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계 자본 불공정거래 행위 늘어나
헤르메스, 삼성물산 ‘M&A’설로 292억원 시세차익
서울올림픽이 개최된 1988년, 그해 4월 증권감독원(금융감독원의 전신)은 최초로 상장기업의 내부자거래를 적발했다. 그로부터 30년이 흘렀다. 금융감독원이 얼마 전 펴낸 '자본시장 불공정거래 조사'는 자본시장 30년의 역사를 담았다. 금융감독원의 도움과 다방면의 취재를 통해 30년간 적발된 불공정거래 주요사건을 정리한다. 이 연재 시리즈의 목적은 자본시장의 건전한 발전과 자원의 효율적 배분에 일조한다는 데 있다. [편집자 주]
[오피니언뉴스=김솔이 기자] 국내 증시에서 외국인 투자자는 ‘큰 손’으로 통한다. 이들은 외국인 투자자의 주식 취득이 허용된 1992년부터 존재감을 키워오다 1998년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 당시 투자 한도 확대를 계기로 국내증시에 밀려들어왔다.
국내 주식시장 규모가 커진 것도 이때부터다. 특히 투자자금이 원활하게 유입되면서 주식시장의 유동성이 증가했고 외국인 투자자들의 핵심정보‧투자기법은 주식시장의 효율성을 높아지게 했다. 글로벌 시장에서 한국의 경쟁력이 확대된 셈이다. 또 기업들의 경영 투명성‧합리성 측면에서 이들이 기여하는 점도 무시할 수 없다.
그러나 외국계 자본에 밝은 면만 있는 건 아니다. 만약 국내 주식시장에서 외국인들이 대규모로 빠져나갈 경우 거시경제 운용에는 ‘빨간불’이 켜진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를 돌이켜보면 외국인 투자자금의 유‧출입으로 금융시장의 변동성이 커졌고 안정성에 대한 우려가 제기됐다.
◆ 소버린, 2년 4개월만에 9500억원 시세차익
2000년대 초 발생한 SK와 소버린자산운용의 경영권 분쟁 사례는 외국계 자본의 어두운 그늘을 보여준 사건이다. 2003년 계열사의 분식회계·배임 문제에 시달리던 SK의 주가는 2만원에서 5000원으로 주저앉았다. 당시 소버린은 자회사 크레스트증권을 통해 SK의 지분 14.99%를 사들였다. 외국계 자본이 국내 대기업 최대주주가 된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당시 소버린은 주주가치를 확립해 SK를 이상적인 한국의 기업지배구조 모델로 만들겠다고 내세웠다. 그 일환으로 오너 일가의 영향력에서 자유로운 사외이사 선임을 시도하기도 했다. 하지만 주주총회에서 과반 이상의 지지를 받지 못해 계획은 무위로 돌아갔다. 이후 2005년 7월 SK주식을 전량 매도, 9500억원의 시세차익 챙긴 후 한국을 떠났다. 2년 4개월 만에 4배의 이익을 본 것이다.
소버린뿐 아니라 국내증시에서 외국계 자본이 늘어나면서 이들의 불공정거래 행위도 늘어나기 시작했다. 주로 적대적 인수합병(M&A) 위협으로 주식 가격을 일시적으로 상승시킨 뒤 주식을 매각해 차익을 실현하려는 불공정 행위였다.
◆ “적대적 M&A 가능”…헤르메스, 2004년 삼성물산 공격
대표적인 사례가 1993년 한국시장에 진출한 영국계 펀드 헤르메스다. 이들은 영국의 ‘헤르메스 퇴직연금펀드’ 운용을 위해 파생된 펀드 중 하나로 2005년 2월말 기준으로 약 5000억원을 국내시장에 투자하고 있었다.
