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는 단동] ④남과 북이 일과 일상으로 만나는 단동..가슴뛰던 첫 만남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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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는 단동] ④남과 북이 일과 일상으로 만나는 단동..가슴뛰던 첫 만남들
  • 필명 이 강
  • 승인 2019.04.20 09:12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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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동서 주문서, 원자재 보내면 북에서 임가공해 수출
북측 공장 무역지도원, 직접 단동 나오는 경우 흔치 않아
남출신 사업가, 북측 공장관계자 직접 만나자는 통보에 "두려움과 반가움"

[필명 이 강] 2000년대 중반 남북교역이 한창 활발히 진행되던 때입니다. 단동에서 의류공장을 운영하던 남한 출신 H씨는 바이어로부터 받은 주문의 일부를 북한에 들여보내 하청 생산을 하고 있었습니다.

중국의 생산비보다 저렴하고 봉제 품질이 좋은 북한의 공장을 이용하는 것입니다. 이럴 경우 의류생산에 필요한 원자재와 부자재를 단동-신의주간의 통로로 들여보내고 필요한 작업지시서 등이 전달되고 확인이 되면 북의 공장에서 작업을 시작합니다.

작업이 완성되면 거꾸로 완성품이 신의주-단동 통로로 나와 단동에 있는 보세창고에 입고되고 이 보세구역에서 중국으로의 반입 세금(관세)을 내지 않고 한국을 비롯한 세계 여러 나라로 수출됩니다.

단동에 있는 주문자와 북한 공장과의 소통은 주로 중국-북한간의 국제전화와 팩스 그리고 요즈음에는 이메일 및 북한에 단동 주문자 회사의 출장자가 가 있는 경우에는 `위쳇` 같은 SNS 망으로도 소통합니다.

그래서 북측 공장의 성원(우리측 말로 하면 직원)들이나 무역지도원이 단동에 출장 나오는 일이 자주 있는 일이 아닙니다. 서로 면식이 없는 상태에서도 단동에 있는 북측 주재원이나 기관을 통해 소개를 받고 일을 진행하는 일이 빈번합니다.

평양행 국제열차를 타기 위해 2층으로 올라가는 개찰구 입구(보류)
단동역사 2층으로 올라가면 평양행 국제열차를 탈수 있다. 사진은 개찰구 입구. 사진= 이 강

한 기업인 첫 만남, 두려움과 반가움 교차...무사히 끝난후 `안도`

어느 날 H는 북에서 자신의 작업을 맡은 공장의 무역지도원 일행이 단동에 도착하였다는 통보를 갑작스레 받습니다. H의 주문을 벌써 몇 차례 큰 이상 없이 수행하여 내심 고마운 마음이 있었던 H는 진심으로 반가운 마음이 앞섰습니다.

하지만 이내 조금은 두렵고도 떨리는 마음도 들었습니다.  H는 그들과 생면부지 이었을 뿐만 아니라 북측 출장자를 업무상 직접 만나는 것도 처음이었습니다. 또한 중요한 것은 그들이 바로 우리 동족이라는 점 때문에 가슴 떨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어려서 우리가 받았던 반공교육 중 머리에 뿔이 난 존재들이었기도 합니다. 따라서 그들에게 자신이 어떤 무의식중의 실수를 범하지 않을까 하는 두려운 마음도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동안 거래관계에서 파트너(현지에서는 `대방`이라고 합니다)로서 이미 한 배를 타고 있다는 강한 느낌을 받았었고, 그렇기에 그동안 온갖 상상력을 동원하여 그려 보았던 그 북측 `대방`이 H의 눈앞에 다가온 것입니다. 

얼마나 가슴 뛰고 한편으로는 두렵고 반가웠는지 그의 마음은 이미 그들과의 저녁식사 자리에 가 있었습니다. 기차역에서 중국 입국 수속을 끝낸 북측일행은 마중나간 통역이 준비해준 중국 핸드폰으로 H에게 전화를 합니다. 저녁약속을 정하는 전화 통화입니다.

