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 맛보기 단동] ⑨ 2000년의 두 사건
상태바
[통일 맛보기 단동] ⑨ 2000년의 두 사건
  • 필명 이 강
  • 승인 2019.06.08 08:2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그해 6월 남북공동성명 발표..찬물 끼얹은 '납꽃게 사건'
단동에 남북 최초 합작법인도 출범...10년뒤 5·24조치후 문닫아
평화 전진 막은 이들 누구..사실규명도, 반성도 없어

[오피니언뉴스= 필명 이 강 통신원] 새로운 천년의 시작된 2000년 6월에는 고 김대중 대통령이 평양을 방문하고 역사적인 6.15 남북공동성명이 발표됐습니다. 그 즈음에 단동과 한국에선 이른바 납 꽃게 사건이 있었습니다.

200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우리나라는 중국 단동에서 많은 량의 꽃게를 수입했습니다. 현재는 거꾸로 한국에서 중국으로 수출이 되기도 한답니다. 꽃게는 북방꽃게와 남방꽃게로 나뉘는데 우리나라 시장에서는 서산 앞바다부터 연평도, 해주앞바다에 이르는 어장에서 잡히는 북방꽃게가 각광을 받습니다.

중국 남쪽 해역에서 잡히는 남방 꽃게는 절단 냉동해 양념무침 꽃게로 유통되는 고로 그 품질상 지위는 북방꽃게와 비교될 처지가 아닙니다. 4월부터 잡히는 봄 꽃게는 암컷이 알을 품고 있어서 주로 간장 게장용으로, 가을 꽃게는 수컷이 살이 꽉 차서 주로 찜용으로 대접받습니다.

2000년 6월15일 평양을 방문한 김대중 대통령이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과 역사적인 6.15남북공동선언을 발표했다. 당시 북한 군부내 일부세력에서 남북간 긴장완화를 거부하는 기류가 있었다. 사진= 연합뉴스
2000년 6월15일 평양을 방문한 김대중 대통령이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과 역사적인 6.15남북공동성명을 발표했다. 당시 북한 군부내 일부세력에서 남북간 긴장완화를 거부하는 기류가 있었다. 사진= 연합뉴스

 

6·15공동성명 발표되던 시기에  '중국 납꽃게 사건'

2000년대 초반에 단동페리를 타고 단동항에 내리면 여기 저기 꽃게 집산지로서의 흔적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단동항 주변에는 꽃게를 수입하기 위해 와 있는 한국의 꽃게 수입상들이 군데군데 진을 치고 있었습니다. 수산물 중에서 비교적 고가의 어종이었으므로 단동항구를 중심으로 움직이는 거래 금액도 만만치 않은 규모였습니다.

그런데 단동항을 거쳐 수출돼 인천항에 수입된 냉동꽃게 안에서 다량의 납조각이 발견된 것 또한 2000년 7월경의 일입니다.  당시 금어기가 7월부터인 점을 감안하면 5, 6월 조업된 꽃게들 중에 납이 들어갔던 것이 틀림없었습니다. 한국의 언론들은 일제히 중국을 향해 포문을 열었습니다.

당시 중국산 식품이 비위생적이라는 인식이 보편적이었는데 거기에다 수산물의 무게를 늘이기 위해 식품에 금속붙이를 넣었다는 행위에 많은 국민들이 공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당시 중국은 이를 강력 부인합니다. 수 주(週)후 KBS를 비롯한 합동 취재단이 단동항 근처의 수산물 보세창고를 방문하면서 중국을 향한 공격이 멈춰지게 되지만 결과적으로 중국의 '마늘 수출금지'라는 보복성 무역조치로 이어지게 됐습니다.

북한 해역에서 잡힌 꽃게, 선상교역 거쳐 '중국산' 변신

단동이 한국을 제외하고 북방 꽃게의 최대 집산지이지만 단동 앞바다에서 꽃게가 조업되는 게 아닙니다. 단동항에 집하된 꽃게는 살아있는 것이든, 냉동의 것이든지 간에 모두가 북한 해역, 그 중에서 해주 앞바다에서 잡힌 것이라는 사실이 간과됐습니다.

