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랍 난민은 유럽의 원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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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랍 난민은 유럽의 원죄
  • 김인영 발행인
  • 승인 2015.09.08 1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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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크스-피코 비밀 협정으로 인위적 국경 그어져
▲ 시리아 '꼬마 난민' 아일란 쿠르디가 숨진 채 발견된 터키 보드룸 해안가에 조화가 놓여 있다. /연합뉴스

3살 짜리 시리아 아이가 세계를 울렸다. 터키 해변에서 숨진 채로 발견된 시리아 아이 아일란 쿠르디다. 아이가 시리아 내전의 의미를 알턱이 없고, 그저 전쟁이 없는 곳을 찾아 다니던 아빠 엄마의 등에 업혀 지나다가 차가운 해변에서 죽음을 맞았다.

이 아이의 사진이 SNS를 통해 퍼져나가면서 전 세계가 울었다. 독일을 선두로 유럽은 난민에 대한 빗장을 풀었다. 난민을 수용하지 말라고 주장한 영국 일간지 '더 선'마저 데이비드 캐머런 영국 총리에게 난민 대책을 촉구하는 기사를 내보냈고, 난민 수용에 미온적이던 영국도 태도를 바꿨다.

이 아이에게 전쟁의 참화를 가져온 것은 과연 누구일까. 시리아정부일까, IS일까. 국경진입을 거부한 터키일까, 난민을 거부한 유럽국가일까. 어쩌면 모두 다일수 있다.

100년의 아랍 역사는 곧 강대국과 아랍 권력자, 종교의 이해가 복잡하게 얽힌 정치 과정이었고, 세 살박이를 죽음으로 몰아넣었던 것이다.

 

아라비아의 로렌스, 아랍인 부추겨 투르크에 봉기 유도

중동의 역사 100년은 강대국의 영토 쟁탈전이었다.

20세기초 중동의 패권을 쥐고 있던 오스만투르크는 신흥산업국가인 독일과 손잡고 영국에 대항한다. 독일은 투르크의 협조를 얻어 베를린-비잔티움-바그다드를 연결하는 철도부설권을 얻어 중동지역 진출을 시도했다. 이른바 ‘3B정책’이다. 독일의 3B정책은 케이프타운, 카이로, 캘커타를 잇는 영국의 3C정책과 충돌한데다 러시아의 남하정책, 프랑스의 개입으로 좌절하게 되며, 결국 1차세계대전의 원인을 제공한다.

1차 대전이 발발하고 주축국으로 참전한 오스만투르크의 패색이 짙어지자, 영국은 중동 일대를 장악하려고 시도한다. 1916년 영국정보국 소속 장교 토머스 에드워드 로렌스는 아랍에 정통하다는 이유로 아랍의 족장들을 설득해 투르크에 저항하도록 하라는 정보당국의 지령을 받는다.

로렌스는 당시 이슬람의 성지 메카를 지키던 하시미테 가문의 수장 후세인 이븐 알리에게 접근한다. 그는 후세인에게 투르크에 맞서 봉기한다면 과거 이슬람 제국의 영토를 되찾게 해주겠다고 유인하고, 그의 말을 믿은 아랍 족장과 토호들은 투르크에 대해 무장독립운동을 벌인다. 로렌스는 아랍독립에 기여한 공로로 ‘아라비아의 로렌스’라는 영웅 칭호를 받는다. 영국 정보장교 로렌스의 실제 스토리는 나중에 데이비드 린 감독이 연출한 영화로 제작된다.

 

영국의 배신, 프랑스와 영토 나눠먹기 협상

다른 한편, 영국은 프랑스와 아랍지역 영토를 나눠먹는 협상을 벌인다. 이중 전략이자, 속임수였다. 1916년 5월 영국의 외교관 마크 사이크스와 프랑스 외교관 프랑수아 조르주 피코가 비밀협정을 체결했다. 이른바 '사이크스-피코 협정'이다.

영국과 프랑스의 두 대표는 비밀리에 만나 오스만투르크가 패망하기도 전에 중동지역을 '나눠 먹기'하는 협상을 벌였다. 협상 결과 영국(B구역)은 지중해와 요르단강 사이 해안 지역 일부와 지금의 이라크, 요르단을 가져가고, 프랑스(A구역)는 이라크 북부 일부와 시리아, 레바논을 차지하기로 했다.

수니파와 시아파의 종파 갈등이나 부족성이 강한 아랍 무슬림의 역사·문화·종교적 요인은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그저 영국과 프랑스의 이해관계에 따라 국경은 자를 대고 일직선으로 그어졌다. 비밀 협상이었으므로, 당사자인 아랍 세력은 배제됐다.

