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콩워치] 진화한 시위 현장, ’집단 지성의 힘‘ 보여줘    
상태바
[홍콩워치] 진화한 시위 현장, ’집단 지성의 힘‘ 보여줘    
  • 홍콩=이지영 통신원
  • 승인 2019.06.24 15:02
  • 댓글 1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이번 홍콩시위, 주동세력 없어
스마트폰 앱으로 시위 장소 일정 공유
시민 참여 커지고 폭력성은 사라져
중국개입시, 폭력성 드러날까 우려 공존

[홍콩=이지영 통신원] 홍콩시위에 참가했던 학생들이 예고대로 지난 21일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 홍콩도심은 다시 시위대로 가득찼다.

완차이(灣仔)에 있는 경찰본부를 포위한 시위대는 지난 12일에 시위에서 경찰의 최류탄, 고무탄 등을 동원한 무력진압을 사과하고 체포된 학생들을 석방하라고 주장했다. 경찰청장과의 만남도 요구했다.

홍콩에선 처음으로 경찰본부뿐만 아니라 세무국 및 이민국 건물 1층까지 점거한 이날 시위에는 수만명이 참가했지만 시작부터 마무리까지 대체로 평화롭게 진행됐다. 이번 시위뿐 아니라 103만명 참가한 지난 9일의 시위, 200만명이 참가한 12일의 시위에 공통점이 하나 있다면 시위를 주동하고 이끈 사람이나 단체가 없었다는 점이다. 

스마트폰 앱, '조직도 리더도 없는 집단' 지혜 끌어모아   

시위를 이끄는 주동자가 없는데 수많은 참가자들은 시위 장소와 일시를 어떻게 알았을까. 시위에 대한 정보는 어떻게 받았을까. 답은 스마트폰을 통해서였다. 시위대는 ‘텔레그램(Telegram)'앱을 통해 다른 시위자들과 현장 상황 정보를 공유했다.

지난 21일 시위에 참가한 사람들은 텔레그램으로 경찰본부에 있었던 경찰의 위치와 장비 등의 정보를 유포했다고 현지 신문인 명보 (明報)는 보도했다. 그리고 시위대를 위해 준비한 보급품 및 응급센터의 위치도 텔레그램으로 공유됐다.

텔레그램뿐만 아니라 홍콩 온라인 커뮤니티 LIHKG (連登)를 통해서도 데모 관련 정보가 퍼졌다. LIHKG는 주로 20대 이상의 젊은 세대들이 사용하는 커뮤니티다. 익명의 시위자들이 LIHKG에서 시위대의 위치와 상황, 필요한 물품 등을 실시간으로 커뮤니티에 올렸다. 인터넷 및 핸드폰을 통해 시위 정보가 대규모 시위자에게 빠르게 확산될 수 있었다.

송환법 제정 문제를 놓고 벌어진 홍콩시위에 지난 16일 200만명이 참가했지만 무혈충돌은 일어나지 않았다. 사진은 시위가 한창인 홍콩 시내 모습. 사진=연합뉴스.
송환법 제정 문제를 놓고 벌어진 홍콩시위에 지난 16일 200만명이 참가했지만 무혈충돌은 일어나지 않았다. 사진은 시위가 한창인 홍콩 시내 모습. 사진=연합뉴스.

이젠 비주류된 과거 '우산혁명' 주동세력    

2014년 우산혁명은 홍콩 시위 형태의 분수령이었다. 우산혁명 전에는 대형 데모나 시위 모임의 주도를 주로 재야 민주파(民主派) 정치인이 맡았다. 90년대의 주동자는 민주당의 입법회(立法會) 위원인 마틴 리(李柱銘)와 세토화(司徒華)였다. 

2000년대에 들어 다른 재야 민주파 정당이 생기고 정치 지도자도 많이 생겼다.  에밀리 라우(劉慧卿),롱헤어(長毛)라는 별칭의 렁쿽훙(梁國雄),리촉얀(李卓人), 변호사인 앨런 렁(梁家傑) 등 모두 반정부파이며 노동자의 권익을 위해 투쟁한 민주파 정치 지도자로서 일반 홍콩 시민의 신임을 받아왔다. 

