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정치가문 형성한 아버지 부시 대통령 별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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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정치가문 형성한 아버지 부시 대통령 별세
  • 김현민 기자
  • 승인 2018.12.01 15:0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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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서냉전 종식, 이라크 파나마 공격…경제침체로 단임에 그쳐

 

미국 제41대 조지 H. W. 부시(George Herbert Walker Bush, 1924~2018) 대통령이 30일(현지시간) 별세했다고 미국 언론들이 1일 일제히 보도했다. 향년 94세. 그는 미국에서 가장 오래 산 대통령으로 기록되고 있다.

부시 전 대통령은 지난 4월 부인 바버라 여사가 92세를 일기로 별세한 뒤 파킨슨 병에 시달리며 치료를 받아왔다

 

▲ 조지 H W 부시 /위키피디아

 

그의 맏아들 조지 W 부시는 미국 대통령을 역임했고, 또다른 아들 제프 부시는 플로리다 주지사에 이어 공화당 대통령에 뛰어드는등 케네디에 이어 미국 정치가문을 일구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1924년 6월 12일에 매사추세츠주 밀턴(Milton)에서 태어났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한후 18세의 나이로 해군에 입대, 해군 전투기 조종사로 58회의 전투에 참여해 무공훈장 3개를 받았다. 전선에서 돌아온 후 22세에 바버라 피어스와 결혼했고 이듬해 장남 워커가 태어났다.

1948년 예일대를 졸업한 후 가족과 함께 텍사스주로 이주해 석유 회사 자파타 코퍼레이션 경영에 참여해 많은 돈을 벌었다. 그의 부친 프레스컷 셸던 부시는 공화당 소속 연방 상원의원으로 재직했다. 조지 부시는 부친을 따라 정계에 입문, 1964년 텍사스 주에서 연방 상원의원 선거에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상원의원 도전에 실패했지만, 1966년 하원의원에 당선되었다. 1968년 부시는 하원의원에 재선되었고, 두 번째 임기를 마친후 1970년 연방 상원의원에 도전했으나, 다시 낙선했다.

부시는 리처드 닉슨 대통령에 의해 1970년부터 UN 주재 대사에 임명되어 1973년까지 재직했다.

임기를 마친 후 1973년부터 1975년까지 국무성 베이징 연락사무소 소장으로서 중국과의 국교정상화에 힘써서 외교의 달인이란 평을 받았다. 그후 1977년에 CIA 국장을 지냈다.

1980년의 공화당 대통령 후보 지명전에서 로널드 레이건에게 패했으나, 레이건의 요청으로 부통령 후보를 맡아서 1980년과 1984년 두차례에 걸쳐서 부통령에 당선되었다. 부통령 임기중 레이건의 신임을 얻어 1988년 대통령 후보로 나서 민주당의 마이클 듀카키스 후보를 누르고 당선되었다.

 

▲ 아버지 부시와 아들 부시 /위키피디아

 

대통령에 취임한 후 1989년 12월에 파나마 대통령 노리에가가 미군을 살해하는 사건이 일어나자 파나마를 침공해 점령하고 노리에가를 재판에 회부, 30년형을 처하게 했다.

1990년 이라크의 독재자 사담 후세인이 쿠웨이트를 침공해 합병했다. 이에 대통령 부시는 노먼 슈워츠코프를 총사령관으로 앞세워서 이라크를 공격해 한달만에 승리를 거두었다.

그는 재임 기간에 소련 붕괴, 독일 통일을 목격했다. 외교군사 부문에서 많은 성과를 거두었으나, 경기침체에서 탈피하는 데는 실패했다. 빌 클린턴이 ‘바보야, 문제는 경제야’라고 한 것은 아버지 부시를 겨냥한 표현이었다. 1992년 대통령 선거에서 민주당의 빌 클린턴 후보에게 370 대 168의 압도적 표차로 패해 재선에 실패했다.

재선 실패후 1993년 텍사스주로 돌아와 노후를 보냈다.

그러나 7년 후인 2000년 클린턴의 후임으로 그의 장남인 조지 W. 부시가 미국의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부통령과 대통령 재임시에 한국을 방문했고, 퇴임후에도 여러 차례 한국을 찾았다.

 

▲ 부시 가문 사진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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