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 오늘] 지워지지 않는 명성황후 시해사건

생생한 증언 있는데도 일본은 아직도 부정…장충단공원에선 추모제 김인영 기자l승인2018.10.07 17:18

크게

작게

메일

인쇄

신고

 

1895년(고종 32년) 음력 8월 20일, 양력 10월 8일은 명성황후가 시해된 날이다. 우리는 이를 ‘을미사변’(乙未事變)이라 한다. 한 나라의 국모가 침략자의 창검에 참혹하게 살해되고, 범인들은 그 증거를 없애기 위해 시신을 불태운 국치일이다.

 

그날의 기록을 조선왕조의 정사 「조선왕조실록」은 어떻게 정리했나. 「고종실록」 32년조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음력 기준)

 

8월 20일, 묘시에 왕후가 곤녕합에서 붕서하다.

8월 22일, 왕후 민씨를 서인으로 강등하다.

8월 23일, 왕태자가 상소문을 올리다. 폐서인 민씨에게 빈의 칭호를 특사하다.

 

웬일인가. 국모가 일본에 의해 살해되었는데, 서인으로 강등되고, 왕세자(후에 순종)가 상소문을 올려 간신히 빈(嬪)이라는 하위등급에 머물도록 했다니….

군왕이자 남편인 고종이 그랬을까. 그렇지는 않다. 그러면 「고종실록」에서 조선의 국모가 무참하게 살해된 사건을 이처럼 비하한 까닭은 무엇일까.

그것은 「조선왕조실록」 가운데 「고종실록」과 「순종실록」을 일본인이 썼기 때문이다. 고종실록이 편찬된 때는 일제식민통치기다. 일제가 조선을 강점한후 고종과 순중을 포함해 조선왕족을 관리하기 위해 이왕직(李王職)이라는 관청을 설치했다. 순종이 돌아가신 다음해인 1927년 4월 이왕직에서 역대 실록의 예에 따라 고종과 순종의 실록을 편찬하기로 했다.

실록편찬위원회는 초대위원장에는 일본인 이왕직 차관 시노다(篠田治策)가 취임했다. 편찬 총책임은 경성제국대학 교수이던 오다(小田省吾)가 맡았다. 당연히 일제에 불리한 내용은 삭제하고, 미화하는 작업이 이뤄졌다. 실록 원고는 일본인 이왕직장관의 결재를 얻어 간행됐다. 「고종실록」과 「순종실록」은 실록이라 할수 없다. 일제에 의해 왜곡되고 손상된 실록일뿐이다.

 

▲ 경복궁 건천궁 /문화재청 경복궁

 

하지만 역사의 상흔은 아무리 지우려 해도 지워지지 않는다. 지금으로 치면 청와대 비서실 일지에 해당하는 「승정원일기」에 그 흔적이 남아있다. 1995년 8월 20일자 「승정원일기」에 조선왕의 비서들은 이렇게 기록했다.

“이날 오전 세시가 지난 두헤 일본인이 두 명의 훈련대원과 함께 갑자기 곤녕합에 들어와 순식간에 변란을 일으켰다. 궁내부대신 이경직이 곤녕합 대문 밖에서 살해되고 연대장 홍계훈도 광화문 밖에서 살해됐다.” (是日寅正後, 日人與二訓鍊隊, 突入坤寧閤, 變起創卒, 宮內府大臣李耕稙, 遇害於坤寧閤楹外, 聯隊將[聯隊長]洪啓薰, 遇害於光化門)

 

구한말에 조선에 입국해 선교활동을 벌인 미국인 호러스 언더우드의 부인 릴리어스 호튼 언더우드(1851–1921)가 자신의 체험을 정리해 ‘Fifteen Years Among The Top-Knots'(상투쟁이들과 함께한 15년)란 견문록을 냈다. 그는 명성왕후와 친밀한 관계였는데, 그의 저서에서 당일의 상황을 이렇게 정리했다. (184~189p)

