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 오늘] ‘세기의 말실수’로 무너진 베를린 장벽

샤보브스키 말실수에 동독 주민들, 장벽으로 달려가…우연과 필연의 결과 김인영 기자l승인2018.11.08 1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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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11월 9일 동독 정치국 대변인으로 막 임명된 귄터 샤보브스키(Günter Schabowski)가 기자들과 질의응답 시간을 가졌다. 새로 바뀐 여행법을 발표하는 자리였다.

그때 대본에 없던 질문이 나왔다.

어느 기자가 물었다. “동독인들은 언제쯤 자유롭게 서유럽으로 여행할수 있나요.”

샤보브스키가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그들은 원하는 곳이면 아무데나 갈수 있고, 아무도 그들을 막지 않을 것입니다.”

기자가 다시 물었다. “그 법은 언제부터 발효됩니까.”

“그는 서류를 뒤적이며 또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지금 당장입니다.“(this is immediately, without delay)사실 그는 개정된 여행법을 잘 몰랐다. 동독 정부의 여행자유화조치는 몇 달간에 걸친 주민들의 시위에 대한 대응조치로, 과거의 조치와 다른 새로운 내용이 것의 없었으며, 굳이 새로운 것을 들자면 여권 발급기간을 단축하는 정도였다고 한다. 시행 시기도 다음날이었다. 동독 정부가 임기응변으로 만든 조치였는데, 대변인이 법안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TV카메라 앞에서 ”지금 당장 여행자유화조치를 시행한다“고 발표한 것이다.

 

▲ 1989년 10월 9일 동독 정치국 기자회견. 귄터 샤보브스키는 연단 오른쪽에서 두 번째. /위키피디아

 

그의 발언이 TV로 방영되기 무섭게 수많은 동독인들이 베를린 장벽으로 달려갔다. 너무 많은 주민들이 달려오자 국경수비대도 시위대를 막지 못했다. 일부 흥분한 사람들은 도끼와 망치로 장벽을 부쉈다. 그들은 마치 둑이 처진 것처럼 국경아닌 국경을 넘어 서독으로 건너갔고, 그날밤 베를린 장벽은 무너졌다.

베를린 장벽 붕괴는 우연히 다가왔다. 과연 우연이었을까. 역사적인 사건은 우연에 의해 촉발되기도 하지만, 그 배경에는 필연이 작용힌다. 그 필연의 과정을 돌이켜보자.

 

① 통일의 서막을 올린 니콜라스 교회의 평화시위

베를린장벽 붕괴는 두가지 사건에서 단초를 형성한다. 첫째, 1989년 3월 13일 동독 라이프치히의 니콜라스 교회에서 예배를 마친 300명의 신도가 여행자유를 요구하며 시위를 벌였다. 둘째, 그해 5월 2일 헝가리 정부가 소련의 개혁 개방 정책을 받아들여 오스트리아와의 국경에 설치한 철조망을 제[거했다. 그러나 당시에 두 사건이 독일 통일의 회오리바람을 일으킬 것이라고 알아차린 사람이 거의 없었다.

독일의 일요신문 벨트암존탁은 동독 국민 150만명이 서독으로 이주하고 싶어한다고 보도했고, 동독의 철권 통치자 호네커 서기장도 더 이상의 국경탈주를 막을수 없어 발포 행위를 중단하겠다고 밝혔다.

동독에선 5월 7일 실시된 지방선거에서 부정 선거가 드러나 동독인들의 분노가 조직적인 정치운동으로 발전하는 결정적 계기로 작용했다. 밖으로는 서독행을 원하는 동독 난민들이 프라하, 바르샤바, 부다페스트의 서독 영사관으로 몰려들었다.

안팎의 상황 변화에 맞물려, 라이프치히 니콜라스 교회에서 매주 열리는 월요일 평화시위에는 9월 4일 1,200명이 모였다. 교회는 공산 치하의 동독에서 체제 이념에 흡수되지 않은 유일한 사회기관이었기 때문에 시민운동을 조직화하는 기회를 제공할수 있었다.

하이라이트는 10월 9일 라이프치히 월요 시위였다. 이날 무려 7만 명이 운집했다. 당시 동독 당국은 시위를 해산시키기 위해 무력을 사용할 계획이었다. 앞서 그해 6월 또다른 공산국가인 중국에서 벌어진 천안문 사태는 무력에 의해 진압된 바 있다.

하지만 치안당국은 시위군중이 그렇게 많이 모일줄 예상하지 못했다. 7만명의 군중을 경찰 병력 8,000명을 제어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당국은 개입하지 않기로 했고, 종주국인 소련도 무력 불사용을 묵인했다.

전문가들은 당시 소련 고르바초프와 동독 호네커가 탱크와 총칼로 짓밟고 나섰다면 모든 것은 끝났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렇다고 해서 민중의 집단적 저항과 역사의 도도한 흐름을 역류시키지는 못했을 것이다.

