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데타로 점철된 태국 정정…하루만에 끝난 공주의 도전

1932년 이후 아직도 진행중인 군부 정권…국왕도 왕실 위기 우려한 듯 김인영 에디터l승인2019.02.10 1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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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국 국왕의 말 한마디에 누나의 총리직 도전이 무산되었다.

우본랏 라차깐야(Ubolratana Rajakanya, 67) 공주를 총리 후보로 낸 탁신 친나왓(Thaksin Shinawatra) 전 총리 계열의 타이 락사차트당(Thai Raksa Chart party)은 9일 성명을 내고 국왕의 명을 받들어 “헌법과 선거관리법을 준수한다. 공주에게 감사하다”며 공주에 대한 총리 후보 지명을 공식적으로 포기했다.

우본랏 공주가 전날(8일) 오전 락사차트당의 총리 후보 지명을 수락하자, 그날 오후 이례적으로 마하 와치랄롱꼰(Maha Vajiralongkorn) 국왕이 국영 방송을 통해 왕실 칙령을 내보냈다. 방송에 낭독된 칙령에서 국왕은 "우본랏 공주가 왕족 신분을 포기했다 하더라도 그는 여전히 짜끄리 왕조의 일원으로서 신분과 지위를 유지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로써 공주가 총리후보 지명을 수락한지, 하룻만에 총리 도전이 무산되었다. 하룻만의 해프닝으로 끝난 것이다.

많은 해외 언론들은 태국 왕실의 갈등을 흥미진진한 토픽감으로 소개하고 있다. 미국인 남성과 결혼하며 왕족 지위를 포기했고, 26만에 이혼하며 귀국한 사실, 국왕의 친누나라는 사실, 국왕이 직접 나서 반대한 사실 등등…. 여기에 영화배우이자, 가수이며, 한때 아시안게임에 금메달을 딴 선수라는 공주의 개인사도 곁들여 흥미를 더했다.

 

▲ 우본랏타나 라자칸야 태국 공주 /SNS 사진

 

하지만 본질적으로 공주가 총리직에 도전하면 왕실이 위태롭다는 정치적 판단이 주효했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태국의 현재 마하 와치랄롱꼰(Maha Vajiralongkorn)은 짜끄리(Chakri) 왕조의 10대 국왕이다. 1782년 군벌이었던 짜오 프라야 짜끄리(Chao Phraya Chakri) 장군이 수도로 입성해 딱신왕을 죽여 버리고, 스스로 왕위에 올라 현재 태국 왕실의 뿌리를 내렸다.

짜끄리 왕조는 라마 5세와 6세에 태국 근대화를 이끌며 인도차이나를 둘러싼 영국과 프랑스의 식민지 패권 경쟁에서도 독립을 유지했다.

 

1932년 태국에는 시민혁명이 일어난다.

▲ 플랙 피분송크람 /위키피디아

그해 6월 라마 7세 국왕이 방콕의 궁전을 떠나 후아힌(Hua Hin) 별궁에 간 사이에 일부 엘리트들이 궁전을 장악하게 된다. 혁명 세력은 유럽에서처럼 시민과 부르죠아지로 구성되어 있지 않았고, 주로 프랑스에서 유악한 귀족자제와 일부 군부, 민관 관료들이 주류를 이루었다. 국왕과 혁명세력 사이에 대치관계는 오래 가지 않았다. 라마 7세는 혁명세력을 무력 진압할 경우 수많은 인명 피해와 심각한 정국의 혼란이 발생할 것을 우려해 스스로 입헌군주제로로 전환하기로 했다.

이로써 혁명세력은 태국어로 카나 라싸던(Khana Ratsadon)이라는 인민당을 조직하고 정권을 장악하게 된다. 피를 흘리지 않는 무혈 혁명이었다. 이로써 짜끄리 왕조 15년간의 절대왕정은 종식되고, 계몽주의와 인본주의를 지향하는 민주개혁이 이뤄진다.

하지만 인민당 내부에 분열이 생겨 이듬해 다시 쿠데타가 발생해 정권이 교체된다.

이 과정에서 라마 7세는 1935년 퇴위하고 스위스에서 공부하고 있는 9살짜리 조카가 라마 8세로 등극한다. 어린 국왕은 해외에 머물고, 인민당에 의해 정권이 좌지우지되었다.

1940년대에 태국도 파시즘을 경험하게 된다.

쿠데타 주역의 하나인 플랙 피분송크람(Plaek Phibunsongkhram)이 1938년 정권을 장악했다. 그는 민족주의자로 나라 이름을 사이암(Siam)에서 태국(Thailand)로 바꾸고, 국민들의 정신개조운동을 벌였다. 이탈리아의 베니토 무솔리니(Benito Mussolini)를 존경하는 파시스트로, 2차 대전이 종식되기 직전인 1944년 1월까지 태국의 실권을 장악했다.

