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 맛보기 단동] ⑪ 6월에 생각해보는 단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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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 맛보기 단동] ⑪ 6월에 생각해보는 단동
  • 필명 이 강
  • 승인 2019.06.22 10:5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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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 참전기념 '항미원조 기념관' 있는 곳
남한보다 북한에 기울어 있는 도시
냉전 잔재 지우고 '종전선언' 재추진되길 소망

[오피니언뉴스=필명 이강 통신원] 6월 25일은 69년 전 한국전쟁이 발발했던 날입니다. 이 날에 앞서 이번 20일, 21일 중국의 시진핑 주석이 북한을 국빈방문 했습니다. 그에 앞서 지난 주말에 단동에선 일부 차도가 통제되고 시내에 경찰병력이 심상치 않게 배치되었습니다.

단동에 인연을 가진 한국의 기자들이 무슨 일이 있는 가 싶어 열심히 탐문했습니다만 별 내용이 잡히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몇 일후 시주석의 북한 국빈방문이 공식 발표됐습니다. 아마도 지난 주말의 그 움직임은 중국 정부의 의전 등 실무 준비팀이 방북을 하는 과정에 일어났던 상황으로 추측됩니다. 이렇게 북중관계 대부분의 일에 있어 단동이라는 지역은 전면적으로 또는 부분적으로 개입이 됩니다.

2년째 내부수리 끝에 재개관을 앞두고 출입통제된 항미원조 기념관. 사진= 필명 이강 통신원
2년째 내부수리 끝에 재개관을 앞두고 출입통제된 항미원조 기념관. 사진= 필명 이강 통신원

항미원조 전쟁기념관, 6·25전쟁때 중국 참전 기념

단동에는 '항미원조(抗美援朝)기념관'이라고 하는 기념탑 형식의 전쟁 박물관이  있습니다. 1991년 대대적으로 이전 신축공사를 해 한국과 중국이 국교 수교를 한 1992년 이듬해인 1993년에 지금의 모습으로 세워졌습니다. 항미원조 전쟁은 다름 아닌 한국전쟁을 뜻합니다.

한국에서 70년대 80년대 초중고를 다닌 세대들은 6.25전쟁으로 교육을 받았던 이 전쟁의 이름을 이곳 중국에서는 항미원조 전쟁이라 부릅니다. 이름이 뜻하는 바와 같이 단동에는 항미 원조했던 흔적들이 곳곳에 남아 있습니다.

단동 철교 부조
단동에서 압록강 상류로 거슬러 올라가면 나오는 청수대교 서단 철도전쟁기념관 앞 철로터널 기념부조. 사진= 필명 이강 통신원

'중조우의교'에서 상류 쪽으로 거슬러 올라가 약 4km 지점에는 압록강철교가 미군 공군에 의해 파괴되었을 당시 임시로 목교(木橋)를 놓아 중공군이  북한으로 넘어갔던 다리의 교각을 보존한 터가 있습니다. 또한 그 지점에서 상류 쪽으로 10km이상 더 올라가면 '청수대교'라는 다리가 있는데 이 다리는 아직도 온전한 상태로 중국-북한 간의 철로를 잇고 있습니다. 이 철로를 통해 또한 항미 원조가 이뤄졌습니다. 

방북 시진핑, 철로나 육로 이용했다면

최근에 여기에도 철도전쟁박물관이 들어서서 애국주의 관광코스가 됐습니다. 만약 시진핑 주석이 이번 북한 방문길에 철로나 육로로 단동-신의주 구간을 건너서 갔다면 또 다른 해석과 의미를 부여하는 사건이 되었을 겁니다.

미국과의 무역 전쟁이 한창인 시점에 한국전쟁 발발 일 근처 날짜에 과거 항미 원조의 길을 따라갔다는 의미가 되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시주석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굳이 항미의 기억을 소환하지 않겠다는 의미가 있을 겁니다.

