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7] 처절한 저항 통해 얻은 인도네시아 독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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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7] 처절한 저항 통해 얻은 인도네시아 독립
  • 김인영 에디터
  • 승인 2018.12.26 18:1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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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 지원으로 독립군 조직 확대, 미국도 독립 지원…네덜란드군 격퇴

 

1949년 12월 27일, 네덜란드의 율리아나(Juliana) 여왕이 라디오 연설을 했다.

“우리는 더 이상 반목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증오와 회한의 상처로 가득하고, 찢어지는 듯한 고통스러운 과거를 가지고 있지만, 이제 우리는 나란히 서서 앞으로 나아갈 것입니다."

자카르타, 헤이그에서 동시에 인도네시아 독립이 선포되었다. 이날로 인도네시아는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라는 이상한 회사조직에 의해 통치되던 식민지 상태를 벗어나 독립을 쟁취하게 된다.

 

인도네시아의 독립은 수카르노(Sukarno)와 모하마드 하타(Mohammad Hatta)라는 두 걸출한한 지도자와 인도네시아 국민들의 피에 어린 투쟁의 결과였다. 여기에 일본이 2차 세계대전 기간에 인도네시아를 점령하면서 “양놈 믿지 마라. 아시아의 운명은 아시아인 스스로 결정해야 한다.”는 이른바 대동아공영권의 논리로 저항세력을 부추기고 조직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2차 대전 이후 미국도 네덜란드에 경제원조 압박을 넣으며 인도네시아 독립을 지원했다.

인도네시아 독립운동 또는 인도네시아 혁명은 1945년 가을부터 1949년말까지 4년 5개월에 걸쳐 전개되었고, 이 투쟁과정에서 전투원 사망자가 4만5,000~10만명, 민간인 사망자 2만5,000~10만명에 이르는 엄청난 희생을 냈다. 자바와 수마트라섬에서 삶의 터를 잃은 인도네시아인들이 700만명에 이른다는 집계도 있다.

 

▲ 수카르노와 모하마드 하타 /위키피디아

 

인도네시아 독립운동은 20세기초 민족자각운동으로 시작되었다. 그후 네덜란드에 유학하던 수카르노와 하타에 의해 본격적안 자치운동이 일어난다.

인도네시아 독립운동이 본격적으로 일어난 것은 네덜란드가 나치 독일에 점령된 후, 일본군이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영토(인도네시아)를 점령할 때였다. 1942년 1월 일본군은 자카르타를 침공해 3개월만에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영토를 모두 장악하게 된다.

인도네시아에서 네덜란드 세력은 완전하게 몰락한다. 수만명의 네덜란드인들이 수용소에 감금되고, 버마전선의 다리 건설에 투입되었다.

인도네시아를 지배하게 된 일본은 주민들에게 반서구 사상을 주입시켰고, 젊은 민족주의자들에게 무기를 제공하고, 군사 교육도 시켰다. 1944년 9월 7일 일본 정부는 인도네시아를 독립시킬 것이라고 선언했다.

이에 고무된 민족주의자들은 군대를 조직해 독립을 준비했다. 1945년 여름 독립세력의 병력이 8만명에 이르렀다. 독립운동 지도자들은 1945년 5월부터 독립 후의 정부 형태에 대한 토의에 들어갔고, 그 회의에 일본 대표도 참석했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항복했다. 이틀후인 8월 17일 수카르노와 하타는 독립을 선포했다. 이 독립의 선언은 인도네시아 주둔 일본군 사령관의 집에서 이뤄졌다.

하지만 인도네시아는 곧바로 독립하지 못하고, 영국군을 중심으로 한 연합군의 손에 넘어갔다. 2차대전 종전 직후까지만 해도 네덜란드는 인도네시아에 병력을 파견할 여력이 없었다.

민족주의자들은 이 기회에 독립을 해야 한다고 믿고 곳곳에서 저항운동을 벌였다. 영국군 사령관은 그때까지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 사령관을 찾아가 치안을 부탁했지만, 거절당했다. 독립운동은 과격한 양상으로 변했고, 일본군에 의해 군사 교육을 받은 젊은이들은 일본군의 무기들을 빼돌려 무장하고, 민족주의자 진영에 가담하기도 했다.

 

▲ 죽창을 든 자바 독립군. 일부는 일본군 소총을 들고 있다. (1946년) /위키피디아

 

1945년 9월 29일 연합군의 이름으로 1,000명의 영국군이 도착했는데, 이 병력으로 치안을 유지히기 힘들었다. 10월에 1,000명의 네덜란드군이 들어오면서 영국군은 철수했다. 미국과 영국은 인도네시아의 독립을 존중한다는 견해를 밝혔지만, 네덜란드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드디어 독립군과 네덜란드군 사이에 전투가 벌어졌다.

네덜란드는 1947년 7월 21일과 1948년 12월 19일 두 차례에 걸쳐 대규모의 군대를 파견했다. 그들은 이 군사 행동을 ‘경찰 행동’(Politionele acties)이라고 불렀다. 자국 내에서 반란군을 진압한다는 의미로 사용한 용어였다. 이때 투입된 네덜란드의 병력은 16만명에 이르렀다.

 

▲ 인도네시아 독립을 저지하기 위해 투입된 네덜란드군. /위키피디아

 

민족주의자들은 저항했다. 이 전쟁 때 수카르노는 자카르타에서 비행기로 한 시간 거리에 있는 족자카르타(Yogyakarta)라는 고도(古都)를 수도로 삼았다. 네덜란드가 과거 반란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족자카르타는 점령해서는 안 된다는 과거의 뼈아픈 교훈을 잊지 않고 있기 때문이었다. 역으로 인도네시아 독립군은 자바인의 상징을 확보한 채 우월한 전쟁을 벌일수 있었다. 족자카르타는 이탈리아 내 교황령 정도라고 보아도 무방할 것 같다.

수카르노와 하타는 1948년 9월 독립운동세력의 한축인 공산주의자들의 반란을 격퇴했다. 미국의 입장에서는 공산세력의 도미노를 막아야 할 필요가 있었다. 수카르노의 반공주의는 미국의 신임을 얻었다.

미국은 인도네시아 독립을 지지하게 된다. 어차피 네덜란드의 지배가 불가능하다면, 공산주의자만 아닌, 민족주의자가 집권해야 한다는 것이 미국의 입장이었다. 미국은 네덜란드에 압력을 가했다. 2차 대전 직후 네덜란드는 미국에서 마셜 플랜(Marshall plan)의 경제적 지원을 받고 있었고, 미국이 주도하는 나토(NATO)에 가입하려고 힘쓰고 있었다. 미국은 네덜란드가 인도네시아를 독립시키지 않으면 재정 지원을 중단하고, 나토 가입도 저지할 것임을 시사했다. 절실한 상황에서 네덜란드는 강경책을 버리고 대화에 나섰다.

1949년 8월부터 네덜란드는 헤이그에서 인도네시아 민족주의자들과 협상을 시작했고, 마침내 12월 27일 주권을 이양한다고 발표하게 된다.

네덜란드로부터 독립을 인정받은 직후 수카르노와 하타의 세력은 자바와 수마트라 일대만 장악했다. 독립을 인정받은후 수카르노는 다른 세력들을 연방으로 참여시켜 디슨릐 인도네시아 연방공화국을 성립하게 된다.

 

▲ 1949년 독립당시 인도네시아 연방의 범위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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