서 죄악세 세수 증가는 서민의 소득을 줄여 빈부격차를 심화시킨다”고 말했다.

김 회장에 따르면 한국의 세금은 서민을 더 가난하게 만들고 있다. 2010년 기준 OECD 32개국의 조세 등 정책수단에 의한 소득재분배 개선비율은 평균 34.23%인데, 한국은 9.17%로 32개국 중 31위였다. 그는 “어느 나라에서든 죄악이란 명분을 내세워 간접세 비중을 늘리는 일은 반복돼왔다”며 “그것이 소득불평등이란 결과를 수반했다는 점에도 변함이 없다”고 말했다.

 

▲ 서울시내 한 편의점의 담배 진열대./ 연합뉴스 자료사진

 

흡연을 죄악시하는 정부의 정책이 세수 정책 실패를 가리는 한편으로, 또 다른 문제는 흡연자와 비흡연자를 사회적으로 갈라놓는다는 점이다. 갈수록 심해지는 각종 흡연 규제는 비흡연자로 하여금 점점 더 흡연을 참지 못하게 만들고, 나아가 비흡연자에게 마치 ‘특권’ 같은 지위를 부여하며, 흡연자와 비흡연자를 ‘싸우게’ 만든다는 주장도 있다. 흡연을 놓고 사회적 분쟁이 일어나는 셈이다. 흡연자들 실제로 가족 내에서, 조직이나 집단 내에서 이런 경험 한 적 많을 것이다.

한국 정부가 좋아하는 OECD 관련 통계를 하나 들자면, 자살률에서 한국은 OECD 국가들 중 11년째 부동의 1위다. OECD의 ‘2015 보건상태’ 조사에 따르면 한국의 인구 10만명 당 자살률은 29.1명(2013년 기준)으로 OECD 평균 12.0명의 2배를 훨씬 넘는다(10일은 ‘세계 자살 예방의 날’이다). 한국이 좀 살기 나아졌는지 몰라도 그만큼 사회적 스트레스가 세계에서 가장 심한 나라라는 이야기에 다름아니다.

그런 나라에서 살아가는 서민들의 가장 큰 기호품 중의 하나인 담배에 73.7%나 되는 죄악세를 물려가면서, 흡연자를 죄인 취급하면서, 그들 자신과 주위 비흡연자들의 건강을 위한다는 이유로 담뱃값 올렸는데, 막상 정부 곳간만 채운 셈이 된 것이다.

어떻게 해야 할까. 면죄부 같은 죄악세를 더 높게 매겨 서민들을 더 옥죄야 할까. 그것보다는 술, 담배 말고는 한국 사회에서 살아가는 스트레스를 풀 방법도 마땅히 없는 그들을 좀 신명나게 만들어줄 수 있는 정책적 아이디어를 고민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쉬운 일 아니지만, 국민들의 스트레스 지수부터 낮추는 것이 최고의 금연 정책이 될 수 있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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