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대호의 책이야기] 연필은 짧아지고 지우개 가루는 쌓이고...김훈 ‘연필로 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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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대호의 책이야기] 연필은 짧아지고 지우개 가루는 쌓이고...김훈 ‘연필로 쓰기’
  • 강대호 북칼럼니스트
  • 승인 2019.06.28 1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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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대 김훈 작가, 연필로 꾹꾹 눌러쓴 산문 '연필로 쓰기'
"연필은 나의 삽이다. 지우개는 나의 망설임이다.”
작가 김훈에게 연필은 무기이자 악기, 밥벌이의 연장
'연필로 쓰기'.문학동네 펴냄
'연필로 쓰기'.문학동네 펴냄

[오피니언뉴스=강대호 북칼럼니스트] 영화에서 작가가 고민하며 글을 쓰는 장면을 외국과 한국이 다르게 묘사한다는 걸 떠오르게 한 책이었다.

외국 영화에서는 주로 작가가 등장해서 타자기 자판을 리듬감 있게 두드리는 장면이 나온다. 타닥탁탁 두드리다 땡 소리가 나면 포인터를 다시 왼쪽으로 보낸다. 그러다 글이 마음에 안 들면 종이를 휙 뽑아 구겨서 휴지통에 던져버린다.

한국 영화에서는 작가가 원고지에다 만년필이나 볼펜 혹은 연필로 사각사각 적어 내려간다. 그러다 글이 마음에 안 들면 원고지를 확 찢어 구겨서 휴지통에 던져버린다.

물론 지금은 외국이든 한국이든 컴퓨터로 글을 쓰는 게 대세일 것이다. ‘delete’ 버튼 덕분으로 휴지통에 구겨진 종이가 쌓일 일도 없다. 그렇지만 종이에 쓰든 컴퓨터로 쓰든 글은 작가의 생각이 거쳐 간 흔적들이 쌓인 거다. 그 흔적은 안 보이는 곳에 묻혀있을 때도 있고 보이는 곳으로 슬쩍 올라올 때도 있다.

독자들은 작가의 생각이 거쳐 간, 그러나 깊은 곳에 묻어 둔 흔적을 볼 수는 없다. 다만 작가가 거르고 거른, 다듬고 다듬은, 그 흔적을 글로 담아서 발표해야 비로소 볼 수 있다. 작가 생각이 글로 옮겨지는 과정이 궁금했던 나는 김훈 작가의 산문집 <연필로 쓰기> 덕분에 그가 글을 쓰기 위해 생각한 흔적들을 따라가 볼 수 있었다. 김훈 작가가 만든 작품 세계도 자세히 엿볼 수 있는 행운까지 얻었다.

 

연필은 밥벌이의 도구

그는 매우 알려진 작가다. 소설은 물론 칼럼을 쓰거나 이 책처럼 그의 생각을 다양한 산문으로 그려내기도 한다. 그런 그가 그의 작업을 노동에 비유했다. 책의 서두에 “연필은 내 밥벌이의 도구다”라며 정체성을 확실히 밝힌다. 그는 연필이 “구석기 사내의 주먹도끼, 대장장이의 망치, 뱃사공의 노”를 닮기를 바란다고도 한다.

이 책에 실린 서른네 편 글을 읽으면서 김훈 작가의 소설이 떠오르곤 했다. 그가 쓴 작품 흔적을 볼 수 있었던 것. 특히 ‘내 마음의 이순신 I’와 ‘내 마음의 이순신 II’ 두 글에서 소설 <칼의 노래> 흔적을 많이 발견할 수 있었다.

작가는 ‘난중일기’와 여러 사료를 통해서 이순신의 삶을 쫓아간다. 단호하며 냉정했던 면모를 부각한다. 감정에 치우치기보다는 사실에 근거해 판단을 내리는 면도 강조한다. 김훈은 이순신이 왜 영웅이 되었는지, 그는 어떻게 진정한 리더가 되었는지, ‘난중일기’ 문체처럼 담담하게 설명한다. 그리고 작가는 오늘 대한민국에도 이순신의 생각과 삶이 울림을 주기를 바란다.

 

“민주적이고 참여적이고 온정적이고 여론 수렴적인 리더십이 현대사회의 만인이 요구하는 리더십이다. 그러나 이 같은 민주적 성격만으로 리더십의 내용이 모두 충족될 수 있는 것인지에 관하여 이순신의 생애는 많은 생각거리를 제공해준다. 리더십이란 때로는 여러 사람들이 싫어하고 회피하려는 방향과 목표를 향해 다중을 거슬러가면서 그 다중을 다시 몰고 나갈 수 있는 덕성까지를 포함해야 온전하다 할 것이다.” (138쪽)

 

원칙을 그대로, 옳다고 믿는 바를 주저 없이, 그렇지만 다중(多衆)을 따라오게 만드는 이순신에게서 오늘날 지도자의 면모를 다시 한번 생각하게끔 하는 것.