20대 젊은 학생 지도자도 있었다.  타임지 표지에도 소개되었던 조슈아 웡(黃之鋒), 네이선 로(羅冠聰),알렉스 차우(周永康)등이 우산운동의 주역이었다.  1994년에 창립된 가장 오래된 민주파 정당인 공민당(公民黨), 공당(工黨) 등은 원래 시민들에게 인기가 있던 민주파 정당이었다. 2002년 여러 민주파 정당과 단체가 합치한 “민간인권진선 (民間人權陣線)”은 대규모 데모의 주최단체가 됐다. 학생 정치운동조직으로는 홍콩전상학생연회(香港專上學生聯會·대학학생회 연합체, 학연)가 있고 조슈아 웡이 소속된 데모시스토(學民思潮)가 주로 20대 이하로 구성된 젊은 학생 조직이다.

시민 뭉치니 폭력 사라져 
    
홍콩의 시위형태는 2014년 우산혁명 후 많은 변화가 있었다. 우산혁명 동안 무려 만 명의 시민들이 홍콩 도심인 애드미럴티(金鐘)와 몽콕(旺角) 차로를 약 80일간에 걸쳐 점령했다.

홍콩 정치 민주화를 위해 도심 점령에 참가한 시위자들간에 다음의 행동을 어떻게 할것인지에 대한 의견이 엇갈렸다. 여러 의견 중에 주로 둘로 나눠졌다.

민주파와 데모시스토 등 전통 정당은 계속 평화적인 수단으로 정부에게 압박을 주자고 주장했지만 반대로 폭력으로 행동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었다. 두 주장은 팽팽히 맞서고 심지어 서로 비난도 했다.

계속 평화를 주장한 민주파는 극단적 수단을 주장한 반대파를 경찰의 프락치라고 했다. 지나친 폭력은 경찰에게 강경 진압의 핑계를 준다는 지적이 나왔다. 반면 급진적 주장의 시위자들(주로 젊은이들 )에게서 데모로 얻은 실익은 없고 오히려 지도자가 시위의 장애가 된다는 주장도 나왔다. 우산혁명 후기에는 ’민주파의 사령탑을 타도하라‘는 주장까지 제기되었다. 

홍콩의 민주화에는 아무 변화도 없고 민주파 정당이나 지도자들은 자신의 정치적 인기나 선거에만 관심을 둔다고 비판하는 시민들이 많아졌다. 우산혁명 후 시위를 이끈 주동자들은 정당에게 비판만 받았다. 그래서 정치 주동자의 중요성이 점점 낮아졌다.

지난 9일과 12일 각각 100만과 200만 시민 대규모 시위의 표면적 주최 단체는 “민간인권진선 (민진)”이지만 민진은 사실상 시위에 대한 통제력이 없었다. 또 다른 시민단체 대표 조슈아 웡은 지난 21일 경찰본부를 포위한 시위에 있어서도 자신은 이번 시위의 지도자가 아니라고 강조했다.

홍콩시민 불안감 여전..."중국 개입시...짓밟히는건 시간문제"    

지도자 없는 시위가 홍콩의 새로운 시위 형태가 됐다. 이로인해 경찰은 골머리를 앓고 있다.  

시위 주동 세력이나 조직을 알 수 없는 경찰은 시민들이 시위현장에서 무슨 행동을 할지 사전 예측을 할 수 없다. 반면 시위 효과는 높아지고 있다. 그러나 이런 시위형태의 위험성 또한 무시할 수 없다. 만약 일부 시위가 폭력적으로 변한다면 이는 통제불능의 상태가 될 수있기 때문이다.   

홍콩시민들은 이번 송환법 폐지로 인한 여러 대규모 시위가 지도자 없는 데모의 좋은 사례라고 자부심을 갖는다. 자발적인 참여와 지도자가 없음에도 비교적 차분한 시위를 견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도 안타까운 것은 이러한 상황이 언제까지 유지될 수 있을지다. 중국이 언제든 간섭할 수 있다는 변수는 아직 미지수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1
0 / 40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공감 2019-07-06 13:07:30
홍콩인이 입장에서 쓴 기사는 첨이에여. 잘 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