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0] 한발의 총소리에 무너진 淸 제국

신해혁명 2년후에 청조 붕괴…집권층 배신, 새로운 사상, 민심이반 김인영 기자l승인2018.10.09 1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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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1년 10월 10일 저녁, 중국 헤베이(湖北)성 무창(武昌)에서 한발의 총성이 울려 퍼졌다. 그 총소리가 난후 4개월 후인 1912년 2월 12일 청(淸)나라의 마지막 황제 선통제(宣統帝)가 퇴위를 선언한다.

중국에선 이 짧은 기간의 역사를 신해(辛亥)혁명이라고 칭하고, 무창봉기(武昌蜂起)가 일어난 10월 10일을 쌍십절이라고 하여, 중화민국 건국기념일로 정해 매년 행사를 벌이고 있다.

 

그날 총을 누가 먼저 쏘았는지에 대해선 중국 역사학자들도 아직 규명하지 못하고 있다. 다만 무창의 군인들이 쓰촨(四川)성 민란을 진압하라는 청조의 명령을 거부하고 집단으로 거병한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이 한발의 총성이 혁명의 도화선이 됐다.

봉기 이틀후인 10월 12일 무한 삼진이 혁명군 수중에 떨어졌고, 12일 후 후난(湖南)성이 독립을 선포했다. 이어 산시(陕西)성, 장시(江西)성이 호응했고, 두달 사이에 전국 14개 성(省)이 청 제국에서 분리 독립을 선언했다. 당시 일본이 점령한 타이완(臺灣)성을 제외하고 22개 성 가운데 3분의 2가 독립을 선언한 것이다. 무창봉기 이후 3달도 되지 않은 12월 29일 17개 성 대표들이 난징에 모여 중화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하고, 쑨원(孫文)을 대총통으로 선출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혁명세력의 힘은 청조의 군대를 능가하지 않았다. 청조는 이빨 빠진 호랑이가 아니었다. 북양군을 비롯해 화북지역에 배치된 청군의 무력은 충분히 난징의 혁명세력을 제압하고도 남았다.

 

▲ 성룡 주연의 홍콩영화 「신해혁명」 (2012년 작)의 한 장면 /네이버 영화

 

그러면 1616년 누르하치가 건국한 이후 300년 이상 유지되어온 만주족 황제국이 한순간에 무너진 이유는 무엇일까.

 

① 배신한 사대부 집권세력

 

무창봉기가 일어나던 날의 일화다. 공병대 지휘권을 쥐고 있던 장교 나자청(羅子淸)이 부하에게 바깥 소식을 물었다. 부하는 “30개 연대가 오늘 일어난다고 합니다”고 귀뜸했다. 그러자 나자청은 “나는 오늘 저녁 일이 있어 병영에 없을 것이네, 그러니 자네들이 잘 관리하게”라며 줄행랑을 쳤다. 지휘관이 군권을 스스로 혁명군에 넘겨준 셈이다.

또다른 총독은 봉기가 일어나자 며칠후 가족들을 데리고 양쯔강에 정박한 군함을 타고 도망을 쳐버렸다.

혁명군이 이틀만에 무한 3진을 점령하는데는 이러한 지배층 배신의 덕이 컸다. 봉기 초기 혁명군은 2,000명 정도에 불과해, 청으로선 초동 진압이 충분할 가능했다. 하지만 군 지휘관들의 배신으로 혁명군은 거점을 장악할수 있었다. 쑨원은 훗날 혁명 초기의 승리를 거론하며 “행운이었다”고 회고하기도 했다. 생각지도 않은 집권세력의 배신이 혁명의 불길을 키워준 것이다.

가장 큰 배신은 북양대신을 하다 좌천당한 위안스카이(袁世凱)였다. 청조는 무창봉기가 발발하자 위안스카이에게 정예군을 맡겨 혁명군을 토벌하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그는 휘하 장교가 모인 자리에서 뜻밖에도 “작금의 변란은 군주 전제정치를 타파하고 공화를 실헌히기 위함이니, 모든 동포는 이를 지지할 것이다”라며 총구를 베이징으로 돌렸다.

