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상희의 컬쳐 인사이트] 괴물이 돼버린 가난한 자들의 레퀴엠 ‘기생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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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상희의 컬쳐 인사이트] 괴물이 돼버린 가난한 자들의 레퀴엠 ‘기생충’
  • 권상희 문화평론가
  • 승인 2019.06.1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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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뉴스=권상희 문화평론가] 블랙코미디에서 스릴러를 거쳐 서스펜스에 이르기까지 예측불허 스토리와 장르의 변주는 이 작품이 왜 수작(秀作)인지를 알게 해준다.

소문난 잔치엔 먹을 것이 가득했다.

완벽함이 주는 만족감,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이 만족감이란 게 가득 채워짐이 아닌 헛헛함을 넘어선 공허감이다. 수많은 영화를 보고도 전혀 경험해보지 못한 정서에 생경함마저 느껴졌다. 

◆선과 악의 구분은 우매한 짓이다

부자와 가난한 자는 흔히 악인(惡人)과 선인(善人)으로 묘사될 만큼 아주 오래 전부터 도식화된 모델이다. 그러나 영화 ‘기생충’에서 부자인 박사장(이선균)네는 악인의 경계를 넘어서지 않는다. 뉴스에서 흔히 접하는 갑질도 볼 수 없다. 그들이 말하는 ‘선 지키기’를 꽤나 잘 하는 모양새다. 

온 가족이 박사장네 집에 기생하게 돼버린 기택(송강호)네 가족. 그들의 거짓과 술수는 ‘먹고사니즘’을 위해 눈감아 줄 수밖에 없다.

기생충이 돼 버린 그들에게 또 다른 기생충은 용납될 수 없다. 문광(이정은)네 부부와 싸움을 벌여서라도 자신들이 기생하는 영역을 결코 빼앗겨서는 안 된다. 을과 을의 대결은 그야말로 사투(死鬪)다.

살기 위해 목숨을 걸어야만 하는 싸움, 이쯤 되면 선과 악을 구분한다는 것 자체가 매우 우매한 짓이다. 기생충이 괴물이 되어도 비난할 수 없다. 오직 살아야 하니까. 

영화 '기생충' 스틸 컷.
영화 '기생충' 스틸 컷.

기택네 반지하 계단과 박사장네 지하 벙커로 향하는 계단은 가파르다. 가난이 주는 허덕임을 형상화한 공간이다.

가난함은 누구에게나 평등할 것만 같은 자연의 혜택, 햇빛조차도 허용하지 않는다. 자신의 대저택에 그런 공간이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하는 박 사장네 가족에게 지하라는 곳은 부자와 빈자(貧者)의 선을 나누는 곳이기도 하다. 자신들이 알 필요조차 없는 공간인 셈이다. 

반지하와 지하벙커 그리고 대저택, 이렇듯 극단적인 느낌을 주는 공간의 구분은 다름 아닌 계층을 넘어선 전복(顚覆:뒤집기) 불가능한 고착화된 계급사회를 뜻한다.

◆선을 침범하는 ‘냄새’, 그로 인한 일시적인 전복(顚覆)

반면 기택에게서 나는 특유의 ‘반지하 냄새’는 바람을 타고 선을 넘나든다. 어쩌면 그런 이유로 박사장은 병적일 만큼 ‘냄새’에 집착하는지도 모른다.

기택네 가족이 기생하며 숙주(박 사장네 가족)를 좀 먹어가는 것은 눈치 채지 못하지만 후각을 공격해대는 그것은 부자의 선을 가난한 자가 단번에, 그것도 직접적으로 침범한 것이 돼 버린다. 그래서 몹시 불쾌하다.

영화 초반부터 내내 어둡고 음침한 분위기는 ‘기생충’의 결말이 어떻게 끝날지를 예감하게 한다. 가장 맑고 화창한 날 다송이(정현준)의 생일 파티, 지하벙커에서 지상으로 올라온 근세(박명훈)는 부자들의 행복에 난도질을 해대기 시작한다.

햇살이 비추는 곳에서 비극은 훨씬 선명하게 보이는 법. 이 비극은 조금도 은폐될 수 없다.

피가 낭자한 상황에서조차 박사장은 근세의 냄새에 불쾌감을 표한다. 냄새는 전복(顚覆)을 불러온다. 부자와 가난한 자의 선긋기는 죽음을 불러오며 끝나는 듯 싶지만 지하벙커는 여전히 존재한다. 그리고 변함없이 가난한 자의 몫이다. 

이 영화에서 판타지라고는 고작 초반 기택네 가족의 모습이 전부다. 와이파이조차 잡히지 않는 반지하 방에서 그래도 네 명의 가족은 불편해 보일 뿐, 불행해 보이지 않는다. 기우(최우식)와 기정(박소담)은 무능한 아버지를 힐난하지 않는다.

일종의 가난에 대한 체념일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불편함이 곧 불행이 되는 시대, 쉽지 않은 모습인 건 사실이다. 가난해도 가족이 와해되지 않는 모습, 그걸 판타지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음이 서글픈 현실이다. 

봉준호 감독은 그 이상의 판타지를 선사하지 않는다. 가능성이나 희망을 제시하는 드라마 대신 냉엄한 현실을 선택한다. 해피엔딩으로의 말도 안 되는 봉합이 현실과는 얼마나 큰 괴리감을 유발하는지 잘 알기 때문이다.

그러나 관객들은 불편하다. 현실보다 더 현실적이기에. 영화조차 희망을 거세해 버렸기에. 

‘기생충’은 괴물이 될 수밖에 없었던 가난한 자들의 레퀴엠이다. 

 

●권상희는 영화와 트렌드, 미디어 등 문화 전반의 흐름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갖고 있다. 글을 통해 특유의 통찰력을 발휘하며 세상과 소통하길 바라는 문화평론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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