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헌 앵커 “역사는 세 치 혀로 바뀌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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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헌 앵커 “역사는 세 치 혀로 바뀌지 않는다”
  • 오피니언뉴스
  • 승인 2015.09.02 1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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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력이 크면 저급한 언어로 상대 국가원수를 희롱하진 않을 것”

<황헌(사진) MBC 앵커가 페이스북에 올린 글을 본인의 양해를 얻어 싣습니다.>

 

지난주 한 중진 언론인들과의 저녁 자리가 있었다. 박근혜 대통령의 전승 70주년 열병식 참관 결정이 화제였다. 한미 철통 외교 생각하면 쉽게 내릴 수 없는 결정이라는 데 의견들이 모아졌다. 그러나 다수는 미국이 박대통령 입장 이해할 거라는 생각을 말했다. 그 다음날 미 국무부는 “70주년 열병식 참관을 결정한 박근혜 대통령의 생각을 존중한다.” 는 논평을 냈다.

이 일은 영원한 적도 영원한 친구도 없는 국제 외교무대에서 참 토론하기 좋은 의제임에 틀림없다. 최근 30년 한반도를 둘러싼 외교 관계의 변화를 살펴보면 왜 이게 좋은 의제임이 분명해진다.

노태우 정부 끝시절 한중 수교가 이뤄졌다. 그 직전까지 중국은 우리에게 5성홍기의 공산 빨갱이 국가 ‘중공’이었고 괴물이었다. 중국에게 북한은 혈맹이었다. 러시아는 중러 국경분쟁이 말해주듯 경쟁관계이자 대 서방 공동전선 구축의 측면에선 친구였다. 우리에게도 그 두 나라는 김일성이 일으킨 6.25 이후 오랜 원수였고 가공할 상대였다.

 

일본은 미국과 중국, 소련 사이에서 자국 이익을 위해 처세술을 발휘해 왔다.

노태우 정부 한소수교 이후 상황은 급변했다. 일본에게 중국은 어떤 존재인가. 일본은 전후 복구를 한국전쟁과 베트남전쟁을 통해 빠르게 이뤄냈다. 군수물자 기지 창고 역할과 보급책을 하며 일본 경제는 금세 아시아의 맹주 자리로 올라섰다. 그 틈바구니에서 일본은 중국과 재빨리 관계를 정상화했다. 박정희대통령이 유신독재의 틀을 만들던 1972년 중국과 일본은 국교를 정상화했다. 그 뒤 일본은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사안에 따라 등거리 외교를 했다. 전후 30년 그러니까 1970년대 초반까지 일본은 미국, 소련, 중국과 등거리 외교를 하며 자국 이익을 극대화하는 전략을 취했다. 미국과는 늘 웃는 관계를 유지하려 애썼다. 소련과 북방도서 영토 문제로 다툴 때는 중국에 다가섰다. 센카쿠 열도 갖고 험악해지면 소련과 미국에 동시에 웃음을 지었다. 화장도 짙게 하고. 그게 바로 오늘의 일본을 만든 외교였다. 사람 관계로 보면 그게 곧 처세술이었다.

종전 70년은 일본 입장에선 패망 70년이다. 아베 총리는 그 70년 기념 메시지에 과거에 대한 진정한 반성과 사과는 담지 않았다. 마치 과거 없는 미래도 가능하다는 듯 오직 미래만 언급했다. 일본 국민 70%가 전쟁도 모르는 사람들이니 더 이상 사과의 업보를 그들에게 물려줄 수 없다고만 했다. 그리고는 왜곡했다.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이기는 걸 보며 많은 아시아 아프리카 사람들이 위안을 얻었다고.

아베는 최근 역사를 외면하는 정도가 아닌 역사를 왜곡하는 맘으로 일본의 신 군국화를 지향하고 있다. 삐뚤어진 생각과 말로 역사는 뒤바뀌지 않는다는 건 지난 주말 도쿄 의회 앞에 운집한 12만 반 아베 시위대의 얼굴에서 읽혀지고 또 증명되었다.

아베의 집단자위권 관련 법안을 기사와 칼럼으로 그 동안 적극 옹호해 온 인물이 있다. 바로 노구치 히로유키 산케이신문 정치부문 위원이다. 노구치 히로유키(野口裕之)는 1958년생이다. 게이오대를 나와 미국에서 유학했고 1984년에 산케이신문에 입사했다. 필자와 비슷한 시기에 공부했고 우리가 병역의무 채운 기간 그는 미국 유학을 했다. 어쨌든 1984년에 기자 생활을 시작한 건 같다. 그 뒤 외신부에서 국제 군사문제 담당, 정치부에서 방위청 담당, 외무성 출입기자 반장, 정치부 차장 겸 총리 관저 캡을 두루 맡았다. 일본신문협회가 주는 특종상을 1998년에 받았다. 북한이 일본열도를 관통하는 대포동 1호 미사일 발사실험을 준비한다는 기사로 받은 상이다. 그 뒤 런던 지국장과 정치부 안보담당 위원을 거쳐 현재는 일본에서 알아주는 외교 군사문제 전문 논설위원이다. 정치부 여야 정당과 통일부, 경제부처 반장, 파리특파원, 보도국과 논설위원실 수장을 거쳐 현재 논설위원으로 있는 필자와 지난 31년 기자생활의 시간이 비교된다.

