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지윤의 Ars Vitae] 어느 누가 답을 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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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윤의 Ars Vitae] 어느 누가 답을 줄 것인가
  • 박지윤 서울대법학연구소 선임연구원
  • 승인 2019.05.19 11:1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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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 내부의 자아가 만드는 것들이 뭔지를 알아야
외부 심판자의 법이 아닌, 내면의 법을 파악하고 살아야
박지윤 선임연구원
박지윤 선임연구원

[박지윤 서울대법학연구소 선임연구원] “어느 누가 답을 줄 것인가.”

이 제목은 2017년 11월 9일부터 2018년 2월 18일까지 있었던 “어느 누가 답을 줄 것인가-1980년대~1990년대 청주미술”전시에서 제목을 가져왔다. 
 
답이 없다, 인생에. 말하면 뭐하나, 누구한테 말을 하나, 해답은커녕 대답도 없는데. 뭐가 문제인지 굳이 말하지 말아야 네가 살 수 있다는 뜻은 여기저기서 눈치로 코치로 전해진다. 그래도 이건 아니지 싶어서 한두 마디 거들어 보려면, 어느새 자격이 먼저 논해진다.

아니, 누구씨. 그것도 모르고 도대체 XX생활을 어떻게 해? 그건 당신 생각인거지. 그게 싫으면 그만 두고. 바뀌는 건 없으니까 말이야.

그래서 우리는 대부분 말없이 각자의 직분에 따라 하루를 충실히 살아가게 된다. 말없이. 말을 버리고. 할 수 없는 말을 욕설로 대신하고, 때로는 말을 뱉어도 나를 위협하지 않을 상대를 골라 내뱉으면서, 이미 주어진 규칙들을 법으로 맹신할 수밖에 없게 되면 차차 무감각해져 갈 것이다.   
 
사는 것처럼 한번 살아보고 싶은데, 도무지 뭘 하면 사는 것처럼 살 수 있을까. 이 상상에 대한 답은 대체로 정해져 있는 듯하다. 많이 벌고 많이 쓰고 사다리 위를 오르는 삶, 바로 남들이 선망하는 성과물을 내는 삶이다. 그런데 사회가 만들어내라고 하는 이런 성과물을 놓고 애초에 우리가 만들고 싶었던 것이 무엇이었는지를 다시 묻는 것은 무리일까. 

우리가 만들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가 만들고자 했던 것은 무엇일까. 다른 누구 아닌 바로 나의 인생, 결과로 대체될 수 없는 삶을 지금 살고 있는 것일까. 모든 인간은 존엄하다는 법의 조문은 장엄한 탓에 멀게만 느껴지고, 한줌의 가치를 모르는 대가로 살 수 있는 것이 널린 이 마당에. 그래서인지 어떤 이들은 자신들이 만들어 내는 일이 무엇인지를 자신이 모르기를 배운다.

모르면 무엇이 문제인지도 파악하지 못하고 문제를 제기할 불편함도 없을 것이며 그렇게 온 세상이 조용해지면 곧 평화로워질 것이기 때문이다.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구스타프 클림트 미디어아트 전시회. 사진=AFP연합뉴스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구스타프 클림트 미디어아트 전시회. 사진=AFP연합뉴스

당신이 만들어 내는 법을 알라

그러나 과연 그럴까. 여기에서 우리가 간과하기 쉬운 진실은 법체계의 작동이 외부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내부에도 있다는 사실이다. 만들어진 외부의 법과 상호작용하면서 사람들이 만들어 내고 있는 숨어 있는 법이 있다.

이 법은 발생한 사건에 맞는 법을 이끌어내고 맞서는 암묵적인 법으로 몸에 배이고 깃든다. 드러나 있는 법 이면에서 요동치는 이 법은 결정권을 가진 자에 의한 법의 해석만이 심판이 아니라는 감춰진 사실을 한순간에 찬란하게 드러낸다. 우리는 세상의 법에 처해지는 것만이 아니다.

외부의 법만 법이라 따르면서 사는 자는 삶을 그 법에 제물로 바치게 된다. 어쩌면 자신의 법을 외면하고, 다른 이들의 삶을 외면한 채로 주어진 법에 그저 복속시키고 마는 것, 그것이 바로 아렌트가 지적한 '악의 평범성'의 본모습일지도 모른다. 반면에 인간다운 삶은 법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삶, 삶의 예술로 법을 생성하는 삶이다.

당신의 법을 생성하라

주어진 법을 발생한 사건에 매개하는 법에의 생성은 전문적인 법조인의 능력에만 달린 것이 아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이와 같은 힘을 가지고 있다. 쉴러는 '인류의 미적 교육에 관한 편지'중 15번째 편지에서 “인간은 유희하는 동안에만 온전한 인간”이라고 하면서, 이것이 “아름다운 것의 기예의 건축물, 그리고 그보다 훨씬 더 어려운 삶의 기예의 건축물 전체를 떠받쳐” 줄 수 있다고 한다. 필자는 그가 말한 기예가 바로 삶의 예술인 동시에 인간다운 삶을 위해 법을 생성해내는 역량의 창출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니 어느 누구의 답에 의존할 필요 없다. 당신의 법을 생성하라. 그 보이지 않는 법의 창출이 다가올 우리 삶을 만들어갈 것이다.  

박지윤은 이화여대에서 법철학으로 박사학위를 받고 현재 서울대학교 법학연구소 선임연구원으로 있다. `나와 공동체`를 만드는 예술로서의 법을 탐구하고 실험한다. 라틴어 Ars Vitae는 영어 'Art of Life'로 번역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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