그 외에도 남한산성 성곽길을 얘기할 땐 소설 <남한산성>이, 밤하늘의 별을 얘기할 땐 소설 <현의 노래>가 떠올랐다. 소설가의 삶 모든 순간이 언젠가는 작품으로 승화되는 취재의 현장이라는 걸 느끼게 했다. 특히 어린 시절 서울 삼선교 인근 허물어진 한양 성곽에서 친구들과 놀던 추억, 정릉천으로 이어지는 작은 개천의 기억, 이 모든 장면이 작가가 쓴 소설 어디에선가 봤던 설정을 연상하게 했다.

성곽 층층이 쌓인 돌의 크기와 색깔. 무너진 돌로 주춧돌을 삼은 판잣집들. 동네를 가르고 흐르는 냄새나던 개천. 겨울이면 목욕탕 하수구 근처 개울로 빨래하러 오던 여인들. 김훈이 묘사한 어린 시절이 읽는 내게도 보이는 듯했고 냄새가 나는 듯도 했다. 작가의 지난 삶은 어쩌면 제목 그대로 ‘연필로 쓰기’에 딱 좋은 글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독자들과 함께 남한산성을 찾은 김훈 작가.사진=연합뉴스
독자들과 함께 남한산성을 찾은 김훈 작가.사진=연합뉴스

글쓰는 '노동'을 하는 작가에게 연필은 삽이다

사각거리는 소리가 차갑고 날카롭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김훈이 연필로 눌러 쓴 글은 따뜻하고 깊다. 평생 글을 고민한 작가로서의 역량과 세상과 사람을 바라보는 김훈의 심성이 잘 드러난 글들이 많은 것.

‘동거차도의 냉잇국’은 ‘세월호 3주기’를 맞아서 팽목항과 목포항을 돌아보고 세월호가 가라앉은 곳이 보이는 동거차도에서 유가족들과 함께 머문 작가의 마음이 담겼다. 대통령이 국민에게 지은 무표정한 얼굴, 억지 눈물, 그 무대응에 작가의 글은 분노한다. 분노는 유가족들에게 보내는 연대의 마음을 따뜻하게, 소박하지만 마음을 녹여주는 냉잇국에 빗대어 위로를 보낸다.

‘아, 100원’에서는 배달 노동자, ‘라이더’의 삶에 위로를 보내고 그들의 안전을 기도한다. 그는 실제로 ‘생명안전시민넷’의 공동대표라고 한다. 여기서 ‘100원은’ “폭염이 심한 날에는 배달 수당 100원을 더 주자”라는 배달 노동자에 대한 최소한의 처우 개선을 은유한다. 물론 책을 출판한 당시까지 ‘폭염 수당 100원’이 성사되지는 않았다고.

이런 글들이 기억력과 문장력만으로 되는 게 아니란 것도 느껴졌다. 작가의 생각을 글로 표현하기 위해서는 그 생각을 깊고 두텁게 만들어주는 취재와 자료 조사가 기본이라는 것을 보여주었던 것.

‘고래를 기다리며’가 그 한 예다. 김훈은 고래에 대한 글을 쓰기 위해서 울산에 1년을 살았다고 했다. 작가는 그 1년 동안 글은 쓰지 않고 놀았다고 했는데 내가 보기엔 그 과정 모두가 취재였다.

작가는 울산 앞바다에서 고래를 기다리면서 7천 년 전부터 고래를 잡고 살아왔을 동네를 돌아보고, 어부들을 만나고, 그 시절을 새긴 암각화도 찾아가고, 그 시절의 유물이 모인 연천 선사박물관에도 찾아간다. 고래를 문학적인 소재로 만들기 위해서 지역 역사는 물론 과학과 자연사적으로도 체계적인 준비를 하는 작가를 엿볼 수 있었다.

특히 암각화에 담긴 7000년 전 이야기를 해석할 때는 작가적 상상력이 중요하다는 걸 새삼 깨닫게 했다. 글은 책상에 앉아서 엉덩이로 쓰는 거지만 발로도 쓰는 거란 생각도 들게 했다.

김훈은 서른네 편 글 곳곳에서 그가 해온 ‘노동’을 언급하곤 했다. 그의 이력을 보면 모두 글쓰기와 관련되었다. 그런 작가에게 연필은 삽이었다. 선사시대 사내들이 주먹도끼를 들고 사냥을 나가듯이, 대장장이들이 쇠를 부리듯이, 김훈 작가는 연필을 들고 글을 썼다고 이야기한다.

연필 뒤에 달린 지우개는 작가에게 망설임을 의미한다. 잘못 파 들어간 곳이 있다면 삽으로 다시 묻어서 다듬어 주듯 작가가 망설인 지점을 지우개로 쓱쓱 지울 수 있다. 그래서 작가는 “연필이 짧아질수록 지우개 가루는 자꾸 쌓인다”고 했을 것이다.

글을 잘 쓰고픈 사람으로서 글쓰기의 고단함과 어려움이 느껴진 책이다. 책표지에 인쇄된 그가 직접 쓴 원고지 이미지를 보는 순간 딱 그렇게 느껴진다. 연필로 원고지를 꾹꾹 눌러쓴 김훈의 필압(筆壓)까지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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