 

“1895년 10월 8일 아침에 우리는 대궐에서 나는 총소리를 들었다. 그때는 평화로운 때였기 때문에 그 소리가 틀림없이 불길한 징조임을 알수 있었다. 확실한 것은 아무 것도 알수가 없었고 모든 것이 혼란스러웠다. 다만 일본 군대가 새벽 세시에 대원군을 호위하고 대궐에 도착하여 지금 대궐문을 지키고 있다는 것만 알수 있었다. 그러나 오후까지는 아무 것도 알수 없었다. 오후에 한 조선 양반을 만나자 그는 기절할 듯이 놀란 얼굴로 지금 막 왕비가 살해되었다는 보고를 받았다고 말했다.

▲ 명성황후 /한선생 제공

그 뒤 몇시간 동안에 좀 더 상세한 소식이 들려왔는데 이 소식은 확실한 것으로 굳어졌다. 그 즈음에 대원군은 대궐에서 쫓겨나 시골집에 연금되어 있었는데, 그것은 그가 임금에게 반대하는 음모에 가담했기 때문이다. ……

외국인 두 사람 곧 러시아 사람인 사바틴씨와 미국인인 다이 장군이 그대 일어난 일을 거의 모두 보았던 사람들인데 이 두 사람은 다음과 같이 서로 맞아 떨어지는 말을 하였다. 곧, 일본인 장교 휘하의 군대가 대궐 마당과 왕족의 처소를 에워쌌다는 것, 일본인 장교들이 대궐 마당에 저질러진 난폭한 짓을 눈으로 보고 있었다는 것, 그 모든 것을 일본인 ‘소시’(낭인)나 직업적인 칼잡이들이 저지른 것임을 그들 모두가 알고 있었다는 점들이다. 서른 명쯤 되는 이 암살자들은 “왕비, 왕비” 어디 있어“하고 외치면서 왕족의 숙소에 들이 닥쳤다. ……

일본인 하나가 임금의 어깨를 잡고 밀어 제쳤다. 궁내부 대신 이경직은 전하의 눈 앞에서 일본인에게 죽임을 당했다. 세자 저하도 일본인에게 붙들렸다. 그들은 저하의 모자를 찢어발기고 머리채를 끌어당겼다. ‘소시’는 왕비가 어디 있는지를 대라고 하면서 칼로 저하를 위협했다. 마침내 그들은 가련한 왕비를 찾아내서는 칼로 찔러 죽였다. 시체를 덮어 두었다가 궁녀들을 데려 와서 갑자기 그것을 보여주었다. 그러자 그들은 공포에 질려 ‘중전마마! 중전마마!’ 하고 소리쳤다. 이것으로 충분했다. 이런 계략으로서 이 암살자들은 자기들이 원했던 사람들을 제대로 쓰러뜨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뒤 곧 거기서 그다지 멀지 않은 작은 숲으로 시체들을 옮겼고, 그 위에 등유를 부었다. 그리고 불을 붙엿고 뼈 몇줌만이 남았다.“

 

그날의 일을 복원해 보자.

경복궁 건청궁(景福宮 乾淸宮). 이 곳이 명성황후가 일본 낭인들에게 시해당한 곳이다. 그 시각 명성황후는 건청궁 안의 곤녕합(坤寧閤)에 머물고 있었다.

그날 새벽 흥선대원군을 태운 가마와 일본의 낭인무리들은 서대문에서 조선훈련대와 합류해 광화문에 이르렀다.

훈련대 연대장으로 1중대 병력으로 왕궁호위를 맡았던 홍계훈을 칼로 쳐 죽이고 군부대신 안경수마저 죽이고 경복궁에 난입했다. 이를 저지하던 궁내부대신 이경직도 일본의 칼에 죽으니 세자(후에 순종), 힘없는 궁녀, 명성황후만 있을 뿐이었다. 세자를 밀쳐내고 명성황후를 찾아 수차례 칼로 난자했다. 그들은 시체를 녹산에서 태우고 경회루에 재를 뿌렸다.