호네커는 결국 10월 18일 서기장에서 물러나고 에곤 크렌츠가 바통을 이어받았다.

 

▲ 1989년 10월 9일 동독주민들이 베를린 장벽을 무너뜨리고 있다. /위키피디아

 

② 파탄 상태의 동독 경제

크렌츠 신임 서기장이 권력을 물려받은 직후인 1989년 10월말, 경제전문 그룹의 대표인 게르하르트 쉬러가 신정부에 “동독 경제가 파산 직전의 상태”라고 보고했다. 그는 “동독이 현재의 국가 부채를 유지하기만 해도 국민의 생활수준이 25% 하락하며 통제 불능의 상태가 될 것”이라고 밝혔다.

동독 정부가 이 사실을 발표한 것은 처음이었고, 경제가 파산상태라는 정보를 들은 동독 주민들의 저항이 들불처럼 번져나갔다.

동독 경제는 40년간의 공산 체제로 인해 심각한 상태였다. 1980년대말 대부분의 동독 공장은 거의 폐허수준이었고, 기계는 구형이거나 낡았다. 건물과 교통 인프라, 통신부분도 비슷한 상황이었다. 제조업 생산력은 서독의 25~30% 수준에 머물렀다. 많은 제품들은 동독 내부나 공산 국가에서만 팔렸다.

1980년대 들어 생활필수품 부족 현상이 악화했다. 막대한 군사비와 거대해진 행정 경비의 부담으로 국민들에게 배를 불릴 여력이 없었고, 게다가 종주국인 러시아도 경제가 피폐해 지면서 동독에 싸게 지원하던 에너지등 원자재 공급을 줄였다. 국가부채는 늘어났고, 투자자금은 날로 부족해졌다.

호네커 공산 정부는 경제개혁을 할 능력도, 의지도 부족했다. 동독 경제의 근거가 무너지고 고르바초프의 등장과 함께 국제정치의 냉전 구도가 깨져가는 상황에서 동독인들은 자유와 평화를 위해 거리로 나섰고, '노이에스포룸' '데모크라티 예츠트' '민주약진' 같은 정당이나 정치조직이 활발하게 활동을 전개했다.

크란츠 정부는 서독정부에 100억 마르크라는 대규모 자금을 즉각 지원하고, 매년 20억 마르크씩 지원해 달라고 서독 정부에 요구했다. 서독 정부는 경제 지원을 약속해 줄테니 전력 공급 독점권을 포기하고, 민주주의 정당과 자유선거를 허용할 것을 요구했다. 돈은 주는 조건으로 동독 가두시위자들의 요구사항을 들어주라는 것이었다. 동독 정권은 안팎에서 압박을 받은 것이다. 크란츠 정부는 서독으로부터 경제지원을 약속받는 대가로 새로운 여행법을 내놨다. 하지만 사태를 진정시키기는커녕 악화시킬 뿐이었다.

 

③ 베를린 장벽 붕괴

▲ 귄터 샤보브스키 /위키피디아

11월 6일 하루에만 라이프치히와 드레스덴에 각기 30만 명, 10만 명의 시위대가 거리로 나와 공산 정부를 반대했다.

이런 가운데 귄터 샤보브스키의 ‘세기의 말 실수 사건’이 터지며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다.

베를린 장벽 붕괴는 즉각 통일의 열망을 들끓게 했다. 헬무트 콜 서독 총리는 동독 정부에 근본적으로 개혁하면 모든 것을 지원해 준다고 약속했고, 모드로브 동독 총리는 "변화는 되돌이킬 수 없다"며 현실을 직시했다.

그 사이 동독인들은 11월 20일 월요시위부터 "우리는 인민이다(Wir sind das Volk)"라는 기존 구호에서 나아가 "우리는 한 민족이다(Wir sind ein Volk)"라고 외치기 시작했다.

1990년 10월 2일 동독 의회는 톡일 통일을 가결한 후 스스로 해산하고, 다음날인 11월 3일 동독의 서독 편입을 공식 발효하면서 통일을 완성했다.

 

그러면 샤보브스키는 어떻게 되었을까.

동독의 입장에서 뜻하지 않게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자 그해 12월 그는 동독 집권당인 사회주의통합당(SED, 공산당)에서 퇴진했다.

독일 통일후 1992년부터 1999년 사이에 서독출신 저널리스트와 함께 Heimat-Nachrichten라는 주간지 편집장을 맡아 활동했다. 그는 정치적으로 전향해 우파 기독민주당을 지원했고, 그의 옛 공산당 동료들로부터 배신자로 비난받았다.

1995년 1월 서독으로 탈출하려는 동독주민을 살해한 혐의로 기소되어 19999년 12월 3년형을 받았다. 베를린 시장이 그를 용서해 수감 1년후에 석방되었다. 2015년 11월 1일, 향년 86세로 사망했다.


김인영 기자  inkim@opinio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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