수니파가 살던 알레포는 시아파가 지배하는 시리아와 묶였고, 수니파 중심 도시 모술은 시아파 대도시 바그다드와 한 나라가 됐다. 여기엔 1910년 중반 발견된 이라크와 쿠웨이트의 석유를 차지하려는 영국의 노림수가 크게 작용했다.

1917년 이 비밀 협정의 내용이 구소련의 볼셰비키에 의해 공개되자 영국을 철석같이 믿었던 아랍인의 배신감은 컸다. 영국정부의 지시로 아랍인을 움직였던 로렌스도 모국에 역겨움을 느꼈다고 회고했다. 결국 결과적으로 영국과 프랑스는 아랍 세력을 부추겨 오스만투르크를 붕괴하는 데 이용해 먹고 방대한 중동 땅은 자신들이 나눠먹기 한 셈이다.

아랍민족에게 주기로 약속했던 팔레스타인 땅도 1차 대전에 전쟁 자금을 제공한 유대 세력에 양보했다. 영국은 1917년 팔레스타인을 유대인에게 돌려준다는 내용의 벨푸어 선언을 발표했다.

독일 슈피겔지는 사이크스-피코 협정을 두고 "참으로 낯부끄럽고 뻔뻔한 땅따먹기"라면서 "현재 시리아 내전과 이라크의 극단주의 세력, 레바논의 종파·민족 충돌은 제국주의 열강이 멋대로 그은 국경선 때문"이라고 비판했다. 독일이 협정에서 소외돼 있었으므로, 그 나라 언론은 이런 평가를 내릴수 있을 것이다. 독일도 중동을 노려 ‘3B정책’을 추진하지 않았던가.

지금 다수의 난민을 내몰고 있는 급진 무장단체 이슬람국가(IS)는 1916년 사이크스-피코 비밀 협정이 현대 중동의 인위적인 국경선을 만들었다며 그 유산을 ‘제거한다’는 명분을 내걸고, 이라크와 시리아 사이의 국경을 허물고 단일 전선을 형성하고 있다.

 

철권 통치자와 종교 갈등도 난민 발생의 내적근거

그렇다면 중동 난민을 발생시킨 원죄는 강대국에게만 있는 것인가. 강대국의 이해관계가 외적요인이라면, 아랍 지도자와 종교 갈등은 내적 근거를 제시하고 있다.

이라크와 시리아는 오랫동안 철권 통치자가 지배해 정치 발전이 지체됐고, 통치자의 강압에 의해 종교 갈등이 잠복해 있었을 뿐이다. 중동의 역사는 강대국의 외부적 압력에다 오래 전부터 존재했던 그 지역 고유의 특성과 정치체제가 복합적으로 얽힌 산물이다. 중동의 통치자들은 자신의 가문과 자국의 이익을 추구했고, 종종 열강들을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유도하기도 했다.

예컨대, 1972년 소련이 이집트에 전략무기 공급을 제한하려 하자 안와르 사다트 이집트 대통령은 막강한 소련의 군사고문단을 추방했다. 그 후 사다트 대통령이 서방으로 기울자 레오니트 브레즈네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은 모욕을 무릅쓰고 소련은 이집트에 원조와 무기를 다시 제공했다. 미국은 이란에서 팔레비 왕조를 무너뜨린 1979년 이슬람혁명을 막지 못했고, 소련도 아프가니스탄에서 무장조직 무자헤딘에 쫓겨났다.

중동난민이 대량 발생하는 시리아에서 미국은 처음엔 반군을 지원했다가 IS세력이 반군 세력을 통합하자 반군을 폭격하는 태도로 돌변했다. 아프가니스탄의 탈레반이 한때 소련 침공을 저지하라고 미국이 준 무기로 무장했듯, 시라아와 이라크 국경지대의 IS 반군은 미군 무기로 무장하는 아이러니가 연출되고 있다.

중동의 집권자든, 반군 지도자든 지난 100년간 열강의 원죄를 명분 삼아 잔혹 행위를 정당화하고 있다. 그들은 세 살짜리 어린아이든, 부녀자든, 상관하지 않고 대량 살상행위를 벌이고 있다.

 

역사의 원죄를 안고 있는 유럽이 난민 수용해야

이라크에서 시리아에 걸친 ‘비옥한 초승달 지대’는 이제 사람이 살 곳이 아니다. 전쟁은 결국 힘없는 대중을 죽음의 늪으로 내몬다. 죽기 아니면 살기로 악이 바친 아랍 난민들은 역사의 원죄를 안고 있는 영국과 프랑스, 독일등 유럽을 향해 가고 있다. 유럽 국가들은 그 원죄를 안고, 그들을 받아들여야 할 의무를 지고 있다. 이 난민들은 유럽 체류를 허가받아 비행기 티킷을 얻게 되면 언젠가 미국으로, 아시아로 몰려갈 것이다. 우리나라는 중동에 원죄는 없지만, 인도적 차원에서 그들을 맞이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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