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4 오늘] 부도 직전에 한국경제 건져 낸 이브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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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4 오늘] 부도 직전에 한국경제 건져 낸 이브날
  • 김인영 에디터
  • 승인 2018.12.23 15:5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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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악관 벙커회의서 한국 구제 결정→미 재무부, Fed 동의→월가은행 협조

 

크리스마스 이브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이건 아니건 한해를 보내면서 가족이나 애인과 함께 하고 싶은 날이다. 많은 나라에서 크리스마스 이브엔 흥청거린다.

21년전인 1997년 12월말에는 한국이 망하느냐, 사느냐의 갈림길에 있었다. 외환위기가 닥쳐와 IMF의 구제금융을 얻어 쓰게 된 한국경제는 숨이 넘어가기 직전에 있었다. 그해 12월 24일은 한국 경제에 희망을 불어넣는 날이었다.

 

미국 주요 도시에 크리스마스 트리가 세워지고 캐롤송이 울리는 크리스마스 전날, IMF 이사회는 IMF와 13개 선진국들이 내년 1월초까지 100억 달러를 조기 지원할 것임을 의결했다. 다국적 지원군에는 선진 7개국(G7) 이외에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벨기에, 네덜란드, 스웨덴, 스위스등 6개국이 추가됐다.

뉴욕 금융시장도 이에 호응했고, 윌리엄 맥도너(William McDonough) 뉴욕 연준(Fed) 총재가 미국의 주요 시중은행에 한국 지원을 요청했다. 이 과정에서 로버트 루빈 미 재무장관은 앨런 그린스펀 Fed 의장에게 협조를 요청했고, 뉴욕 FRB와 워싱턴의 재무부 사이에 긴밀한 연락이 오갔음을 쉽게 알 수 있다.

크리스마스 이브날인 12월 24일, 뉴욕 Fed가 팔을 비틀어(arm-twisting) 개최한 긴급회의에는 체이스 맨해튼, 시티, JP 모건, 뱅크아메리카, 뱅커스 트러스트, 뱅크 오브 뉴욕 등 6개 은행 대표들이 참석했다.

뉴욕의 금융회사들은 Fed의 말이라면 죽는 시늉이라도 한다. 한국이 관치금융을 한다고 하지만 미국 재무부와 중앙은행의 영향력과 비교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뉴욕 금융시장을 관할하는 맥도너 총재가 총대를 멨다.

월가 은행과 투자기관들은 12월 20일께면 대부분 두둑한 보너스를 타서 휴가를 간다. 6개 은행 회장들도 대부분 휴가중이었다. 그런데 뉴욕 Fed 총재가 전화를 해서 소집하는데 오지 않을 사람이 없었다. 더글러스 워너(Douglas Warner) JP 모건 회장등은 급히 옷을 챙겨 입고 월가에 위치한 연준 사무실로 모여들었다.

맥도너 총재가 말문을 열었다.

"한국 상황이 긴급하다. 하루하루 악화되고 있다. 한국 외환보유액은 지난 여름에 이미 150억 달러가 줄어들었고, 지금은 80억 달러 정도 밖에 남지 않았다. 하루에 10억 달러씩 퍼붓고 있는데 며칠이 가겠는가. 간단한 산수로 계산해보아도 상황은 심각하다."

6개 은행 회장들은 맥도너를 접견하고 돌아가 자신들만의 별도 모임을 가졌다. 그들은 뉴욕 FRB의 지시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은행 회장들은 급히 성명을 내고 "한국에 대한 금융 지원은 한국이 단기 외채 문제를 해결하고 국제 자본시장에 조기 복귀하도록 하는 최선의 방안"이라며 금융 지원을 밝혔다.