조업하는 배의 국적이 어느 나라이냐는 사실에 의해서 수산물의 원산지가 결정되기도 하지만 중간에 '선상교역'처럼 정식 수입통관 절차없이 중국항구에 입하돼 가공된 수산물은 그대로 'Made in China'가 됩니다. 한번만 더 생각해 보면 알 수 있는 일로 마늘보복이라는 괜한 손해를 보았습니다.

이 때 발생한 우리나라의 손해금액에 대해 '누군가가 책임져야 한다'는 한마디의 말도 없었던 것은 매우 당연했습니다. 중간에 이 꽃게의 거래와 관련된 사람들이 한국의 세관 당국 등의 조사과정으로 고초를 겪었음은 물론입니다. 지금도 납을 누가 넣었는지에 대해 명시적 결론을 내리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6.15 남북공동 성명이 있었던 6월경에 조업된 꽃게에서 그런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당시 북측의 해상 조업은 대부분 군부대 산하의 무역회사들이 관장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90년대에도 북측에서 일본으로 수출되는 냉동 도루묵에 납조각이 들어가 있던 적이 있었습니다. 일본과의 외교관계에 대한 북측 일부 세력의 의사표시가 그 납조각이었다는 것이 당시의 중론이었습니다.

단동에서 하나비즈프로그램센터가 있던 건물. 대북제재의 여파로 단동도 경기가 좋지 않아 이 건물 2층부터 4층까지 사무실이 대부분 공실이다. 사진= 이 강 통신원
단동에서 하나비즈프로그램센터가 있던 건물. 대북제재의 여파로 단동도 경기가 좋지 않아 이 건물 2층부터 4층까지 사무실이 대부분 공실이다. 사진= 이 강 통신원

2010년 5·24조치 이후 남북 최초 합작IT 회사 문닫아
 
2000년도에 단동에 납 꽃게 사건만 있었던 것은 아니고 단동시내에서는 남북교류협력사에 의미 있는 움직임이 있었습니다. 한국의 '하나비즈'라는 회사와 북측의 민경련 산하 광명성총회사 및 평양정보센터 간의 합의로 사상 최초의 남·북 합작 중국법인이 출범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하나프로그램센터는 남북교역의 역사에 의미 있는 족적을 남긴 채 2010년 5·24 조치 이후 그 여파로 몇 년 더 전진을 못하고 문을 닫았습니다.  평균 50여명의 북측 IT 기술자들이 10년 넘게 단동에 상주를 했고 남측의 프로그램 용역 발주회사들의 왕래가 빈번했습니다. 주기적으로 남과 북의 기술관련 회의나 교육 등의 프로그램이 활발히 진행됐습니다.

IT라는 영역에서 남과 북이 손을 잡고  세계 최고의 IT강자를 이루려는 꿈이 그 안에서 싹트고 있었다고 말하는 것이 결코 과장된 표현은 아닐 듯합니다.

두사건 가까이 있던 대북사업 1세대 한 분, 지난 5월 갑자기 운명

단동에는 남과 북의 최초 합작 중국법인인 하나프로그램센터가 있었습니다. 2000년도 6.15선언의 시기에 단동에는 납 꽃게 사건도 있었고 하나프로그램센터의 출발도 있었습니다. 이 두 사건의 한복판에 있던 대북사업의 1세대격인 한 분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분이 지난 5월에 갑작스럽게 운명을 달리 하셨습니다. 안타까운 것은 60대 초반의 이른 나이였을 뿐만 아니라 작년부터 시작된 남북 화해 모드에 힘입어 다시금 대북사업의 준비를 열심히 하고 계시던 와중의 일이어서 그렇습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부디 고인의 꿈이 다시금 이 단동의 하늘 아래 활짝 만개하게 될 날이 속히 오기를 그려볼 따름입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0 / 40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