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 오늘] 러시아와 함께 하기 싫은 우크라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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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 오늘] 러시아와 함께 하기 싫은 우크라이나
  • 김인영 에디터
  • 승인 2018.11.30 1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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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민족이라고 한 나라로 있어야 하나”…국민투표로 러시아에서 독립

 

1991년 12월 1일 우크라이나에선 소련으로부터의 독립을 묻는 국민투표가 실시되었다.

투표는 “우크라이나의 독립선언법을 지지하십니까”라는 질문에 대한 찬반을 묻는 형식으로 진행되었다. 이 국민투표에서 전체 유권자의 84.18%인 3,189만명이 투표에 참가해 92.3%의 지지로 독립이 가격되었다.

이 투표에서 독립 지지율이 가장 낮은 지역이 크리미아 반도였다. 크리미아 반도는 우크라이나에 가장 소속감이 낮은 지역이었다.

이날 동시에 실시된 대통령 선거에서 독립을 지지한 레오니드 크라프추크( Leonid Kravchuk)후보가 우크라이나 초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이어 12월 5일 크라프추크는 대통령에 취임해 12월 8일 우크라이나, 러시아, 벨라루스 3개국 정상이 소비에트연방 탈퇴 문서에 정식으로 서명함으로써 우크라이나는 소련 연방국에서 독립국으로 전환했다.

 

▲ 우크라이나 위치

 

우크라이나인들은 러시아와 같은 슬라브족이지만, 같은 민족이라는 개념보다는 따로 독립해 살겠다는 성향이 강했다.

오랜 역사 과정에서 우크라이나는 모스크바, 레닌그라드 중심의 러시아와 차별성이 강했다. 고대에 그리스, 로마의 문화에 접근했으며, 비잔틴 문화의 거점이기도 했다. 몽골족 침입후 킵차크 한국의 중심지였고, 폴란드, 터키에 의해 지배받기도 했다.

우크라이나엔 코사크족이 슬라브족과 함께 살고 있었다. 코사크족은 제정러시아 시대에 러시아의 팽창에 첨병역할을 했지만, 독립적 성향이 강했다.

19세기가 되자 대러시아에서 독립하자는 우크라이나 민족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러시아 정부는 이를 억압하고 우크라이나의 러시아화 정책을 밀어붙였다. 하지만 우크라이나인이 밀집한 서부지역에서 민족 문화운동이 전개되었다.

동부 지역에서는 1917년 민족주의자를 중심으로 러시아로부터 분리 독립을 주장하며 우크라이나인민공화국을 선포했지만, 몇 개월도 되지 못해 볼셰비키 세력에 의하여 소멸했다.

그후 수립된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공화국은 폴란드의 무력 개입으로 영토를 빼앗기게 되었고, 다시 오스트리아-헝가리에 분할되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우크라이나 인들은 러시아인들의 무시를 뼈저리게 느꼈고, 이민족에 대한 독립의식을 강화시켰다.

1922년 소비에트 연방의 연방으로 편입된다.

1930년대 후반 스탈린의 집단농장화 정책과 대기근으로 우크라이나 농민 250만~350만명이 굶주림으로 수십만명이 아사하는 참사가 빚어지기도 했다. 이때 소련 당국은 집단농장화를 반대했거나 민족주의 정책을 지지했던 우크라이나 관리들을 숙청하고, 농민 반발을 통제하기 위해 마을을 통째로 강제이주시키기도 했다.

이러한 반발로 우크라이나인들은 2차 대전중인 1941~44년에 나치 독일을 해방자로 맞아들이기도 했다.

1980년대 미하일 고르바초프(Mikhail Gorbachyov)의 페레스트로이카 정책 이후 소비에트 연방의 장악력이 약화되자, 1991년 8월 24일 우크라이나 최고회의는 독립선언법을 채택하고 1991년 12월 1일 국민투표를 실시했다.

 

▲ 1991년 8월 24일 우크라이나 국민들이 독립 시위를 벌이고 있는 모습.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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