미국이 한국 경제를 지원하는데는 상당한 부담이 있었다. 2년전 미국 국민들의 세금으로 멕시코를 지원할 때는 멕시코의 방대한 유전을 담보로 했다. 나중에 돈을 못 받더라도 기름으로 상환하면 된다는 계산이었다. 그러나 한국은 담보할게 없었다. 미군을 인질로 삼을 수도 없는 형편이었다. 하지만 미국은 한국 차기 정권의 구두 약속 하나만으로 멕시코보다 많은 지원을 결정했던 것이다.

 

이처럼 미국 은행들이 재무부와 Fed의 말에 고분고분하며 한국을 지원하기로 한 것은 닷새전 백악관 지하벙커 회의 결과에 따르는 것이다.

그러면 1997년 12월 19일 백악관에선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를 보자.

워싱턴의 백악관 상황실. 헐리웃 영화에서 자주 등장하는 이 곳은 전쟁이 벌어졌을 때 미국의 총지휘부가 집합해 최고의 명령을 내리는 지하 벙커다. 숨가쁜 전쟁의 상황을 역전시키기 위해 미국 대통령은 물론 국무 장관, 국방 장관, 중앙정보국(CIA), 국가 안보위원회(NSC) 최고책임자가 머리를 맞대고 의논한다. 이곳에서의 결정이 전쟁과 평화의 갈림길이다.

이날은 매들라인 올브라이트(Madeleine Albright) 국무장관, 윌리엄 코언 (William Cohen) 국방장관, 로버트 루빈(Robert Rubin) 재무장관, 샌디 버거(Sandy Berger) 백악관 안보담당 비서 등이 참석했다. 전쟁 발발 지역은 한국이었다. 한국은 전날 대통령 선거가 끝나서 야당인 국민회의 김대중 후보가 승리했다. 그러면 북한군이 한국의 정치적 과도기를 이용, 남침한다는 첩보가 있었던 것인가.

그러나 이날 백악관 지하 상황실의 주제는 한국의 환란(換亂)이었다. 북한군이 쳐내려오는 것이 아니라 달러가 부족해 부도가 나기 직전에 있는 한국의 경제 난리를 극복하도록 도와주느냐 하는 문제를 놓고 미국의 수뇌들이 머리를 맞대고 모인 것이다.

IMF가 570억 달러를 지원키로 했음에도 한국 경제는 회생의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원화는 며칠 사이에 달러당 2,000원까지 폭락했고, 외국 채권은행들은 한국에 빌려준 돈을 마구잡이로 빼내갔다. 당시 하루에 10억 달러의 외국인 투자자금이 한국을 탈출했다. 내년 3월까지 갚아야 할 단기 외채는 수백억 달러에 이르지만 외국 은행들이 만기연장해주는 비율은 10~15%에 지나지 않았다. 시티은행 등 미국 은행들은 한국이 며칠 내에 모라토리엄(채무연기)을 선언할 것으로 판단했다.

이날 백악관에서 열린 ‘한국 관련 긴급 안보회의’에서는 CIA 보고가 없었다. 오히려 JP 모건이나 시티은행, 체이스맨해튼 은행에서 만든 한국 경제 상황 보고서가 올라왔다. 블룸버그 뉴스만 없었을 뿐이지, 뉴욕 월가의 트레이딩 룸에서 결정할 일을 전쟁 상황실에서 의논했다.

 

루빈 장관이 이끄는 재무부는 처음에 한국 정부가 요구한 조기 지원을 반대했다. 당시 워싱턴을 드나들던 한국 고위관리들에 따르면, 미국 재무부는 한국이 모라토리엄을 선언해야 채무 협상을 계획하고 있었다. 잘난 척 하는 아시아 국가를 시범 케이스로 본때를 보여주자는 심사였다. 루빈은 약속한 개혁을 이행하지 않는 한 회생 가능성이 전혀 없다고 생각했다.