H는 그들을 성심 성의껏 대접하고자 그들이 좋아하는 음식을 물어 보았습니다. 장소 시간을 정했지만 끝내 좋아하는 음식종류에 대한 대답을 듣지 못한 상태에서 북측 지도원은 “뭐가 되든 일 없습니다. 인제 전화 내려 놓습니다” 라고 말합니다.

H는 그들이 전화를 끊는 줄 알았는데 사실은 상대방이 전화기 정지 버튼을 누르지 않은 상태에서 전화기를 탁자에 내려놓았던 것을 곧 알아차립니다. 왜냐하면 전화 송수신상태가 끊어졌다고 생각한 북측 `성원`들의 이야기가 이어져 들려왔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H와의 전화통화를 끝내고 나서야 자기들끼리 저녁식사 메뉴에 대한 토론을 하였습니다. H는 뜻하지 않게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그들 간의 대화를 통해 그들의 미각 향방을 손쉽게 파악하게 되었습니다. 당연히 이후 이어진 저녁 식사에서 H는 정확한 취향저격으로 그의 북측 `대방`을 만족시키고 첫 만남을 성공적으로 마무리 지을 수 있었습니다. 아직 핸드폰 문화가 북측에서 일반화되지 않았던 시절의 실수일 수도 있습니다.

남과 북, 수많은 실수 반복에도 `만남의 깊이` 더해져

하지만 대부분의 남과 북의 만남이 이렇듯 처음에는 어색하기도 하고 몇몇의 실수가 뒤범벅되면서 시작되었다는 것을 기억합니다. 남측 사람들 또한 북측 사람들과 만나면서 수많은 실수를 반복하면서 다듬어지고 적응되었습니다.

남측 인사들이 가장 많이 했던 실수는 북의 체제 또는 최고 존엄 등에 대하여 모욕같이 느껴질 수 있는 언행을 하거나 정치적 견해를 쉽게 노출하는 일입니다. 아무리 같은 문화와 언어를 공유했던 한 민족이라 하지만 70여년을 서로 상이한 체제에서 떨어져서 살았을  뿐만 아니라 실질적인 교류와 소통이 별로 없이 살아왔습니다.

북한 신의주에서 화물을 싣고 압록강철교를 넘어오는 트럭들. 중국 업체가 원자재를 보내면 인건비가 싼 북한 기업이 임가공, 완제품을 단동 보세창고까지 보낸다.
북한 신의주에서 화물을 싣고 압록강철교를 넘어오는 트럭들. 중국 업체가 원자재를 보내면 인건비가 싼 북한 기업이 임가공, 완제품을 단동 보세창고까지 보낸다. 사진= 이강

 

1990년대부터 시작된 남북교류의 역사는 김대중 정부서부터 본격화되고 이러한 남북 간의 만남이 처음엔 이렇게 어색하고 부자연스럽게 그러나 가슴 뛰는 설렘으로 시작되었습니다. 그 후 차츰 그 빈도도 늘어나고 접촉면도 다양해지고 넓어지면서 서로의 다른 점도 분명하게 인식하기 시작하고 만남의 깊이도 더해가게 됩니다.

2010년 5.24조치로 이러한 만남의 과정이 단절되기 전까지 수도 없는 남과 북의 만남이 단동 마당에서 펼쳐졌습니다. 특히 경제협력을 하면서 사업과 거래라는 틀에 집중하면서 남과 북 양측의 당사자들은 무엇이 서로 다른가에 대하여 때로는 뼈아프게 느껴야 했고 극심한 쟁투를 통하여 극복도 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서로 간에 거래성공, 사업성공이라는 같은 목표가 분명히 있었기에 만남은 계속될 수 있었습니다.  2010년 이후, 남북이 만나던 이 단동이라는 마당은 출장 나온 북측 무역지도원들과 중국 회사 성원들이 채우고 있을 뿐입니다. 남북이 다시 만날 날을 기다립니다.

● 이 강`(필명)은 2000년대 초반부터 단동에 정착, 다양한 대북사업을 진행했다. 본인 사정상 필명을 쓰기로 했으며, 사진도 싣지 않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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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도빈 2019-05-03 19:14:02
다음편 언제 나오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