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뉴스=김솔이 기자] 역대 불공정거래 조사 사상 투자자들에게 가장 큰 피해를 입힌 사건 중 하나가 ‘신정제지 사건’이다. 상장 직후 기대감에 신정제지 주식을 사들였던 투자자들은 3개월 만에 상장폐지라는 충격에 큰 아픔을 겪어야 했다. 특히 신정제지는 금융당국이 부실기업들의 상장을 막기 위해 도입한 ‘실질심사제도’를 거쳐 처음 상장된 곳이었다.
신정제지는 1985년 12월 전라북도 전주에 설립된 종이제조업체로 7년 만인 1992년 1월 23일 유가증권시장에 입성했다. 당시 이 업체는 한 번도 흑자를 내지 못한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정상적인 기업공개를 거쳐 상장할 수 있었던 건 부실기업을 장부상 흑자기업으로 포장시키는 ‘분식회계’ 덕분이었다.
상장 전 신정제지는 누적된 적자로 자금 융통이 어려운 지경이었다. 궁지에 몰린 유모 대표이사는 1989년 2월부터 기업공개를 거쳐 신주모집·유상증자·사채발행 등을 통해 자금을 조달하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또 상장만 하면 조세감면규제법·법인세법 등 각종 세법상 혜택과 금융권의 지원 등을 누릴 수 있다고 생각했다.
▲ 상장 전 적자 발생하자 외부감사인 동원해 분식회계 시도
하지만 유 대표의 바람과 달리 신정제지는 1990년에도 150억원 적자가 발생했다. 당연히 상장은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이듬해 3월 결산 전 실적 보고를 받은 유 대표는 경리이사에게 적자를 은폐하고 당기순이익이 자본금의 15% 이상 발생한 것처럼 결산서를 작성하도록 지시했다. 실제 경리이사는 외부감사인이었던 영화회계법인 소속 윤모 회계사의 지도를 받아 재고자산·외상매출금 등 자산을 과대 계상하고 지급어음·외상매입금 등 부채를 과소계상하는 방법으로 분식회계를 저질렀다. 그 결과 신정제지의 1990년, 1991년 회계연도 재무제표에는 적자가 사라지고 각각 11억원의 당기순이익이 기록됐다.
윤 회계사는 1988년 4월부터 유 대표로부터 보수와는 별도로 매월 50만~150만원씩을 받고 있었다. 그 대가로 매년 감사 시 재무제표에 대한 지적이나 수정요구 없이 신정제지가 제출한 재무제표가 적정하게 작성된 것처럼 감사보고서를 첨부하고 감사인의 적정의견을 기재했다. 특히 유 대표가 1989년 2월부터 기업공개를 추진하고 있다는 걸 알고도 신정제지의 분식결산을 돕거나 외부감사 시 ‘적정의견’이 담긴 허위 감사보고서를 작성해줬다. 신정제지는 윤씨의 도움으로 증관위에 1988년부터 1991년 반기까지의 분식결산이 반영된 재무제표와 허위 감사의견을 인용한 유가증권신고서·사업설명서를 제출할 수 있었던 셈이다.
이어 유가증권신고서 수리 후 유 대표는 상장 직전인 1992년 1월 20일 신정제지의 출자 회사인 우성창업투자의 한모 대표이사와 상장기준가를 논의했다.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시초가는 1주당 8000원으로 형성될 가능성이 컸다.
▲ 차명계좌 이용해 상장기준가 높여
두 사람은 일반투자자들에게 신정제지 주식을 유망종목으로 판단하게 유도, 상장기준가를 높이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공모가격이 결정되는 오전 동시호가 시간대에 차명계좌를 통해 고가 공모가(6000원)의 2배를 상회하는 1만4500원에 상장기준가가 결정되도록 매수주문을 제출한 것이다.
당시 상장기준가는 상장 당일 매수 주문가를 고가 순으로 세운 뒤 전체 매수주문량의 2분의 1에 해당하는 주문가를 기준으로 결정됐는데 이 허점을 노렸다. 이날 제출된 신정제지의 시초가 주문량 750주 가운데 두 사람이 1만4200원부터 1만5000원에 총 740주를 주문하자, 이들의 뜻대로 시초가가 1만4500원에 형성됐다. 이는 상장예정주식에 대한 시세조종 사건 중 처음으로 적발된 사건이었다.
그러나 신정제지의 상장 천하(天下)는 3개월 만에 막을 내린다. 제2공장 신축을 위해 무리하게 단기 자금을 끌어 쓰면서 부도가 난 탓이다. 회사는 1992년 4월 28일 상업은행을 비롯한 시중은행에 돌아온 어음 18억6000만원을 막지 못해 최종 부도 처리됐다.
