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 맛보기 단동] ⑥남과 북의 만남 그리고 감시와 견제
상태바
[통일 맛보기 단동] ⑥남과 북의 만남 그리고 감시와 견제
  • 필명 이 강
  • 승인 2019.05.11 09:5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남·북한인, 조선족, 화교, 중국인이 서로 협력하며 견제하는 공간
조선족과 화교, 남북한관계 급속도 발전에는 `경계감` 가져
중국 정보기관, 남북한인 직접 접촉 '경고'...`감시의 눈` 작동

[오피니언뉴스=필명 이 강 통신원] 단동에는 우리말(한국어 또는 조선어로 표현)을 생활어로 전용하거나 일부 사용하고 있는 네 종류의 부류가 있습니다.

우선 국적별로 구분해 중국 국적자 중에서 우리말을 사용하는 사람들은 조선족과 화교입니다. 아시다시피 조선족은 우리민족이나 중국 국적자입니다. 단동에 약 2만 여명 넘게 살고 있습니다. 호적 기준의 숫자이므로 다른 지방 호적 인구까지 합치면 이 수치보다는 훨씬 많은 조선족이 단동에 사는 것으로 추정됩니다.

단동 시내 거리를 지나가는 북한 여성들. 사진= 이강 통신원
단동 시내 거리를 지나가는 북한 여성들. 사진= 이강 통신원

 

한국말 사용하는 조선족, 북출신 화교...남북교역 중개자

중국의 여러 다른 지역, 특히 조선족의 중국내 기원지라 할 수 있는 동북삼성의 도시들과 달리 단동시는 조선족 인구가 늘어나는 추세에 있는 도시입니다. 그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동북삼성에서 한국에 취업 등으로 나갔다가 중국으로 다시 돌아오는 조선족 인구 중 많은 숫자가 단동에 정착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단동은 한국과의 여객항선이 있어서 한국과의 접근성도 좋고 자신들의 고향인 동북삼성과의 접근도 비교적 용이하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 이유는 북한입니다. 단동은 북중 교역량의 약 80%가 이동하는 물류 중심에 있습니다. 따라서 단동은 북한과의 무역과 물류 관련분야의 취업 및 사업 기회가 있는 곳입니다. 더구나 남북교역이 활발했던 2010년 이전의 경우는 더욱 그러했습니다. 북중 교역 물량뿐만 아니라 남북교역의 막대한 물량이 단동을 중개지로 해 교통됐기 때문입니다.

단동에 유입된 조선족은 북한과의 혈연적, 역사적 연고를 배경으로 북측과의 무역을 담당해 왔고 남북교역이 활발했던 시기에는 한국 기업들의 조력자나 직원 또는 파트너로서의 역할을 수행했고, 한 편으로 북측 기관 및 상사의 대리인 또는 파트너(대방)역할을 담당하기도 했습니다.

두 번째 부류인 화교는 북한에서 태어나고 자란 중국 국적자들 입니다. 과거 청조 말기부터 중국의 문화혁명 시기에 이르기 까지 정치적 경제적 이유로 우리 한반도로 중국인들의 이주가 있었습니다. 이주 과정에서 배를 타고 상륙한 곳이 북측이면 북한 화교, 남쪽이었으면 남한 화교가 된 것입니다.

이들은 대체로 북한이 어려워지게 된 '고난의 행군'시기 이후에 대거 중국으로 다시 회국하기 시작합니다. 주로 젊은 층이 일자리와 사업의 기회 또는 교육의 기회를 얻고자 중국으로 넘어와 호적을 취득하는 절차를 밟습니다. 북한에서 넘어온 이 화교들 대부분은 단동에 정착해 살게 되는데 많은 수가 북중 간의 보따리 무역으로 불리는 소규모 무역 활동부터 시작합니다.

이 중에서 능력이 있는 사람들은 양국 무역의 '큰 손'으로 성장하기도 합니다. 역시 남북교역이 활발했던 시기에는 조선족과 같이 남측이나 북측의 대리인, 조력자 역할을 담당하기도 했습니다. 이들의 특징은 문화적으로 조선족 보다 훨씬 '조선(북한)스럽다'는 것입니다. 태어나고 자랐고 북측에서 교육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나머지 두 부류는 당연히 남과 북측의 사람들입니다. 남과 북 모두 단동에 상주하는 인구가 있고 출장자 들이 있습니다.

삼국기가 걸려있는 단동의 식당. 사진= 이강 통신원
한국, 조선, 중국의 삼국기가 걸려있는 단동의 식당. 사진= 이강 통신원

 

남북관계 급속 전진시 '중개자役 잃을까' 걱정하는 이들도  

이 네 부류의 언어 능력치를 비교 해보면 먼저 한국말(북측 표현으로 조선말) 기준으로는 남과 북측 사람들 〉화교 〉조선족 순이 되고 중국말로 보아서는 조선족 〉화교 〉남과 북측 사람들 순서가 됩니다.

