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리뷰] 긴즈버그 美연방 대법관 `은퇴할 수 없는 이유`
상태바
[영화 리뷰] 긴즈버그 美연방 대법관 `은퇴할 수 없는 이유`
  • 김이나 컬쳐 에디터
  • 승인 2019.04.01 10:2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영화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 나는 반대한다” 리뷰
▲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나는 반대한다" [사진=네이버 영화]

포스터도 강렬하고 제목도 강렬하다.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 나는 반대한다”. (원제는 주인공 이름의 이니셜을 딴 “RBG”)

1898년 프랑스 ‘로로르(여명,L’Aurore)’지(紙)에 “J’accuse” (나는 고발한다)라는 제목의 공개서한을 보냈던 에밀 졸라가 떠올랐다. 이 공개서한은 유대인 알프레드 드레퓌스 대위의 부당한 구속 수감을 비난하기 위함이었다.

‘반대한다’는 영어 ‘dissent’를 번역한 것으로 ‘공식적으로 인정되는 것에 대해 반대’한다는 뜻.  특히 미국에서는 법원 판결에서 다수의 결정에 대한 반대 의견을 낼 때 쓰는 단어다.

대한민국 대법원과 마찬가지로 미국 대법원에서도 전원합의체의 다수의견에 속하지 못한 소수의견(dissenting opinion)이 있을 때 반드시 공개하도록 되어있다. 소수의견은 비록 그 사건에서는 채택되지 못한 것이지만, 그러나 시간이 지나고 사회인식이 많이 변했을 때 다수의견이 되어 판례를 뒤바꿀 수도 있기 때문에 그만큼 학계에서는 다수의견에 못지않은 중요성을 가지는 것으로 알려져있다.

그래서 분명 이 영화는 드라마틱한 법정 영화일거라고 생각하며 자세를 고쳐 앉았던 그 때, 스크린에는 “나는 반대한다” 라며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대법정을 울리는 긴즈버그 대법관 대신, 열심히 웨이트 트레이닝을 하고 있는 왜소한 한 할머니가 등장한다.

힙합 음악이 흐르는 헬스클럽에서 땀을 흘리며 PT(개인훈련,Personal Training)를 받고 있는 그가 올해 87세의 미국 대법관 긴즈버그다.

젠더 (gender)라는 단어를 처음 사용한 긴즈버그

뉴욕 브루클린 출신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Ruth Bader Ginsburg)는 미국 연방 대법원의 현직 대법관 (Supreme Court Justice)이다. 1993년 빌 클린턴 대통령에 의해 미국 두 번째 여성 대법관으로 지명되었다. 당시 그의 나이 60세였다.

진보적인 성향의 대법관으로 알려져 있지만, 보수 성향의 대법관 안토닌 스칼리아(1936~2016)와 단짝이기도 했고, 진보와 보수의 소통을 위해 노력하는 대법관이라고도 전해진다. 그는 클린턴 재직시 처음 임명되었으나 그 후 부시, 오바마를 거쳐 트럼프 대통령 취임 후에도 건재하고 있다.

두 여성 감독, 여성 주인공, 인터뷰이(interviewee)로 출연한 미국의 대표 페미니스트 글로리아 스타이넘(1960년대~70년대 미국 페미니즘 운동가), 긴즈버그의 평전 ‘악명높은 RBG (Notorious RBG: The Life and Times of Ruth Bader Ginsburg)’의 저자 역시 두 여성.

이쯤되면 영화는 페미니즘 영화임을 부인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많은 부분을 여성 대법관 긴즈버그의 노력과 업적에 대해 다루고 있고 여성으로서 대법관의 지위에 오르기까지의 여정, 그의 판결로 바로잡은 사회 전반에 만연한 성차별 문제등에 초점을 맞춘다. 그러나 두 여성감독은 균형감을 잃지 않으려 애쓴다. 

그것은 긴즈버그가 성차별 타파만을 염두에 둔 인물이 아니기 때문이다. 긴즈버그는 양성평등, 낙태 반대 외에도 성소수자와 이민자들에게도 관심을 가져왔다.

영화는 1933년에 태어난 여성 긴즈버그가 기혼여성으로서 학업과 가정 그리고 일과 가정 둘 다 놓치지 않으면서 자신의 길을 걸어온 것을 담담히 그려내면서 그의 가장 든든한 지지자였던 남편 마티 긴즈버그와의 관계도 자연스럽게 풀어낸다.

로스쿨 재학 중 남편의 암투병으로 가장, 아내, 어머니, 학생의 1인 4역을 감수해야 했고 일찌감치 로펌 파트너 변호사가 된 남편을 따라 하버드 로스쿨에서 컬럼비아 로스쿨로 편입을 해야 했으며, 컬럼비아 대학 로스쿨을 수석 졸업했음에도 여성,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로펌 입사를 거절 당했던 일화 등은 그가 여성이지만 운좋게 대법관이 됐을거라는 예상을 벗어나게 해준다.