▲ 미공개정보 이용한 내부자거래 정황까지
사건이 터진후, 증권감독원은 5월 15일간 신정제지에 대한 조사를 진행했다. 그 과정에서 상장기준가 시세조종 혐의뿐 아니라 미공개정보를 이용한 내부자거래 혐의가 발견됐다. 당시 대신개발금융·대신투자조합은 신정제지의 상장 전 발행주식 128만주 중 48만2000주를 보유하고 있던 대주주였다. 대신개발금융 라모 대표이사는 유 대표에게 상장 후 최소 3개월 이내에는 주식을 매각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주가가 하락하자 주식 전량을 매각, 약 28억원의 부당이득을 챙겼다.
라 대표는 증감원 조사에서 “대신개발금융·대신첨단산업 투자조합의 신정제지에 대한 투자지분을 총괄 관리하는 책임자로서 경영전략상 신정제지 지분의 전량 매도가 불가피했다”며 “신정제지의 경영부실 또는 도산을 예견하고 처분한 것이 아니다”라고 진술하면서 미공개정보 이용 혐의를 극구 부인한 것으로 전해졌다. 그럼에도 조사원은 여러 정황 상 라 대표가 미공개정보를 이용해 주식을 매도한 사실을 입증해내는 성과를 거뒀다.
또 유 대표는 무리한 설비투자로 대규모 결손이 불가피하다는 걸 알고 1992년 2월 중 담보로 제공한 주식 12만주와 차명계좌로 관리한 3만120주를 합해 모두 15만210주를 매도했다. 이외에도 신정제지의 주거래은행 전북은행·한국장기신용은행 역시 부도가 공시되기 전에 담보로 제공받은 주식을 매도해 손실을 회피했다는 사실까지 드러났다.
증권관리위원회는 증감원의 조사 결과를 토대로 사건 두달만에 유 대표 등 2명을 시세조종 혐의로, 라 대표 등 5명에 대해 내부자거래 혐의로 각각 고발했다. 또 증감원은 신정제지의 재무제표 분식혐의에 대해 특별감리를 실시한 뒤 분식회계 혐의로 유 대표를 고발했다. 분식회계에 가담한 윤모 회계사 등 영화회계법인 소속 회계사 3명에 대해선 고발과 함께 재무부에 직무정지를 건의했다.
▲ 미공개정보 이용 혐의에 처음으로 실형 선고
1심 법원은 유 대표 등 두 명의 시세조종 혐의에 유죄를 선고했다. 그러나 2심에서는 총 발행주식수가 184만주에 이르는 신정제지 주식수에 비해 유 대표 등이 상장 당일 낸 매수주문은 740주에 불과하고 그 후 계속적인 거래행위에 관여하지 않았다는 등의 이유로 매매거래가 성황을 이루고 있는 것처럼 오인하게 한 행위로 보기는 어렵다고 판단했다. 또 이들의 행위를 상장기준가의 조작행위로 볼 여지가 있으나 증권거래법의 규율대상인 ‘주식 시세를 변동시키는 매매거래행위’에 해당하지는 않는다고 판시, 시세조종 혐의는 무죄를 선고했다.
다만 유 대표의 내부자거래 및 외부감사법 위반 혐의에 대해서는 모두 유죄가 인정돼 징역 3년 6월의 실형이 내려졌다. 윤씨의 경우 외부감사법 위반으로 징역 1년·집행유예 1년을 선고받았다.
내부자거래 혐의로 1992년 구속 기소된 라 대표 또한 징역 1년 6월의 실형을 선고받았다. 대신개발금융에는 양벌 규정에 따라 벌금 15억원 선고가 내려졌다.
미공개정보 이용에 대해 실형이 선고된 건 이 사건이 처음이었다. 당시 법원은 “대신개발금융이 신정제지의 대주주로서 이 회사가 부도날 것을 미리 알고 상장된 지 보름 만에 보유주식을 모두 처분하면서 28억여원의 부당이득을 챙겼다”며 “2만여명의 소액투자자들에게 모두 39억여원의 피해를 보도록 한 것은 증권시장 질서를 어지럽힌 것으로 엄벌에 처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판시했다. 그러나 라 대표는 최종심에서 징역 1년6월·집행유예 3년으로 감형받았다.
‘신정제지 사건’은 수법이나 피해 규모로 봤을 때 대형 불공정거래 사건 중 하나로 꼽힌다. 상장 이후 3개월이라는 짧은 시간에 부도가 나면서 개인투자자는 물론 대출기관까지 상당한 손해를 입을 수밖에 없었다. 이 가운데 경영진, 최대주주, 증권회사, 회계법인 등 다양한 이해관계자들이 불법행위로 상당한 부당이득을 챙긴 데 대해 사회의 지탄이 이어졌다.
저작권자 © 오피니언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