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 맛보기 단동] ⑩숨소리의 대화...우리들만의 유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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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 맛보기 단동] ⑩숨소리의 대화...우리들만의 유전자
  • 필명 이 강
  • 승인 2019.06.15 11: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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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대 남한 K와 북한C선생의 임가공사업 '의기투합記'
북 노동자들 뛰어난 손재주에 초정확 납기... 南 원청업체 '경탄'
中기업, 유엔제재에도 北노동자 안보내..'북노동자 우수해서'
남북 평화시대 오면 협력사업 재개...C선생 다시 만나길

[오피니언뉴스=필명 이 강 통신원] K는 2000년대 초반에 단동에 오게 됩니다. 그가 단동에 올 수 있었던 계기는 이미 단동에 와서 터전을 잡고 있었던 친구 형님과의 인연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결혼해 두 아이의 아빠이던 그에게 가족과 함께 가자고 제안한 아내의 통 큰 결정도 한 몫 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K에게는 대북사업이라는 끌림이 있었습니다.

전두환 정권의 등장과 80년 광주항쟁 그리고 6.10항쟁에 이르기까지 80년대를 관통했던 저항운동 한 가운데에서 대학생활을 보낸 그에게 90년대의 평범한 직장인과 소시민으로서의 삶은 그의 가슴 한쪽을 허전하게 만들었던 것 같습니다. 단동에 와서 K가 처음 근무했던 사무실은 단동시 개발구에 위치해 있었습니다.

창문 너머로 압록강이 보이고 그 뒤로 신의주가 보입니다. 겨울이면 밀물 썰물에 따라 강의 상 하류 방향으로 오르락내리락 하는 유빙을 타고 이동하는 압록강의 오리들이 신기했었습니다. 압록강의 압자가 한자로 오리압자라는 사실도 그 즈음 알았습니다.

그 사무실엔 북측에서 온 출장자들이 수시로 드나들었습니다. K는 여러 출장자들중 평양에서 온 C선생과 자주 마주치게 됩니다. 처음에는 C선생이 피복회사(의류제조회사) 성원(우리말로 직원)인 줄도 몰랐습니다.

북한 피복회사 성원 C선생과의 만남, 그리고 의기투합

당시 K가 근무하던 단동의 형님 회사 주력 상품의 수출이 하향 조정되는 상태에서 새로운 사업 아이템이 절실하던 때였습니다. K는 C선생에게 "무엇을 같이 해볼 수 있겠습니까"라고 물었던 것을 기억을 합니다. C 선생은 주저 없이 “피복 생산 해 봅시다”라고 대답합니다. K의 북측에서의 의류생산 이력이 시작되는 순간이었습니다.

40대 초반의 추진력과 용감함이 그 분야의 초보라는 장벽을 허물었습니다. 몇 번의 시행착오를 거치고 K는 한국 내에서 나름 메이저급 브랜드의 재하청 생산을 따내서 평양에 주문 생산을 시작하게 됩니다. 첫 품목이 등산복 바지 5천장 주문이었습니다.

생산된 제품에 대한 품질 평가는 납품 받는 입장에서는 매우 인색할 수밖에 없습니다. 만약에 있을지도 모르는 소비자 클레임에 대비해서 그 책임의 여지를 남겨두어야 하는 측면도 있고 더 잘 만들어 달라는 압력의 의미도 있습니다. 그런데 브랜드 회사의 검사원 입에서 “예술이다”라는 감탄사가 나왔습니다.

K가 2006년 북한을 방문해 찾았던 봉제공장. 사진제공= 필명 이 강
K가 2006년 북한을 방문해 찾았던 한 봉제공장. 천장에 걸린 '자력갱생이 살길이다' 구호가 눈길을 끈다. 사진제공= 필명 이 강

뛰어난 손기술, 정확한 납기..."예술이다, 예술"

그 검사원이 단동의 보세창고에 입고된 평양 B피복회사(C선생의 소속 회사) 제조의 완성품 상자 한 박스를 개봉해 제품을 펼쳐 보고 난 후에 나온 말입니다. 더욱 놀라웠던 것은 평양의 공장에 생산용 자재가 도착한 후 정확히 2주만에 완성품이 신의주-단동을 잇는 압록강 철교(중국명 중조우의교, 북한 명칭은 조중 친선의 다리)를 건넜다는 것입니다.

참고로 의류생산의 납기는 보통 최소 1개월에서 2개월 정도입니다. 모두가 경탄했습니다. K는 그 때의 감격을 아직도 잊을 수 없습니다.