긴즈버그는 1963년부터 9년간 뉴저지 주립 럿거스 대학교 로스쿨 교수, 1972년부터 1980년까지 컬럼비아 대학교에서 로스쿨 교수로 재직했는데, 이 시절 성(性)을 뜻하는 용어로 생물학적 의미가 강한 ‘섹스’(sex) 대신 사회적 성의 가치가 녹아든 ‘젠더’(gender)라는 단어를 처음 사용했다고 알려져 있다. 그 후 1980년 6월, 미국 연방상소법원 판사로 임명됐다.

럿거스 대학교 재직시 ‘여성과 법’이라는 강의를 하면서 사회에 만연한 성차별이 여전히 합법의 탈을 쓰고 있음을 깨닫고, 그 후 변호사로서 성차별 소송을 통해 판결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남성 공군에게만 지급된 주택 수당을 받지 못한 여성 공군의 소송, 사별 후 어린 자식을 직접 키우는 젊은 아빠가 남성이라는 이유로 받지 못했던 사회보장비 청구소송 등을 승소하면서 성차별은 결국 남녀 모두를 피해자로 만들고 있다는 사실을 입증하기도 했다.

그는 성차별 관련 대법원 소송 6건 중 5건을 승소했다.

성소수자들의 인권에도 관심이 많아 동성부부의 결혼식을 주재하고, 동성 부부가 이성 부부보다 많은 혜택을 누리지 못하게 하는 법인 '연방결혼보호법' 폐지에 찬성하기도 했다. 그 외에 동성결혼 합법화도 앞장서서 지지했다. 2015년 8월 한국을 방문했을 땐 국내 1호 동성 부부인 김조광수 커플과 트랜스젠더 연예인 하리수를 만났던 것은 잘 알려진 일화다.

 

▲ 2015년 방한 당시 긴즈버그 대법관은 트랜스젠더 연예인 하리수 씨와 국내 1호 동성 부부 김조광수 커플을 만났다. 사진=연합뉴스

은퇴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RBG

영화 후반부엔 그의 평전 제목이기도 한 ‘악명높은 RBG (Notorious RBG)’ 가 긴즈버그의 닉네임이 된 이유들이 밝혀진다. 저자들이 붙인 이 닉네임은 유명 래퍼 ‘노터리어스 비아이지 (Notorious B.I.G.)’에서 차용했다고 한다. 저자들은 여성들을 위한 중요한 판결을 이끌어왔고 최근에는 당당히 소수의견을 내고 있는 이 할머니 대법관에게 관심을 가지면서 존경과 사랑을 담아 이런 타이틀을 붙였다고 한다. 이후 그는 원더우먼, 어벤저스의 모습으로 합성되어 해시태그(#)로 널리 공유되기 시작했고 증손주뻘 되는 젊은이들로부터 같이 사진 찍어달라는 요청을 받고 있다고 한다.

긴즈버그는 자신에게 쏟아진 관심이 부담스럽지 않은 듯 노터리어스 B.I.G. 래퍼와 자신은 뉴욕 브루클린 출신이라는 공통점이 있다고 너스레를 떨기도 한다.

 

▲ 긴즈버그 평전 표지 [사진=아마존]

딱딱하고 강한 이미지의 대법원 대법관에서 친근한, 그러나 누군가에게는 껄끄러운 소수의견을 내는 이 할머니 판사에게 미국 국민들이 관심을 가지는 것은 또 다른 이유가 있다.

현재 미국 연방대법원에는 대법관 9명 가운데 보수 성향 대법관 5명, 진보 성향 대법관 4명이 재직 중이다.

긴즈버그는 이 4명의 진보 성향 대법관중 한 명으로 만일 고령의 긴즈버그가 은퇴할 경우, 보수 성향 대법관이 대법원을 장악할 가능성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긴즈버그가 은퇴할 경우 트럼프 대통령은 보수 성향의 인사를 지명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낙태, 사형, 투표권, 동성애자 권리, 종교의 자유 등 주요 이슈에 관한 법원 판결의 방향이 지금과 많이 달라질 수 있다는 전망이다.

개인의 영달을 위해서가 아니라 양성평등을 위해, 차별받는 모든 이들을 위해 긴즈버그가 은퇴를 미룰수록 미국 연방대법원의 판결은 균형을 유지할 것이라는 것.

그래서 90을 바라보는 긴즈버그는 지금도 매일 PT를 받으며 은퇴를 거부하고 있다.

그의 소수의견 즉 그가 대변하는 소수들의 의견이 연방 대법정에 울려 퍼지기를 바라는 이들은 아직도 많기 때문이다.

<사족>

그의 어머니는 긴즈버그에게 두 가지를 당부했다고 한다.

Be a Lady.

Be Independent.

(여성으로서 우아함을 잃지 말고 독립적으로 살 것.)

이 짧은 당부는 긴즈버그가 90세를 바라보고 있는 지금도 많은 어머니들이 그들의 딸들에게 당부하고 있는 말이기도 하다.

Tag
#N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0 / 40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