 

명성황후를 끝까지 지키다 순국한 홍계훈은 누구인가.

홍계훈은 사실 영화와 뮤지컬 드라마에서 명성황후의 호위무사로 많이 거론되는 사람이다. 그는 동학농민 항쟁을 진압한 공을 세웠지만 농민군이 전라도를 점령하고 있을 때 관군의 힘으로 진압할 수 없다 하여 고종으로 하여금 청군을 끌어들여 청일전쟁의 단초를 제공한 인물이다. 어쨌든 이 일로 고종의 총애를 받아 훈련대 대장에 임명되었고 임오군란때 군인들이 궁궐에 난입 명성황후를 죽이려고 할 때도 지켜 궁궐 밖으로 피신토록한 사람이다.

 

일본은 아직도 명성황후 시해를 부정하고 있다. 일본 언론은 명성황후 시해를 고종이나 대원군이 주도했다는 식으로 왜곡 보도하고 있다. 일본 지식인들의 DNA에는 역사왜곡의 인자가 박혀 있는 것 같다.

이 사건의 주모자였던 일본인은 나중에 어떻게 되었을까. 당시 사건현장에 있던 미야모토 소위와 마키 특무조장은 사건 한 달여 뒤 본국으로 소환된 뒤 참고인 조사를 대충 받았고, 다시 1년 9개월 후에 타이완 헌병대로 발령났다.

사변의 총책임자로 지목된 미우라 고로 공사를 비롯해 일본인 56명(군인 8명, 민간인 48명)은 사건 3개월여 만에 모두 무죄 판결을 받았다. 세계사에서 유례가 없는 참사이자 민족 자존심을 짓밟은 사변이었지만, 일본은 유야무야로 결론짓고 말았다.

 

▲ 장충단비. 비문은 명성황후의 아들 순종이 썼다. /사진=김인영

 

매년 10월 8일이면 서울 중구 장충동에 있는 장충단에서 을미사변 때 순사한 열사들에게 제사를 지내는 장충단추모제가 열린다.

장충단은 을미사변과 임오군란으로 순국한 충신과 열사를 제사지내기 위해 1900년 고종이 건립한 일종의 국립묘지다. 을미사변때 순국자한 홍계훈, 이경직 등을 추모하는 행사였다.

고종은 명성황후가 살해된 지 5년 뒤인 1900년 9월, 남소영(南小營) 자리에 장충단을 꾸며 을미사변 때 순사한 장졸들의 영혼을 배향하여 매년 봄·가을에 제사를 지냈다. 그러나 1910년 8월 장충단은 일제에 의해 폐사되고 말았다. 1920년대 후반부터 일제는 이 곳 일대를 장충단공원으로 이름하여 벚꽃을 심고 공원시설을 설치했다.

6·25 때 장충단 사전과 부속 건물은 파손됐으나, 비는 남았다. 비 앞면의 장충단이라는 글씨는 순종이 황태자였을 때 쓴 것이다. 이 비는 지금 서울시 지방유형문화재 제1호로 지정돼 있다. 이 비는 지금 신라호텔 자리인 영빈관 내에 있었는데, 1969년 지금의 수표교 서편으로 옮겼다.


김인영 기자  inkim@opinionnews.co.kr
<저작권자 © 오피니언뉴스,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인기기사

기사 댓글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0 / 최대 400byte

숫자를 입력해주세요

욕설등 인신공격성 글은 삭제합니다.
여백
회사소개기사제보광고문의불편신고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서울 용산구 한강로 1가 50-1 용산파크자이 디-412호  |  대표전화 : 02)780-9533   |  팩스 : 02) 780-9545
등록번호 : 서울 , 자00502  |  발행·편집인 : 김인영  |  청소년보호책임자 : 김송현 Copyright © 2018 오피니언뉴스. All rights reserved.