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는 단동]②통일 미래 더 큰 역할 꿈꾸는 `염원의 땅`
상태바
[여기는 단동]②통일 미래 더 큰 역할 꿈꾸는 `염원의 땅`
  • 필명 이 강
  • 승인 2019.03.29 16:5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김구 등 독립투사 활동 루트 →남북교역 주무대로 각광→통일 한국시대 "대륙 진출 관문되길"

[필명 이강 칼럼니스트] 단동은 역사적으로 우리민족에게 변방지역이며 경계지역이었습니다.

조선시대까지 단동 지역은 인구밀도가 낮았고 중국과의 완충지대적 성격이 강했으며 중국의 호시정책에 의한 호시무역(互市貿易:접경지역 주민들이 통행증만으로 자유롭게 드나들며 무관세 교역을 하는 것) 장터가 열리던 곳이었기도 합니다. 이 호시장터에서 양국의 변민들이 만나서 교역하고 교류했습니다.

▲ 단동시를 포함한 북-중 접경지역 주변 지도. 일본이 만주침략을 위해 북쪽에 신의주를 만들고 중국 단동을 잇는 압록강 철교를 건설했다. (안동)그래픽= 연합뉴스

일제 만주침략때 도시 형성, 김구선생 탈출 루트로 이용

일제 강점기 일제가 만주침략을 본격화하면서 압록강 철교를 건설하게 되고 압록강철교 동단에는 의주와는 별도로 신의주라는 도시가 형성돼 발전해 나갔습니다. 철교 서쪽에는 `안동`이라는 이름의 도시(현재 단동)가 태동됐던 것입니다.

어찌 보면 단동이라는 도시는 일제 중국침략의 부산물이기도 한 것입니다.

그래서 일제 강점기의 단동은 우리민족에게는 조선반도의 회복을 이루기 위한 교두보가 되기도 하였습니다. 당시 영국계 선박회사인 `이륭양행(怡隆洋行)` 사무실 건물 내부에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안동교통국`이 있어 남방의 무기가 만주 일대의 무장 독립군에게 공급되는 교통의 장소이었습니다. 거꾸로 조선반도와 만주일대에서 조달된 독립자금이 이 단동을 통하여 남쪽으로 전달되기도 했습니다.

3.1운동 후 김구선생이 신의주에서 단동으로 잠입해 이륭양행의 도움으로 상해로 가는 배에 몸을 의탁했던 곳이 바로 단동이었습니다. 당시의 단동 대표 항구였던 `랑터우` 항구도 아직 단동의 여러 작은 항구 중의 하나로 남아 있습니다.

현재 단동의 대표항구(단동항)는 압록강 하류에 있는 랑터우 항구로부터 약 30킬로 남쪽으로 내려가서 압록강이 황해 바다로 이미 합쳐진 지점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당국의 통행면허를 받은 500여대의 중국차, 100여대 북한측 트럭이 단동과 신의주를 연결하는 압록강 철교를 오간다. 통일 한반도시대가 열리면 한반도와 중국, 유라시아대륙의 막대한 물류수요에 대비해 `웅장한 통일대교`로 대체될 것이다.

 

냉전시대 잊혀진 도시, 남북교역 주무대로 급부상

우리 민족의 분단 이후 단동은 남쪽 반도(한국)에서는 한동안 잊혀진 도시가 돼 버렸었습니다. 냉전의 시대에 우리나라는 대륙으로 들어가는 문이 막힌 채 섬처럼 살아야 했고 단동을 통한 어떤 왕래나 소통을 상상할 수도 없었습니다.

1990년대 들어서 중국과의 국교 수립 이후 단동 땅에도 한국 사람의 발길이 닿기 시작, 1990년 한국에서 남북교류협력법의 제정이 되고 남북교역이 공식화되면서 단동을 통한 북한과의 남북교역이 시작됐습니다.

현 시점에서도 그렇지만 남과 북은 민간차원의 직접적인 통신이 단절돼 있고 남북간의 자금 결제 통로도 열려 있지 않습니다. 따라서 당연히 남북교류를 하려면 제3국을 경유해야 했고, 그 3국이 대부분 중국이었고, 중국 중에서도 대부분이 단동이었음은 짐작하시리라 믿습니다.

분단 이후 우리 민족에게 단동이라는 지역이 다시금 중요한 의미로 다가오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통일이 된다면 더더욱 중요한 지역이 될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영토에서 대륙으로 가는 첫걸음을 대부분 단동에서 시작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지정학적으로 그럴 수 밖에 없는 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최근 김정은 국방위원장의 방중 때에도, 또 지난번 하노이 북미회담에서 김 위원장의 출발점이 바로 이 단동의 철도 역사이었음을 상기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SK네트웍스, 대기업중 유일하게 진출...북한상사 대표부 입주

따라서 조금 더 긴 호흡으로 단동이라는 지역을 우리 민족의 입장에서 바라보아야 하고 단동 땅에 무언가 초석을 닦을 노력이 우리에게 필요하지 않은가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아쉽게도 여기 단동에 대한민국의 흔적은 거의 발견되지 않고 있습니다. 오로지 남북교역이 활발하던 시대에 이 단동 땅에 3000~4000여 명의 우리 국민이 살았던 기억만 남아 있으며 지금은 당시의 10분의1 정도의 교민이 그 자리에 남아 10년 전의 흔적을 추억합니다.

한국의 대기업 중에는 SK네트웍스가 유일하게 부동산 개발과 보세창고 분야에 진출해 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SK보세창고에 북한의 평북 번호판을 단 트럭들이 아무런 장애 없이 드나들고 있다는 것입니다. SK오피스텔과 아파트에는 북한 상사 대표부가 입주해 있고 그 가족들이 입주해서 살기도 합니다.  

▲ 단동지역에서 압롱강을 따라 운항하는 여객선. 압록강 너머 북한 접경지역을 구경할수 있도록 갑판위에 망원경이 설치되어 있다.

통일한국이 대륙으로 가는 관문 되길 기대 

앞으로 더 자세히 말씀드리겠지만 단동은 이렇게 남과 북이 만나는 지점이 된 지 오래입니다. 남북 간의 정치적, 군사적 긴장이 위험수위를 넘나들 때에도 단동은 여전히 남과 북이 만나고 호흡하는 곳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시대에 있어 단동은 우리 한국인에게, 아니 우리 민족에게 특별한 곳이 되었던 것입니다.

통일될 때까지의 의미와 통일 이후의 의미가 다르겠지만 똑같이 중요한 곳이라는 점은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통일 전까지는 남과 북이 만나고 교류하며 소통하는 장소로, 통일 후에는 대륙으로 가는 관문으로 단동은 그 자리매김을 하게 될 것입니다.

● 이 강`(필명)은 2000년대 초반부터 단동에 정착, 다양한 대북사업을 진행했다. 본인 사정상 필명을 쓰기로 했으며, 사진도 싣지 않기로 했다.

 

 

Tag
#N

관련기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0 / 40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