우리가 어릴 때 흔히 ‘민비 시해사건’으로 알아온 명성황후 시해사건은 오늘 필자와 비슷한 같은 연조의 한 일본 논객의 망언 때문에 다시 그 실체가 부각되게 되었다.

명성황후(1851~1895)는 고종의 부인이다. 옛 조선 왕비들이 대개 명문 세도가문의 딸들이었지만 명성황후는 자신의 힘으로 오히려 민씨 일척을 키운 인물이다. 일찍이 서양 문물의 가치를 인식했고 그 때문에 시아버지인 대원군과 갈등을 키웠다. 결국 청나라의 원군에 힘입어 고종과 함께 파란의 구한말 리더십을 구축, 집행한다. 고종의 외교는 모두 그녀의 작품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러시아의 도움도 그녀는 강하게 설파했고 고종은 그걸 따랐다. 오늘 히로유키가 말한 사대외교의 리더십, 특히 박근혜 대통령과 명성황후를 빗댄 건 바로 이 대목을 염두에 둔 전형적 역사왜곡의 틀을 논설이나 칼럼에 차용한 오류의 케이스이다.

 

“명성황후는 일본을 반대했고, 조선의 이익을 위해 몸을 바쳤다"

명성황후를 묘사한 객관적 자료가 하나 있다. 선교사 언더우드의 부인이 왕비를 두고 한 말이다. 그녀는 이렇게 명성황후를 그렸다.

“그녀의 지식은 주로 중국에서 얻은 것이었지만 세계 강대국과 그 정부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나에게 많은 질문을 던졌고 자기가 들은 것을 모두 기억하고 있었다. 그녀는 섬세한 감각을 가진 유능한 외교관이었고 반대세력의 허를 찌르는 데 능했다. (중략) 그녀는 일본을 반대했고 애국적이었으며 조선의 이익을 위해 몸을 바치고 있었다. 그녀는 아시아의 그 어떤 왕후보다도 그 수준을 훨씬 뛰어넘는 여인이었다.”

1895년 청일전쟁에서 승리해 기세가 등등한 일본 앞에서 청국과 러시아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며 일본 견제의 수단으로 그들을 활용하는 명성황후는 일본인들에게 가시 같은 존재였을 것이다. 결국 그들 일본군은 한밤중 왕비의 침소를 덮쳐 무참하게 살해하는 세계사 어떤 침략 전쟁사에도 없는 왕비 시해라는 중대 범죄를 저지르고 만다. 고종은 아내를 잃고 힘도 잃었다. 그래서 그 다음해인 1896년 고종은 러시아관으로 피신하는 ‘아관파천’을 단행한다. 역사는 불행하게도 그로부터 10년 뒤 전개되는 러일전쟁에서 또 한 차례 일본에게 승리를 안겨준다.

 

“국력이 우위에 서면 생각의 틀에 착란의 세포가 들어차지 않을 것”

오늘 열리는 한중정상회담은 역사를 왜곡하려는 아베의 일본에게 어떤 메시지로 전해질까. 또 내일 천안문 망루에 중국 주석과 나란히 서서 전승 70주년 기념 열병식에 손을 흔들 박근혜 대통령의 모습이 어떤 의미로 다가갈까. 결국 역사는 힘이 이긴다는 걸 보여주었다. 국력이다.

우리의 국력이 일본보다 우위에 서면 히로유키 같은 생각의 틀에 커다란 착란 세포가 들어차있는 자들이 논객이라 자처하며 저급한 언어와 사실 아닌 거짓으로 상대국 국가 원수를 희롱하는 일이 없을 것이다. 노구치 히로유키(野口裕之). 당신의 이름을 서술형으로 풀어보면 “들판의 입이 여유있게 너그럽게 하라” 이다. 부친이 지어준 이름이라면 아마도 “아들아, 세상을 살아가면서 좋은 말로 사람들에게 너그럽게 하라.” 는 뜻을 갖고 작명했으리라. 아버지의 뜻이 그럴진댄 어찌 그 뜻조차 헤아리지 못할까. 역사는 결코 세 치 혀에 의해 바뀌지 않는다.

 

<황헌 앵커가 진행하는 MBC라디오 아침 8시 ‘뉴스의 광장’ 9월 2일자 클로징 멘트입니다.>

“역사는 삐뚤어진 생각을 멋대로 표현한다 해서 바뀌지 않는다.”

박근혜 대통령이 오늘 한중 정상회담을 갖습니다. 내일은 천안문 망루에서 항일전쟁 승리 70주년 기념 열병식도 참관합니다. 근데 일본 산케이신문은 박대통령을 사대외교를 한다며 야만적 일본인들에 의해 희생된 명성황후에 비교하는 배설행위를 신문 칼럼이라는 형식으로 해버렸습니다. 재론할 가치도 없지만 당신 히로유키 산케이신문 논설위원에게 “역사는 삐뚤어진 생각을 멋대로 표현한다 해서 바뀔 수 있는 게 아님”을 MBC 논설위원인 제가 전하면서 오늘 뉴스를 마치겠습니다. 함께 해주신 여러분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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