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o is] 故 조양호회장, `비상과 추락`끝에 하늘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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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o is] 故 조양호회장, `비상과 추락`끝에 하늘로
  • 박대웅 기자
  • 승인 2019.04.08 10:2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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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항공사 키우고도 한진해운 파산 책임...말년엔 `갑질`비난까지
▲ 향년 70세에 별세한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왼쪽). 오른쪽은 조회장의 장남 조원태 대한항공 사장. 사진= 연합뉴스

[오피니언뉴스=박대웅 기자]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이 8일 미국 로스앤젤레스 병원에서 사망했다. 그의 70년 인생은 영욕으로 점철됐다는 평가다.

고인은 1949년 3월 8일 인천에서 조중훈 한진그룹 창업주의 첫째 아들로 태어났다. 서울 경복고를 거쳐 미국으로 유학, 美 메사추세츠주 커싱 아카데미 고교를 나왔다. 이어 인하대 공과대학를 졸업했다. 美 남가주대 경영학 석사, 인하대 경영학 박사 학위 등을 취득했다.

1974년 대한항공에 입사한 고인은 40여년간 선친의 좌우명인 ‘수송보국(輸送報國)’을 이어받아 대한항공을 글로벌 선도항공사로 이끄는데 생애를 바쳤다. 국내1위 항공사 경영자로서 대한민국 항공산업이 나아가야 할 방향과 비전을 제시했으며, 대한민국 항공산업의 위상을 높이는데 기여했다. 국제 항공업계의 리더들이 존경하는 리더 자리에 오르기도 했다. 

이같은 헌신적인 노력을 바탕으로 고인은 1992년 대한항공 사장, 1999년 대한항공 회장, 2003년 한진그룹 회장 자리에 올랐다. 

대한항공을 글로벌 선도항공사로...`최고 민간외교관` 자타공인

재임기간 동안 대한항공의 위기는 끊임없이 이어졌지만 과감한 도전으로 극복해나갔다는 평가다. 세계 항공업계기 무한 경쟁에 돌입하던 시기, 항공동맹체인 ‘스카이팀(SkyTeam) 창설을 주도하며 선제적 투자로 맞섰고 1997년 외환 위기 당시, 자체 소유 항공기의 `매각 후 재임차(Sale & Lease)`를 통해 유동성 위기를 극복하기도 했다. 1998년 외환 위기가 정점일 당시에는 유리한 조건으로 주력 모델인 보잉737 항공기 27대를 구매했다. 

또 2000년대초 이라크 전쟁, 사스 뿐만 아니라 9.11 테러 등으로 세계 항공산업이 침체에 빠져들던 시기, 고인은 차세대 항공기 A380 등을 구매키로 결정했는데, 이 항공기들은 대한항공 성장의 기폭제로 작용했다.

조 회장은 전 세계 항공업계가 대형항공사와 저비용 항공사(LCC)간 경쟁의 패러다임으로 전환하는 시대의 변화를 재빠르게 읽었다. 지난 2008년 7월 진에어(Jin Air)를 창립, 저비용 신규 수요를 창출하기도 했다. 

민간외교관으로서의 국제적 활동은 고인의 업적에서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다. 

항공기 구매시장에서 `세계적 큰손`이었던 고인은 한불최고경영자클럽 회장을 맡아 한국과 프랑스간 돈독한 관계를 맺는데 중요한 역할을 도맡았다. 이 공로로 지난 2004년 프랑스 정부로부터 레지옹 도뇌르 코망되르 훈장, 2015년에는 프랑스 최고 권위의 훈장인 레지옹 도뇌르 그랑도피시에를 수훈하기도 했다

세계 3대 박물관인 프랑스 루브르, 러시아 에르미타주, 영국 대영박물관 등이 한국어 안내 서비스를 하게한 것도 그의 숨은 공로중 하나다. 한국이 세계적인 문화 사업에 후원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있을 만큼 국가적인 위상도 높아졌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육해공 종합물류 완성의 꿈, 한진해운 사태로 깨져

조 회장의 열정은 한진해운 사태를 맞으면서 빛을 바래기 시작했다.     

2009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한진해운이 심각한 경영난에 봉착하자, 고인은 한진해운의 경영정상화를 위해 2013년부터 구원투수로 나서 1조원이 넘는 자금을 지원했다. 이 지원에 대해 일각에서는 동생(고(故)조수호 회장) 집안의 위기를 돕기 위한 것으로 비쳐졌지만, 실제는 달랐다는 게 한진해운측 주장이다. 다분히 회사를 장악하기 위한 의도였다고 한다. 

고인은 2014년 한진해운 회장직에 오르고, 2016년 자율협약 신청 이후 사재도 출연하는등 정상화를 위해 노력했다. 히지만 해운산업에 식견이 부족한 경영진을 배치하는 등 경영실패로 한진해운의 경쟁력을 망쳤다는 비난을 받았다.  

▲ 고인은 땅콩 회황사건으로 국민적인 비난을 받고 대국민 사과를 하기도 했다. 사진= 연합뉴스

이같은 혹평속에 한진해운은 2016년 법정관리에 이어 2017년 청산됐다. 육·해·공 글로벌 물류 전문 기업을 구축하려던 고인의 꿈이 좌절된 것이다. 평창동계올림픽 조직위원장에서 물러난 것도 한진해운 사태가 배경이 됐다. 고인은 당시 박근혜 정부로부터 “물러나라”는 사퇴 압력을 받았고 2016년 5월 자리에서 물러났다. 

`갑질`에다 기업가치 훼손 행위, `말년의 비운` 자초   

올해 대한항공 50주년이 되는 해에 조 회장은 대한항공 사내이사 연임에도 실패했다. `땅콩회황` 사건 이후 드러난 일가의 `귀족적 갑질` 행위가 전국민의 공분을 일으킨데 따른 것이다. 

새 정부 들어  `스튜어드십 코드`를 제정한 국민연금이 기업가치 훼손을 이유로 조 회장의 연임을 반대하고, 일부 시민단체, 소액주주들이 합세했다. 대한항공을 14분기 연속 영업흑자 기업으로 이끌었지만, 갑질경영의 뿌리인 구시대적 지배구조를 고치지 않고 버틴데 대한 문책 성격이었다.  

▲ 지난 3월4일 대한항공 본사에서 조원태 대한항공 사장(왼쪽 5번째)등이 창립 50주년 기념식에서 케이크 커팅을 했다. 당시 조 회장은 미국 LLA에서 투병중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자료=대한항공

 

고인이 떠난 대한항공은 올해 창립 50주년을 맞았다. 1969년 출범 당시 8대뿐이던 항공기는 166대로 늘었고 국제선 노선은 43개국 111개 도시로 확대됐다. 국제선 여객 운항 횟수는 154배 늘었으며, 연간 수송 여객 숫자 38배, 화물 수송량은 538배 성장했다. 매출액과 자산은 각각 3500배, 4280배 증가했다. 고인은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쳤던 하늘로 다시 돌아갔다고 대한항공은 고인을 추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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