한국 내 헤르메스 펀드는 2003년 11월부터 2004년 3월까지 삼성물산 총 발행주식의 5%에 해당하는 770여만주를 843억원 규모(평균 매수단가 1만845원)로 매입했다. 당시 삼성그룹 내에서는 삼성생명이 삼성물산 지분을 가장 많이(4.8%) 보유하고 있었는데 이보다 많은 수준이었던 셈이다.
이후 헤르메스는 언론을 이용, 2004년 3월부터 9월까지 총 7차례의 보도를 통해 공격적 M&A 가능성을 적극적으로 홍보했다. 헤르메스 삼성물산 지분을 추가 취득하고 경영진과의 면담을 통해 우선주 매입 소각 등 요구사항을 꾸준히 전달할 계획이라는 내용이었다.
특히 헤르메스의 펀드매니저인 R씨(외국인)는 같은해 11월 29일과 12월 1일 두 차례의 A일간지 보도에서 삼성물산의 M&A 및 헤르메스의 M&A 지원 가능성 등을 꾸준히 강조했다. 시장에서는 삼성물산이 ‘제2의 SK’가 될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됐다.
그러나 R씨의 주장을 바탕으로 한 A일간지 보도가 나간 뒤 주가가 오르자 헤르메스의 태도가 돌변했다. 이들은 12월 3일 장내에서 보유 주식 전량을 장내에서 매도했다. 5일 뒤인 8일 ‘주식대량보유변동상황보고’에서는 주식 매각 목적을 ‘차익실현’이라고 명시했다.
금융감독원에서는 헤르메스의 사기적 부정거래 행위 의혹을 감지, 기획조사에 착수했다. 핵심은 헤르메스의 A일간지 인터뷰와 주식매도 간에 상관관계였다. 만약 인터뷰 이전에 주식매도를 결정한 사실이 입증된다면 사기적 부정거래에 해당했기 때문이다.
◆ 법원, 헤르메스에 무죄 선고
실제 금감원 조사 결과 헤르메스는 자체 펀드 분석결과를 토대로 2004년 11월 초에 이미 삼성물산을 포함한 삼성관련 주식의 편입비율을 축소하기로 결정했었다. 그 당시 삼성물산의 일 거래량은 150만주 내외로 헤르메스가 보유한 물량인 770만주를 소화하기에는 어려운 여건이었다.
이 가운데 R씨는 국내 거래창구로 이용하던 대우증권의 김모씨의 도움을 받아 조선일보와 인터뷰를 진행한 것이었다. 또 인터뷰 후 기자에게 연락해 기사 제목에 M&A 가능성이 부각되도록 요청하기도 했다. 이후 12월 1일 A일간지 보도에 주가가 오르고 거래량이 늘어나자 R씨는 김씨와 삼성물산 지분 처분 방안을 논의했고 이틀 뒤 이를 시행, 292억원의 시세차익을 봤다.
증권선물위원회는 금감원 조사 결과 헤르메스의 삼성물산 주식 매매 관련 일련의 행위가 사기적 부정거래 금지위반에 해당한다고 판단, 헤르메스와 매니저 R씨를 검찰에 고발했다. 검찰 역시 같은 혐의로 이들을 기소했다. 이는 국내에 진출한 외국계 펀드가 불공정거래 혐의로 기소된 첫 사례였다.
하지만 법원은 이들에게 최종적으로 무죄판결을 내렸다. 당시 재판부는 “R씨의 조선일보 인터뷰 내용은 가정적·원론적 발언에 불과해 허위 기망요소가 있다고 볼 수 없다”며 “M&A가능성을 언급한 것은 이미 알려진 사실을 재확인한 것으로 일반 투자자를 속이려 했다고 볼 수 없다”고 강조했다. 검찰의 기소 내용이었던 사기적 부정거래 혐의가 받아들여지지 않은 셈이다.
다만 이 사건은 금융당국에서 적대적 M&A를 명분으로 시장질서를 저해하는 외국계 자본에 대해 경고를 보냈다는 점에서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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