K는 이 첫 번째 주문생산의 멋진 성공이후 1년간, 주문량을 비약적으로 늘이게 됩니다. 사실 당시 브랜드 회사에서는 북한 생산을 말리던 입장이었습니다. K와 파트너로 일했던 한국의 협력사 사장이 주장하고 K의 자신감으로 시작했던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첫 주문의 '예술적 완성'으로 북한 생산에 대한 우려를 일거에 씻어낼 수 있었습니다.

K가 후에 북측 공장을 방문하고 나서 안 사실이지만 북측 공장에 들어가면 재봉기 돌아가는 소리가 중국 공장의 소리와 확연이 다릅니다. 당연히 북측 공장 재봉기 소리가 중국공장의 그것에 비해 매우 부산하고 힘이 있었습니다. 이 소리가 제품의 품질과 생산력으로 곧바로 이어진다는 사실도 알았습니다.

젓가락과 숟가락을 한손으로 동시에 사용할 수 있고 세계의 유수한 대학에서 생명공학 분야의 실험조교가 유난히 많은 우리민족의 저력이 다시금 느껴지는 지점입니다.

K가 방문한 북한 봉제공장. 재봉틀 앞에 앉은 여성 일꾼의 눈이 빛나고 표정이 진지하다. 사진제공= 필명 이 강
K가 방문한 북한 봉제공장에서 일하고 있는 여성 일꾼들 한결같이 눈이 빛나고 표정이 진지하다. 사진제공= 필명 이 강

2010년 5.24 조치 이후로 북측의 수많은 봉제인력이 단동을 비롯한 중국의 여러 지역에 진출했습니다. 그 인력을 수용한 중국측 회사는 거의 다 크고 작은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이들 회사들은 중국측 공인 대비 약 80%의 인력비용을 감당했지만 생산성  및 품질향상으로 올리는 초과 이득은 150%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니 성공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성공 보장의 열쇠는 단연코 손재주 좋은 우리 북측의 동포들입니다.

유엔 제재이후, 제재에 따른 일정대로라면 작년부터 대폭 그 인원이 감축되어야 하는 단동체류 북측 봉제 인력숫자가 예상대로 잘 줄어들지 않는 것은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아마도 성공보장의 열쇠를 절대 놓치고 싶지 않은 중국 측 파트너들의 보이지 않는 '필살기'들이 존재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C선생 "K 실망의 숨소리에 가슴이 메어져서 열심히 했디..."

반면 K는 왜 우리가 이런 좋은 협력을 못하고 있고 기약 없이 기다려야 하는지 알다가도 모를 것 같습니다. 그런 상념이 들 때면 어김없이 평양에 있는 C선생이 생각납니다. K는 생산일정에 문제가 생기면 C선생을 국제전화로 연결해 싫은 소리도 했습니다.

 

K가 북한 봉제 임가공회사와 사업하며 오간 각종 서류들. 조선민경련 발행의 원산지증명서, 조선수출입상품 검사검역위원회의 상품검사증, 그리고 팩스서류들. 사진제공= 필명 이 강
K가 북한 봉제 임가공회사와 사업하며 오간 각종 서류들. 조선민경련 발행의 원산지증명서, 조선수출입상품 검사검역위원회의 상품검사증, 그리고 팩스서류들. 사진제공= 필명 이 강

 

이에 대해 C선생은 이렇게 말했었던 걸 기억합니다. “거.. K선생의 그 실망의 숨소리, 탄식소리에 가슴이 메어져서 정말 열심히 했디...” 그렇습니다. 우리는 상대의 숨소리조차  눈치 챌 수 있는 동일한 유전자를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70년 분단의 벽을 단번에 넘어설 수 있는 바탕이 우리에게 있었습니다.

이는 다른 어떤 나라의 교역 파트너와도 공유할 수 없는 조상들의 선물입니다. 그리고 장래 남북교류협력의 중요한 바탕이 될 것입니다. K는 C선생을 다시 만날 수 있는 그런 세상이 속히 오기를 희망합니다. 그리고 자신과 C선생간에 있었던 것과 같은 수많은 관계가 새롭게 만들어지기를 고대합니다.

● 이 강`(필명)은 2000년대 초반부터 단동에 정착, 다양한 대북사업을 진행했다. 본인 사정상 필명을 쓰기로 했으며, 사진도 싣지 않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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