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6 오늘] 정치적으로 희생된 마리 앙투아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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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6 오늘] 정치적으로 희생된 마리 앙투아네트
  • 김인영 기자
  • 승인 2018.10.15 16:5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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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성국 출신 왕비에다 악성 루머, 여성 혐오가 빚어낸 마녀 재판

 

마리 앙투아네트(Marie Antoinette).

독일어로 마리아 안토니아 조세파 조하나(Maria Antonia Josepha Johanna)다. 오스트리아를 지배한 합스부르크 가문의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와 프란츠 슈테판 황제 사이의 막내딸로 태어나 14살에 프랑스 루이16세와 결혼해 왕세자비가 되고, 얼마후 남편이 왕위에 올라 왕비가 된다. 모든 것을 갖춘 여자였다. 미모도 뛰어났고, 머리도 명석했다.

하지만 프랑스 혁명은 그녀를 마녀로 만들었다. 1973년 10월 16일 낮 12시 15분 그녀의 목에 기요틴 칼날이 떨어지고, 숨을 거두었다. 나이는 한창인 38세였다.

그녀는 온갖 혐의를 뒤집어썼다. 재정 낭비, 부패, 오스트리아와의 결탁, 루이 16세를 타락시킨 혐의, 백성에 대한 기만, 전쟁 유발 등의 혐의가 가해졌다. 그러나 구체적인 증거가 없었다. 마지막으로 근친상간의 혐의가 제기되었다. 아들을 겁탈했다는 죄목이다. 그녀의 어떤 변명도 통하지 않았다. 그녀는 마침내 사형을 언도 받았다.

 

마리 앙투아네트에 관해서는 숱한 소설과 영화, 역사물의 소재로 다뤄져 왔다. 그녀는 “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으면 되지”라는 말을 했다고 파리 군중에게 알려져 분노를 샀다. 하지만 정작 그는 그런말을 한적이 없다고 한다. 평소 왕비로서는 검소하게 생활했고, 프랑스 내정에 간섭하지도 않았고,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가문의 요구를 받아들이지도 않았다고 한다. 남편인 루이 16세의 말도 잘 들었다고 한다.

220여년이 지난 지금 많은 저술들이 나와, 앙트와네트가 잘못된 정보, 루머에 의해 정치적으로 타살되었다고 밝히고 있다.

 

▲ 마리 앙투아네트와 자녀들 초상화(Vigée-Lebrun, 1787) /위키피디아

 

왜 프랑스 군중은 왕비를 마녀로 만들었을까.

 

그 첫째는 마리 앙투아네트가 프랑스의 오랜 숙적인 합스부르크 가문 출신이라는 사실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아직도 영친왕비 이방자 여사나, 덕혜옹주의 남편을 곱게 보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 프랑스와 합스부르크가의 나라들은 15세기 이후 오랫동안 패권경쟁을 벌이며 대립해왔다. 그러다가 신흥 프로이센이 강해지면서 오스트리아가 전략적으로 프랑스와 연대하기 위해 마리 앙투아네트를 프랑스 왕가로 시집보낸 것이다.

 

둘째는 사실보다는 루머에 의해 분노가 폭발했다는 점이다.

그녀를 재판정으로 이끈 결정적 사건은 다이아몬드 목걸이 사기사건이었는데, 라 모트 백작 부인이 앙투아네트를 사칭해 거액의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편취했으며, 앙투아네트가 관여한 사건은 아니었다. 하지만 조작된 루머는 진범은 앙투아네트이고, 라 모트 백작부인은 이용당했을 뿐이라는 것이었다. 혁명재판에서도 이 사건은 무고로 확인되었다.

근친상간도 무고였다. 프랑스인들은 온갖 성적 모욕을 마리 앙투아네트에게 들이댔다. 동성애, 근친상간, 하루에 수십 명을 상대한다는 등…. 왕비는 수많은 악성루머 창작자들에 능욕당한 셈이다.

 

셋째, 당시에 판친 여성혐오다. 일본의 소설가 엔도 슈사쿠는 이런 관점에서 ‘마리 앙투아네트’(2017, 국내출간)를 집필했다. 그 책을 읽지 못했지만, 출판사(티타임) 서평을 통해 엔도 슈사쿠의 관점을 소개한다.

 

“왜 그랬을까? 여자였기 때문이다.

1789년 혁명 이후 마리 앙투아네트에 대한 포르노그라피는 노래와 우화, 가상 전기와 고백, 연극에 이르기까지 모든 장르를 망라했다. ‘마리 앙투아네트의 생애에 대한 역사적 논문’, ‘루이 16세의 부인, 마리 앙투아네트의 자궁의 분노’, ‘프랑스 국왕 루이 16세의 부인, 오스트리아의 마리 앙투아네트의 삶, 처녀성 상실부터 1791년 5월 1일까지’, ‘프랑스의 전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의 은밀하고 방탕하고 추잡한 삶’ 등 대충 제목만 훑어보아도 책의 내용이 얼마나 저열하고 악의적인지 짐작할 수 있다.

이 책들은 마리 앙투아네트가 첫 번째 연인으로 추정되는 독일 장교를 비롯하여 자기 주변의 거의 모든 사람들과 애욕적인 포옹을 하고 있는 삽화들로 가득 차 있었다. 다이아몬드 목걸이 사건의 로앙 추기경과 라파예트, 바르나브 등도 왕비의 성적 파트너로 등장했다. 발기 불능인 국왕을 대신하여 아르투아와 폴리냑이 왕비를 상대하고 있는 채색 판화도 있고, 두 여자와 한 남자가 3인 1조를 이루어 섹스를 즐기는 삽화도 있었다. ……

그리고 마침내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최악의 시나리오, 아홉 살짜리 아들과 근친상간을 했다는 주장이 뻐젓이 근엄한 재판관의 판결문에 등장했다. 마리 앙투아네트를 단두대에서 처형한 결정적 죄목이 이것이었다.

혁명 세력은 근친상간이라는 인류의 금기까지 내세우지 않고는 그녀에 대한 단죄를 도저히 정당화할 수 없었던 모양이다. 마리 앙투아네트가 역사상 최초의 여혐(女嫌, misogynie)의 희생자라고 우리가 단언할 수 있는 근거가 바로 그것이다. 그녀는 정치적 영역에서 여혐의 희생자가 된 사상 최초의 공적 여성이었다.“

 

▲ 마리 앙투아네트 (Vigée-Lebrun, 1787)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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