1941년 12월 21일, 피분송크람 총리는 방콕 왓 크라케오(Wat Phra Kaew) 궁전에서 일본과 동맹해서 연합군에 대항한다는 조약에 공식서명했다. 이로써 태국은 주축국의 일원으로, 미국과 영국에 선전포고를 하고, 태국 내 모든 군사시설과 철도, 도로를 일본이 이용할수 있도록 했다.

하지만 1943년경부터는 분위기가 달라졌다. 주축국이었던 이탈리아가 패망하고, 태평양 전선에서 미군이 섬들을 하나씩 점령하며 일본을 향했다. 버마 전선도 일본은 영국군에 밀렸다.

피분송크람 정부는 일본과 거리감을 두었다. 이러다가 일본과 함께 연합군에 점령되는 게 아닌지, 걱정했다.

이때 나선 사람이 피분송크람의 정적인 프리디 바노명이다. 그는 반일 게릴라 부대를 조직해 연합군의 편에 섰다. 그리고 미국에게 피분 정부가 어쩔수 없이 일본의 편에 섰다고 해명했다. 미국은 프리디의 설득을 받아들여 반일 게릴라들을 연합군의 일원으로 받아들였다.

1944년 1월 프리디 세력은 피분 정권을 무너뜨렸다. 새 정권은 1944년 8월 일본과의 전시협정을 파기했다.

 

1945년 들어서면서 태국 정부는 일본군을 기습공격했다. 반정부 게릴라 부대는 정규군에 합세해 항일 투쟁에 나섰다. 일본이 패망하자 태국은 영국과 미국에 대한 선전포고가 일본의 무력강압에 의한 것이므로 무효라고 선언하고, 태국 내의 친일파를 제거했다. 그리고 ‘자유태국임시정부’를 수립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태국은 영국과 프랑스에 자진해서 손해배상을 하고 미국의 지원을 받아 패전국 대우를 면했다. 그리고 1946년 12월 유엔에 가입했다. 물론 미국이 허락한 조치였다. 1950년에 한국전이 벌어지자 태국이 연합국의 일원이었음을 입증할 목적으로 유엔 결의에 따라 즉시 파병한 것도 자활책이었다.

 

▲ 짜끄리 왕조 10대 마하 와치랄롱꼰 태국 국왕 /위키피디아

 

2차 대전 중에 태국 왕실은 무슨 역할을 했가.

라마 8세인 아난다 왕은 2차 대전에 종식될 때까지 스위스에서 공부만 했다. 태국 파시스트에 밀려나 일종의 망명 생활을 한 것이다. 그는 1945년 귀국해 이듬해 사망한다.

이어 라마 8세의 동생인 푸미폰 국왕이 라마 9세로 등극한다. 푸미폰 국왕은 2016년까지 무려 70년을 재위한 최장수 국왕이다.

푸미폰 국왕 재위 70년은 쿠데타의 연속이었다.

국왕은 명목뿐이고 실질적인 지도자는 군부였다. 2차 대전 당시 파시스트 전부를 이끌었던 피분송크람이 1948년 집권해 9년간 국정을 이끌었다. 1957년에는 군부 쿠데타가 일어나 피분송크람이 물러났다. 이후 대학가에서 민주화 시위가 일어나고 수십명의 학생들이 경찰의 저지로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 후에도 군부 출신이 정권을 이어갔다. 1991년에도 쿠데타가 일어났고, 2006년, 2014년에도 쿠데타가 발생했다.

태국 국민들은 국왕에 대해 무한한 존경심과 신뢰를 주고 있다. 헌법상 국왕에게 정치적 권한이 없지만, 현실 정치에서 국왕의 역할은 중요하다. 태국 군은 정치 개입을 하면서 형식적으로 국왕의 승인을 받고, 국왕의 충실한 종복임을 자청한다. 태국 군은 왕의 군대(Royal Army)라 부른다.

하지만 1932년 이후 태국에서 쿠데타가 일상화되었다.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키면 국왕이 거부한 적이 없다. 그저 승인할 뿐이다.

 

▲ 2014년 태국 쿠데타의 한 모습 /위키피디아

 

이번에 우본랏 공주는 군부에 도전장을 내 밀었다. 공주는 군부의 적대세력인 탁신 세력과 손잡았다. 탁신은 2006년 군부 쿠데타에 의해 총리직에서 쫓겨나 망명했으며, 그의 여동생 잉럭(Yingluck)도 오빠의 후광으로 총리가 되었지만 2014년 군부에 의해 전복되었다. 공주의 명분은 탁신계와 손잡고 군부 출신이자 군의 지지를 지지를 받는 쁘라윳 총리의 재집권에 쐐기를 박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군부의 대응도 만만치 않다. 군부의 외곽정당인 국민개혁당이 공주의 총리 도전에 반발해 선거관리위원회에 후보지명을 무효로 할 것을 요구하는 공문을 제출했다. 왕가를 선거운동에 이용하지 못하도록 한 선거법에 위반하고 있다는 것이다.

국왕은 공주의 현실정치 참여에 즉각 헌법과 왕실 전통에 어긋난다며 반대 견해를 발표했다. 국왕이 공주를 지지하고 밀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김인영 에디터  opinionnews64@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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