단동 단교
압록강철교가 미 공군에 파괴됐을 당시 임시로 만든 목교의 흔적. 사진= 필명 이강 통신원


단동을 처음 방문하는 한국인들은 단동시내에 심심치 않게 보이는 한글간판을 보고 반가운 마음이 든다고 합니다. 몇 가지 예를 들면 다음과 같은 문구들이 있습니다.

원주필(=볼펜), 불소강(=스텐레스), 몸까기(=다이어트), 색텔레비(=칼라TV), 약점(=약방), 쌍면테프(=양면테이프), 피발(=도매), 방도문(=방범문) 등입니다. 자세히 보면 현재 한국에서는 거의 쓰지 않는 말들이 대부분입니다. 그래서 눈치 빠른 사람은 이런 한글표기가 한국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고 바로 이곳에 오는 북측 사람들을 위한 간판이라는 사실을 금방 알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단동은 북측으로 경도되어 있는 도시입니다. 북중 혈맹관계의 입구와 같은 곳이 바로 단동입니다. 그래서 항미원조 기념탐도 한중수교 이듬해에 전격적인 이전(移轉) 신축으로 다시 세워졌습니다. 중국 입장에서 한국과 수교하지만 “우리는 절대 당신(북측)들을 잊지 않을 것이다” 라는 표현이 되기 때문입니다.

과거 김정일 위원장과 현재의 김정은 위원장이 '우정(굳이, 일부러 라는 뜻을 가진 북한 사투리)' 압록강이나 두만강을 건너 육로로 중국을 방문하는 일도 이런 과거 혈맹의 기억을 되살리는 상징적 행위라고 보아야할 것입니다.

북한으로 기울어있는 도시 단동

북경에 부임하는 주중 한국대사님들 대부분은 그 임기중 한번은 단동을 방문합니다. 그러나 단동에서만큼은 여느 타 도시에서 받는 대접을 절대 받지 못하고 돌아갑니다. 북한 영사관 출장소가 있는 단동의 시정부가 ‘오지 말았으면’ 하는 한국 고위급 인사들의 단동 방문에 가능한 한 낮은 수준의 의전으로 응수를 하기 때문입니다.

역시 단동은 중국에서 북측으로 가는 길목에 위치한 도시로 정치적, 경제적으로 북한에 종적 함수 관계를 가질 수밖에 없는 도시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요즘 한국의 제1야당 일부 의원들에게 단동은 놀라운 곳일 듯합니다. 그들의 눈에 단동은 철저한 '종북의 도시'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들에게 이 도시의 색깔은 너무 빨개서 표현하기조차 쉽지 않을 듯합니다. 그 정강정책이 어떤 면에서는 '유럽기준의 보수당 보다 덜 진보적이다'라고 평가되는 우리나라 민주당 출신의 대통령더러 '빨갱이' 운운하는 사람들이니까 말입니다.

단동 목교
압록강철교가 파괴되고 임시로 만든 목교 흔적 보존자리에 서 있는 기념 조각물. 사진= 필명 이강 통신원

한국에서 지난 3월 그 당의 원내대표가 '반민특위' 발언을 해 어이없고 의미 없는 논쟁을 할 때입니다. 여기 단동 조선족 사회에서는 한국전쟁 당시 중국의용군 참전 사실을 놓고 논쟁이 있었습니다. 단동 시정부 공식 기록에 없는 사람이 참전했다 주장해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시정부의 옛 기록을 찾아서 진위를 가리자는 것이었는데 결론은 단동 정부 기록외의 북경에 있는 기록도 함께 다시 살펴봐야 하는 것으로 하고 진위 여부를 유보했습니다.

 우리는 너무나도 다른 양단의 해석이 공존하고 있는 동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냉전의 마지막 유물들이 아름답지 못한 흔적으로 남아 있습니다. 먼저 전쟁이라도 공식적으로 끝내야 다음 단계를 기약할 수 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진하게 남습니다. 작년의 '종전선언' 추진이 속히 재개되기를 기원해봅니다.

● 이 강`(필명)은 2000년대 초반부터 단동에 정착, 다양한 대북사업을 진행했다. 본인 사정상 필명을 쓰기로 했으며, 사진도 싣지 않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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