루빈 장관이 한국에 등을 돌린 것은 골드만 삭스 회장 시절에 한국을 방문했을 때, 재경원 관리들이 만나 주지 않은데 대한 앙금이 남아 있다는 설이 뉴욕 월가에 나돌았다. 김만제 포항제철회장, 정인용 전 부총리를 주축으로 한 한국의 경제 특사가 워싱턴을 방문, 루빈 장관과의 면담을 요청했으나, 그는 휴가를 이유로 면담을 거절했었다. 그는 미국 동북부에 있는 자신의 별장에서 낚시를 즐기고 있었다.

그러나 워싱턴 행정부는 재무부만 있는 게 아니다. 국무부, 국방부, 국가안보위원회에서는 한국을 걱정하는 목소리가 높아갔다. 경제불안을 장기간 방치할 경우 정치, 사회 불안으로 이어져 자칫 북한의 도발을 부를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었다.

백악관 안보회의에서 올브라이트 국무, 코언 국방 장관은 한국 문제를 해결할 것을 루빈 재무장관에게 요구했다. 재무부는 국무부, 국방부에 약하다. 루빈도 더 이상 고집을 부릴 수 없는 여건이 됐고, 마침내 한국을 지원하자는 의견에 동조했다.

백악관 회의 결과는 즉시 빌 클린턴 대통령에 보고돼, 그날 하오 클린턴은 서명했다.

뉴욕타임스는 백악관 회동에서 한국 지원을 결정한 배경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한국에서는 미국 행정부가 철저히 경계망을 펴고 있었다. 그 곳은 3만7,000명의 미군이 지구상에서 가장 국수주의적인 정권과 대치하고 있는 곳이다. 일부 펜타곤 전략가들은 북한의 강경파 장군들이 한국의 경제 위기를 이용하려고 한다고 경고했다. 그러나 더 위급한 우려는 경제 불안이 한국의 취약한 민주주의를 위협하지 않을 것인가, 미국이 도와주지 않는다면 한국이 미국과의 안보동맹을 의심하지 않을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백악관 회의가 끝나자 미국 재무부는 데이비드 립튼(David Lipton) 차관을 서울에 보내 김대중 대통령 당선자를 만나도록 했다. 비록 대통령 당선자의 입장이었지만, 명색이 국가 원수인데도 미국 재무 차관이 한국의 차기 대통령의 사상을 검증하러 갔던 것이다.

김대중 대통령은 이듬해 6월 미국을 방문해서 뉴욕 교민들에게 당시 정황을 이렇게 설명했다.

“대통령에 당선되고 보니, 미국은 립튼 차관을 보내 저의 경제 철학을 검증하러 왔었습니다. 제가 국제 시장원리에 맞춰 경제를 개혁하고, 근로자들에게도 고통을 분담할 것이라고 밝히자 립튼이 만족해 돌아갔습니다.”

22일 대통령 당선자를 만난 립튼은 한국 차기 정부의 개혁 의지가 확고함을 확인했다.

립튼의 보고가 워싱턴 재무부에 전달된 다음날인 24일은 크리스마스 이브였다. 성탄절 휴일을 맞아 관청과 은행들이 일찍 문을 닫는 날이었음에도 불구, 워싱턴과 뉴욕을 연결하는 금융 채널이 바쁘게 움직였다. 그날 국제 금융시장에서 가장 주목했던 점은 한국에 대해 강경입장을 고수했던 루빈 장관의 심기가 풀어졌다는 대목이었다. IMF와 서방 선진국들은 한국에 100억 달러의 조기 지원 방침을 결정했다.

일주일 전까지만 해도 한국의 태도를 강한 톤으로 비난했던 루빈은 기자회견을 갖고 “한국 경제는 강력하며, 그들이 다시 건강한 성장으로 되돌아가지 못할 이유가 없다”며 우호적인 견해를 밝혔다. 그는 한국 지원 이유에 대해 “미국의 국가 이익이 걸려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미국 재무부의 입장이 바뀌자 워싱턴의 IMF와 뉴욕 금융가가 발빠르게 움직였다.

그리고 한국의 외채 만기를 연장해주기로 하고, 해를 넘겨 뉴욕에서 외채 협상이 벌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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