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통신사선 재현…금강송으로 4년만에 건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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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통신사선 재현…금강송으로 4년만에 건조
  • 김현민
  • 승인 2018.10.26 0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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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양문화재연구소, 26일 목포서 진수식…첫 항해

 

조선 왕실은 일본 막부에 사절단을 보냈다. 이 사절단을 조선통신사라고 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일으킨 임진왜란이 끝나고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 시대가 열리면서 조선은 사명대사 유정을 일본에 파견해 국교를 회복했다.

1607년부터 1811년까지 약 200여년 간 조선통신사는 일본을 12번에 걸쳐 방문했다. 도쿠가와 막부의 경사나 쇼군의 계승이 있을 때마다 방문해, 조선 국왕의 국서를 전달하고 쇼군의 답서를 받았다. 조선통신사는 정사(正使)·부사(副使)·종사관(從事館)의 삼사(三使)이하, 화원(画員)·의원(医院)·역관(駅官)·악사(樂士)등 모두 400~500명의 대사절단이었다.

 

▲ 조선통신사 그림 /조선통신사문화사업 홈페이지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는 한일 교류의 상징물인 조선통신사선을 실물 크기로 처음 재현해 26일 오후 전남 목포의 연구소 앞바다 계류장에서 첫 항해를 알리는 진수식을 개최했다.

조선통신사선 재현선은 이 연구소가 2015년 설계를 시작해 4년 만에 건조한 배다. 이 배는 과거 운행되었던 조선통신사선 중에서도 정사(正使, 사신의 우두머리)가 타고 간 ‘정사기선’을 재현한 것으로, 구조와 형태를 최대한 원형에 가깝게 제작했다.

재현선의 규모는 길이 34m, 너비 9.3m, 높이 3.0m, 돛대높이 22m, 총 톤수 149톤으로 선박 목재는 강원도에서 벌채한 수령 80∼150년에 이르는 금강송 900그루를 사용했다. 재현선에 들어간 목재는 강원도 삼척과 홍천에서 자생한 70~150년생 금강송(소나무) 900여 그루가 사용되었다. 특히, 멍에는 해발 1,000m 고지대에서 벌채한 금강송(길이 20m, 직경 60㎝) 15그루가 사용되었다.

총 72명이 승선할 수 있다.

 

▲ 조선통신사선 재현선 /문화재청

 

재현을 위해 참고한 자료는 ▲선박 운항실태가 적힌 ‘계미수사록’(癸未隨槎錄, 1763년), ▲조선통신사선의 주요 치수인 ‘도해선척식(渡海船隻式)’이 수록된 ‘증정교린지’(增政交隣志, 1802년), ▲전개도와 평면도가 수록된 ‘헌성유고’(軒聖遺槁, 필사본 1822년)등 옛 문헌을 비롯해 ▲‘조선통신사선견비전주선행렬도’(朝鮮通信使船牽備前舟船行列圖, 1748년), ▲‘조선통신사선도’(朝鮮通信使船圖, 1811년), ▲‘근강명소도회 조선빙사’(近江名所圖會 朝鮮聘使, 1811년)등 일본 회화자료들이며, ▲2015년 수중 발굴된 조선 시대 선박(마도4호선)과도 비교·연구하여 제작에 참고했다.

 

▲ 조선통신사 행로 /조선통신사문화사업 홈페이지

 

조선통신사의 행로는 한양(漢陽)을 출발해 일본 수도 에도(江戸)까지 반년 이상이 소요되는 왕복 약3,000㎞의 여행이었다. 긴 여로의 곳곳에서 통신사는 일본의 많은 문인들과 필담을 나누고 노래와 술잔을 주고받았다. 조선통신사의 선단(船團)과 행렬은 일본의 민중들로부터 열광적인 환영을 받으며 일본 각 계층의 사람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진수식은 조선통신사기록물 세계기록유산 한․일 공동 등재 1주년에 맞추어, 첫 항해를 알리는 문화행사로 진행한다.

조선통신사 200년을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성신교린(誠信交隣)’의 의미를 담아 한․일 양국의 예술단체가 축하 공연과 기념행사를 춤과 음악이 어우러진 공연으로 연출하고, 바다를 관장하는 사해용왕께 맑은 술과 음식을 올리는 순으로 진행되며, 실제로 운행되는 시승식에서 진수식 참석 시민들과 관람객 등 일부 참석자들이 타볼 기회도 있다.

 

▲ 재현선 재작에 들어갈 목재 선별현장 (강원도 삼척시) /문화재청
▲ 제작현장(외판재 조립) /문화재청
▲ 조선통신사선 재현선 /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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