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9 오늘] 뿔뿔히 흩어진 티토의 유고연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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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9 오늘] 뿔뿔히 흩어진 티토의 유고연방
  • 김인영 에디터
  • 승인 2018.11.28 2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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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토주의로 통합된 유고슬라비아 연방…그가 죽고 갈등 증폭되며 해체

 

2차 세계대전 중 독일을 중심으로 하는 주축국의 공세가 꺽일 무렵인 1943년 11월 29일, 요시프 티토(Josip Broz Tito)가 주도하는 반파시스트 유고민족해방전선은 보스니아의 야이체에서 이 지하조직을 연방국가로 전환시킨다고 선언했다.

국내에는 독일군이 주둔하고, 파시스트 세력인 우스타샤(Ustasa) 세력의 세르비아인 대량학살이 진행되는 가운데 티토는 유고슬라비아(Yugoslavia) 연방공화국을 수립한 것이다. 유고(Yugo)는 현지어로 남(南)이란 단어로, 유고슬라비아는 ‘남슬라브의 나라’라는 뜻이다.

 

▲ 요시프 티토 /위키피디아

티토는 유고슬라비아 독립을 위해 영국과 소련을 끌어들였지만, 그 어느 진영에도 종속되지 않았다. 티토는 영국군의 지원을 얻기 위해 윈스턴 처칠 총리와 만나 과도정부 수립에 동의하는 한편, 영국의 눈을 피해 소련으로 가 이오시프 스탈린과 협상하면서 지원을 요청했다.

하지만 소련군의 지원으로 국내 파시스트세력을 제거한 이후 소련이 주도하는 코민테른에서 탈퇴하고 반스탈린노선을 채택했다. 물론 영국등 서방의 간섭도 뿌리쳤다.

2차 대전이 끝나고 티토는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마케도니아, 몬테네그로, 세르비아 등 6개 공화국으로 유고슬라비아 연방을 수립했다.

그는 우선 민족간 화해를 관철시켰다. 2차 대전 기간에 크로아티아인을 중심으로 하는 우파 우스타샤 세력이 독일군을 등에 업고 세르비아인을 30만명 이상 학살하는 사건이 벌어져 민족간 증오가 격화되는 것을 중재했다. 카톨릭과 그리스 정교, 이슬람의 종교적, 종파적 대립도 화해시켰다.

티토는 다민족 국가의 안정을 위해 중앙 집권적인 권력 강화보다는 개별 민족들의 상호 평등을 약속하고 6개 공화국과 코소보등 2개 자치주에게 고도의 독립성과 자주성을 보장하는 민주적 중앙 집권화의 원칙을 천명했다.

아울러 티토의 유고슬라비아는 동유럽 공산국과 달리 바르샤바 조약(WTO)에도 가입하지 않았고, 북대서양 조약기구(NATO)에도 가입하지 않고 비동맹 운동 노선을 걸었다.

티토는 공산주의 이념도 고집하지 않았다. 티토는 노동자 자주경영에 중점을 두었다. 티토의 노동자 자주관리 이론은 공산당이 시키는대로 공장을 운영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들이 산 경험에 근거한 지혜로써 직접 회사를 꾸리고, 회사의 살림살이에 참여하는 민주적 경영방식이다. 그의 사회주의 이념은 스탈린식 공산주의 체제를 거부한 독자노선으로, 서방지식인들로부터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로 평가받기도 했다.

 

▲ 유고연방 해체과정

 

하지만 티토라는 적대적 권위를 바탕으로 하는 티토이즘은, 그가 죽음으로써 위험에 빠졌다. 1980년 5월 티토가 사망하자 유고슬라비아 지도부 내에서는 대안의 지도자가 없었고, 따라서 연방에 위기가 찾아왔다. 경기가 후퇴하고, 다인종, 다종교, 다문화의 연방은 오히려 분열의 단초를 마련했다.

1987년 세르비아 민족주의를 주창한 슬로보단 밀로셰비치(Slobodan Milosevic)가 연방공산당 서기장에 오르면서 과거의 인종적, 종교적 갈등이 재연되고 내전이 촉발되면서 연방은 해체 수순을 밟게 되었다. 1991년 유고슬라비아의 구성 공화국이었던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마케도니아 공화국,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가 차례로 분리 독립하면서 티토의 유산인 옛 유고슬라비아 연방은 역사 속에 사려졌다. 유고슬라비아 연방은 7개 국가로 분리되었다.

 

▲ 분열된 유고슬라비아 연방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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