아무튼 단동에서는 우리말을 하는 이 네 가지의 부류가 북중 교역과 남북교류의 마당에서 때로 서로 협력하고 때로는 견제하기도 하면서 얽히고설켜 집니다.

우리나라 '남북교류협력법'에서는 북한주민 접촉의 범위를 넓게 정의하고 있어 북측 사람 또는 북측의 기관을 접촉할 목적으로 중국(단동)의 제3자인 조선족, 화교를 포함한 중국인을 접촉해도 북한주민접촉으로 간주합니다.

그래서 단동의 이 네 가지 부류 사람들은 실제로 남북교류 협력사에서의 실체적이고 법적인 주체들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화교나 조선족은 남북의 교류협력이나 남북관계에 대한 입장이 북이나 남측 사람들과는 약간 다릅니다.

당연히 물론 그들도 현재와 같은 촘촘하고 엄중한 제재를 원하지도 않고 힘들어 하고 있으며 개선되기를 희망합니다. 그리고 남북관계가 실질적으로 좋은 방향으로 발전되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5.24 조치가 한꺼번에 없어지기를 바라지는 않습니다. 이들 사이에는 남북관계가 너무 빠른 속도로 진전되거나 전면적인 소통의 관계로 발전되는 것에 대한 거부감이나 두려움 또한 있는 것입니다.

자신들의 중개자 또는 대리인 격 지위를 잃을 정도의 남북관계 발전은 곧 자신들의 경제적 이익의 감소나 박탈로 이어지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단동에 15년 이상 거주했고 주로 대북사업을 해온 L은 지금도 이 나머지 세 부류와 어울리는 관계를 맺고 삽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곳이 단동에서의 생활입니다. 2010년 5.24 조치는 L과 같은 남측 사람들을 대북교역의 장에서 강제 퇴출시켰습니다. 따라서 L씨를 포함해 남아 있던 남측 사람들은 극심한 경제적 위치변동을 경험하게 됩니다.

실제로 그의 직원들 몇은 5.24조치 이후 독립했고 북을 상대로 직접 교역을 해 2~3년 만에 괄목할 만한 사업적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L 자신은 2~3년간 곧 이루어지리라 믿었던 5.24조치의 해제를 기다리며 모아놓은 자산을 소진하고 있었습니다.

중국 당국 `견제와 감시` 강화...남북교역 사업가들 `조심 또 조심`

돌이켜 생각해보면 L은 그동안 단동에서 대북 사업을 해오면서 셀 수도 없이 많은 견제를 중국친구들로부터 받아왔습니다. 특히 북측 대방과 직접 연결하는 일들에 대해 그렇습니다.

중국 사람들은 L이 북측 대방들을 직접 연결하고 만나는 일들에 대해 처음에는 희귀하거나 신기한 일로 여기다가 나중에는 위험한 일이라는 것을 주지시킵니다. 충고 형식의 경고입니다. 이러한 사정은 북측 인사들에게도 비슷하게 적용됩니다.

그들이 남측 사람들을 만날 때 혹여 다른 사람의 눈에 뜨일까 조심 또 조심 하는 이유는 조선말을 하는 나머지 부류를 통해 자기네 진영으로 어떻게 '전달'될 것인가를 염려하기 때문입니다. 조선족이나 화교들은 자신들 외 북측의 다른 기관, 다른 회사들과 여러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입니다.

북측의 출장자나 상주자들 대부분은 민경련(민족경제협력연합회),민화협(민족화해협의회) 그리고 아태(아시아태평양평화위원회)의 조직 성원들이 가지고 있는 남측 사람들을 접촉할 수 있는 공식적 권한을 가지고 있지 못하는 태생적 약점이 있어서 더욱 그렇습니다.

L은 최근에 북측 한 친구로부터 의미심장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중국 안전부(우리 국정원에 해당되는 중국 국가 정보기관)가 특히 요즘 들어 가장 중시하는 만남이 남과 북, 북과 남의 사람들이 직접 만나는 일이므로 특별히 주의 하자는 것입니다.

그래서 서로간의 대면 만남 때 당연히 세심한 주의가 더 필요하고 전화 등의 연결에서도 통신보안 수칙을 세워서 우리의 만남이 노출되는 것을 막자고 합니다. 남과 북은 중국에서 서로의 협력이 긴요하고 절실한 와중에서도 가장 큰 감시자의 눈을 의식해야 합니다.


관련기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0 / 40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