▲ 위안스카이(袁世凱) /위키피디아

임오군란때 조선에 파견되기도 한 그는 입신출세를 위해 무슨 일이라도 저지르는 음모가였다. 위안스카이는 혁명군과 타협하고, 그 타협안을 황제에 내밀에 퇴위를 압박했다. 청의 마지막 황제 푸이(선통제)는 믿었던 위안스카이마저 배신한 상태에서 존엄과 명예만 보전해주는 조건으로 황제의 퇴위를 요구했다.

무창봉기 이후 한족 지배층의 이반은 60년전 신해년의 태평천국의 난(1851~64년) 때와 양상을 달리했다. 태평천국의 난때에는 증국번(曾國藩), 리홍장(李鴻章), 좌종당(左宗棠), 호림익(胡林翼) 등 한족 사대부들이 공맹(孔孟)의 도를 신조로 삼아 대청제국을 자신의 왕조로 간주하고 궐기했다. 그들은 황제의 병사를 조직해 연이은 패배에도 굴하지 않고 꿋꿋하게 싸워 난을 평정했다.

하지만 무창봉기가 나고 한족 사대부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리홍장의 수제자격인 위안스카이는 청조에 배신을 때렸다.

 

② 새로운 이념의 등장

 

그러면 태평천국의 난 때 청조에 충성심을 보였던 한족 사대부들이 60년만에 갑자기 돌아선 것은 무슨 연유에서일까. 그 이유는 바로 공화제라는 새로운 사상이었다는 게 중국학자 이중텐(易中天)의 분석이다.

태평천국의 난 때에는 중국 지식인들 사이에 공화제, 즉 민주주의 사상이 침투해 있질 않았다. 반란을 일으킨 종교집단의 이념과 제도가 청조의 그것보다 우월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후 중국 지식인들에게 서양의 공화제 이념이 침투했고, 쑨원을 중심으로 한 공화파가 홍콩을 중심으로 정치세력화하고 있었다.

이중텐은 자신의 저서 「제국을 말하다」에서 “한족 사대부들에게 청 제국과 태평천국 중에서 고르라고 한다면 그들은 당연히 전자를 택하겠지만, 청 제국과 중화민국 중에서 선택하라면 후자를 선택할 가능성이 높다”고 지적했다.

공화 사상이 없었다면 무창봉기도 없었고, 그 봉기가 없었으면 청나라가 멸망할 일도 없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청나라의 멸망은 진시황제가 일군 진(秦) 제국의 멸망과 다르다.

중국을 나눠 지배해던 전국시대의 6국 체제는 서쪽 변방의 진나라에 의해 통일된다. 하지만 진 왕조도 통일후 15년만에 멸망한다. 그것도 청나라가 멸망한 것처럼 군사들이 창졸간에 나무를 깎아 병기를 만들어 반란을 일으키는 바람에 순식간에 대제국은 붕괴됐다.

하층 천민 출신 잡졸인 진승과 오광이 “왕후장상에 무슨 씨가 있느냐”며 반란을 일으켰다. 그들의 구호는 하급 군졸과 기층 민중을 궐기시켜 중국 최초의 황제국 진나라를 멸망시키는데 성공했지만, 전제군주제를 폐기시키지는 못했다.

그러나 신해혁명의 총성은 2천년 이상 이어온 중국의 전제주의를 종식시켰다. 공화제는 황제국가에서는 철저하게 탄압받는 이데올로기였지만, 지식인들의 머리 속에 파고들어 새로운 제도를 만들어놓았다.

 

③민심이반

 

▲ 쑨원(孫文) /위키피디아

성공하면 혁명, 실패하면 반란이요 역모다. 어느 혁명이나 반란에 앞서 반드시 민심이반이라는 기초여건이 형성된다.

청조도 민심을 잃었다. 오랜 외세 침략과 반란으로 황제에 대한 신의를 잃었고, 말기의 서태후의 문란한 사생활과 권력욕은 민심은 물론 지배세력의 분열을 초래했다. 황제는 무능했다. 관료들은 부패했다.

하지만 이런 것들만로 청조의 멸망을 설명하긴 어렵다. 만주족의 청나라는 여러 소수민족의 반란과 한족의 민란을 진압하며 300여년을 질기게도 이어나갔다. 하지만 서양의 민주주의라는 악성 바이러스가 지식인들의 뇌를 잠식하고, 지배층 내부가 이반하는 것을 통제하지 못했다.

겉으로는 강하게 보였던 청나라는 한발의 총성에 300년 역사를 마감하고 말았다.


김인영 기자  inkim@opinio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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